남북통일 반대하는 무리들을 보면 어김없이 친일파다

백범 김구, 귀국하자마자 왜 동학성지 봉황각 찾았나

통일비용이 많다지만 분단유지비용이 몇배 더 많이 들어가고 있다

일제가 황해도 수안을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한 까닭은

이곳이 일제를 가장 뼈아프게 괴롭힌 김구가 동학접주로 봉기한 곳이기 때문이다.

 

▲ 봉황각 앞에 지어진 동학 천도교 수행관.

우리민족 근대역사에서 동학만큼 영향력이 컸던 단체가 없을 것이다. 그 지대했던 영향력에 비하여 동학은 형편없이 저평가 되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정신으로 백성들을 각성시켜 주인정신을 갖게 하였고, 함께 잘 사는 사회를 향한 열망을 갖게 한 것이 동학이었다. 동학이 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키고, 3.1혁명에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런 역사는 교과서나 언론에서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다룬다. 왜 그럴까. 아직도 친일부역세력 세상이고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조선총독부 사관 추종세력이 우리 역사학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주 원인제공자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쫓겨났지만 그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1년 만에 버젓이 판사로 복직된다. 그가 재판관이 되어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장본인이다. 그뿐이랴, 해방 후 1960년대 독립유공자를 선정하는 심사위원자리에는 대표적인 친일 사학자인 이병도와 신석호가 앉았다.

이런 주객전도의 현상은 구한말이나 해방공간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2017년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식민사관으로 점철된 한국 주류역사학계가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고, 동학이 어떤 것이었는지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이것이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것과 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 서울 성북구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말을 따라서 지은 것이다. 삼일만세독립투쟁의 산실이었다. 동학 천도교 의암 손병희가 주도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라도 그 뿌리가 살아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잎과 열매를 내듯이 현재 대한민국에는 주류 식민사학에 대항해 우리의 진짜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있다. 또 동학의 진정한 정신을 계승하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분들이 있다. 이런 단체와 개인들이 묵묵히 역사복원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에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로 설 것이며 통일대한민국은 번영의 길로 갈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는 단체 중의 하나가 (사)동학민족통일회다. 이 단체는 동학 이념을 사회속에 구현하고 민족 자주, 민주, 통일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동학(천도교)의 전위단체이다.

이 단체는 이런 정신으로 매달 한번씩 시민강좌를 개최해 오고 있다. 지난 서기2017년 10월 25일 수운회관에서 열린 시민강좌는 손윤 의암경영연구소장이 맡았다. 손윤 강사는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 협의회(미사협)’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남북통일의 득과 실”이라는 주제로 한 발표였는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는 사실들이 나타나 큰 관심을 끌었다. 그의 강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귀국하면서 손병희 선생 묘소를 가장 먼저 찾은 까닭은?

광복 후인 서기1945년 11월 23일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제일 먼저 들린 곳이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인 봉황각이었다. 김구 선생은 왜 귀국하자마자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찾았을까? 그 내력은 이렇다.

김구 선생은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2대 교주 최해월 선생을 만난다. 19세에는 황해도 지역 동학교단조직 접의 책임자인 접주가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는 15명의 접주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김구 선생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김구 선생의 휘하에는 700여명의 정예부대가 있었다. 김구 선생은 이 부대를 이끌고 해주성을 공략하는데 팔봉산 아래에 산다고 하여 깃발을 팔봉대소라 지었다. 김구 선생이 황해도 (소)접주였을 당시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 북접 통령이었다.

그 후 손병희가 민족대표 33인을 규합하여 3.1혁명을 주도했고 이 때문에 일제에 체포된다. 손병희가 체포될 당시 신분은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손병희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기 때문에 대통령직은 공석으로 두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대통령을 참칭하므로 현재로 말하면 헌법인 임시의정원법위반으로 1925년에 이승만을 탄핵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고 물줄기의 끝을 따라가 보면 물줄기의 근원이 나온다. 백범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추적하다가 의암 손병희 선생이 임시정부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김구가 해방된 나라에 귀국하자마자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찾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서기2017년10월25일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동학민족통일회 월례 시민강좌가 열리고 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의암경영연구소 손윤 소장은 통일은 민족숙원과제라며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통일이 불발되면 지도에서 보는 보는 바 같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무너질 경우, 외세에 의해서 다시 분할될 것으로 내다 봤다.

2. 건국절 논란과 남북통일

건국절 논란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에 불거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서기1919년 3월 1일 되었다고 봐야한다. 3.1혁명은 동학이 낳은 것으로 임시정부의 통치이념이 바로 3.1정신이다. 건국절과 건국이념을 동학과 3.1운동에서 찾으면 남북한 모두 동의할 수 있다. 동학혁명과 3.1형명에 대해서는 북측도 부정하지 않는다. 3.1혁명을 함께 일으켰고 그 후 독립운동도 함께 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과 3.1만세 운동은 남과 북이 공유하는 역사이므로 동학과 3.1혁명에서 통일의 정통성과 기본정신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정신으로 남과 북이 통일을 해야만 진정한 통일대한민국이 될 수가 있다.

통일비용을 걱정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은 분단비용이 통일비용보다 약 10배 이상 많이 든다. 경제적인 비용 뿐 아니라 전쟁발발우려에 대한 정신적 피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통일이 된다면 실질적으로 영토도 넓어진다. 동학과 3.1혁명정신으로 통일을 하면 간도협약의 무효화를 주장할 수 있기에 원래 우리의 땅이었던 간도를 되찾을 수 있다. 200만명 이상의 동북삼성 조선족을 위해서도 통일은 해야 한다. 통일이 되면 독도문제는 자동해결이 되며 동해와 서해 남해를 아우르는 해양대국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 동학과 3.1정신으로 계승되는 민족주의가 통일의 이념이 되고 통일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통일의 주체는 국민이 되어야 하며 통일의 이념은 동학이 낳은 3.1혁명 정신이어야 한다.

이 처럼 모든 문제의 해결점을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를 교육부 산하의 정식 법인화 과정에서 만든 미사협 정강 1조에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사편수회가 우리 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였다. 일본이 왜곡 조작한 그 역사를 폐기하고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 봉황각 배치도. 봉황각은 동학 교주 수운 최제우의 뜻을 이어받아 기획되어 지어졌다. 동학 후신인 천도교는 수운의 궁을弓乙를 본떠서 천도교 문장을 만들었다. 마찬 가지로 봉황각도 여성기운을 뜻하는 을乙자 구조로 지어졌다고 평가받는다. 여성기운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향후 인간세월이 처음 처럼 여성(마고삼신)이 주도하는 세상이 될 것을 내다봤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유투부 동영상 갈무리.

3. 일제가 황해도 수안군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비정한 또 다른 이유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왜곡 조작한 것 중의 하나가 지금의 황해도 수안군에 한사군의 낙랑군 수성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식민사학자가 먼저 주장하였고 이병도가 그 설을 따랐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주류역사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 낙랑군 수성현은 현재 북경 근처인 하북성 노룡현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황해도의 수안군을 한사군의 수성현으로 비정했을까? 많이 알져지지 않았지만 황해도 수안군은 동학혁명과 3.1만세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곳이다. 일제는 동학을 가장 싫어했는데 이 동학이 황해도에서는 수안에서 가장 성했다. 3.1혁명 당시 황해도에는 독립선언서가 1,000부가 배부되었고 천도교인 19명이 죽임을 당했다. 특히 황해도 지역은 김구 선생이 접주로 활동하던 지역으로 김구 선생은 나중에 3.1만세운동에도 참여했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시절 백범일지가 조작되어 김구 선생은 3.1만세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김구 선생은 동학과 3.1혁명 정신으로 임시정부로 갔고 해월 최시형 선생과 의암 손병희 선생과의 의리를 지켰다. 이렇듯 김구 선생은 동학과의 연이 깊었기 때문에 해방 후 귀국할 때 가장 먼저 손병희 선생의 묘를 찾았던 것이다.

일제가 황해도 수안을 역사왜곡의 중심으로 삼은 이유는 동학과 3.1혁명이 치열했던 그 땅을 유린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이다.

손윤 소장의 발표를 보면 그동안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백범 김구의 정신지주가 사실은 동학이었다는 점이다.

또 이날 강연은 남북은 동학과 3.1운동 정신으로 통일을 해야만 두 체제가 진정한 통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손병희, 김구 두 분의 독립투사 행적을 추적해 봄으로써 근대사에서 동학의 역할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강연 후 토론 시간에는 통일의 실(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통일을 했을 때 잃는 것은 오로지 친일·친미 기득권세력의 몰락과 반공이데올로기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라고 했다.

▲ 왼쪽이 이날 강사로 나선 손윤 의암경영연구소 소장, 오른쪽이 토론자로 나선 임형진 경희대 교수. 임 교수는 이날 토론자로 나서면서 통일되면 민족이익이 넘치고 분단은 민족은 사라지고 친일, 친미파 기득권만 굳어진다고 주장했다.

임형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임 교수는 손윤 소장의 강연에 덧붙이는 형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분단상황과 통일상태를 비교했다. 통일되면 해외진출과 경제면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현재 우리는 나라 밖으로 나가려면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이는 섬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상황이다. 임 교수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면서 이는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통일되면 해외로 걸어서도 갈수 있고 자전거 타고도 갈수 있다며 설레임을 드러냈다. 이에 방청객이 웃음으로 호응했다.

또 현재 남한은 경제가 한계점에 이르렀는데 건설업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재개발 밖에 없는데 이것 따 내려고 온갖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고 있다고 짚었다. 결국 현재 남한은 경제성장동력이 고갈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통일되면 북한은 온통 개발천지라며 남북한 경제가 도약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구나 북측은 지하자원이 경단위로 추산되는데 지금 거의 하나도 개발되지 않은 상태라며 통일은 되면 될 수록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통일되면 잃는 것이 뭐냐"고 의문을 제기한 뒤, “아무래도 친일파, 친미파들의 이익이 없어지는 것 뿐”이라고 일갈했다. 또 “반공주의와 종북좌파몰이가 사라질 것이다. 그동안 반공과 종북몰이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 친일, 친미파들이 얼마나 국가보안법을 이용해 반공을 앞세워 나쁜 짓을 많이 했나, 결국 통일되면 분단을 이용해서 기득권을 누린 세력들이 소멸될 것이다.” 라고 내다봤다.

▲ 시민강좌에 앞서 이날 시민강좌를 주최한 송범두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시민강좌는 시작되기 전에 동민회 송범두 상임의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송 의장은 통일은 먼저 북측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북이 중국에 붙을 것인지, 러시아에 붙을 것인지, 남측에 붙을 것인지 북측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측도 우리민족끼리라는 큰 틀에서 북측을 바라보고 북측을 아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통일 밑천이 깔린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이 시민강좌는 통일에 기여하고자 마련하는 것으로 이 분야에 인재들이 있으면 강사로 소개시켜 달라”는 말로 인사말을 마쳤다.

글: 서희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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