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기 지방변혁은 당나라 산 선종과 불교신앙결사체, 향도가 주도했다.

 

‘신라가 아닌 사로국은 서기전 어느 시기에 시작했을 것이다’

‘신라가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대답을 회피하겠다’

신라 자연재해역사를 서기6세기부터 파악함으로써

이전 신라역사를 역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 드러내다

 

▲ 서기2017.11.30.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하는 시민강좌가 열렸다. 이날 강사는 가톨릭대학교 채웅석 교수가 맡았다. 채 교수는 이날 신라 망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위 사진에 나오는 문서는 이른바 신라촌락문서인데, 신라인들의 당시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채 교수는 이 촌락문서를 지방세력이 신라말기 경제력을 확보했다는 근거로 삼았다.

답변하면 식민사학이라는 소리를 들을 까봐, ‘모르겠다’, ‘회피하겠다’로 의견일치를 봤나.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한 시민강좌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질문시간을 만들어 놓고 특정질문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답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서기2017.11.30. 강연에서도 벌어졌다. 이날 강연은 가톨릭대학교 인문학부 국사학전공 채웅석 교수가 맡았다. 이 교수도 이날 질문에 답변을 회피하겠다고 당차게 밝혔다. 이유는 답변하면 곤란해지고 해보아야 좋은 꼴은 안날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시민강좌는 강연이 끝나고 객석의 시민방청객들과 질의응답시간을 갖는다. 일방적 강연으로 끝나지 않고 시민과 좀 더 가까이서 소통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날 시민강좌가 마지막이라서 하일식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종강 인사말이 있었다. 이 인사말에서도 이 같은 의지가 묻어났다. 하 회장은 “저희 학회가 종종 이렇게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데 여건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고 그렇더라도 최대한 시민과 더 가깝게 접촉하는 기회를 노력을 통해서 마련을 해보려고 그럽니다.”라고 속내를 밝혔다. 여건이 때로는 허락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민강좌를 개최해서 시민과 소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민과 계속 접촉하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시민강좌에서 질의응답은 시민과 직접 접촉하는 시간이다. 질문응답 시간에 다양한 질문이 터져 나온다. 강사들 입장에서 보면 당황스런 질문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질문 시민강좌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날도 질문한 것을 보면 크게는 이 시민강좌 전체 내용과 관련된 것이고 작게는 당일 강연내용과 연결된다. 이날 질문은 이렇다.

“교수님은 자연재해, 기근을 신라사 전체에 걸쳐 통계를 냈습니다. 신라초기역사의 자연재해, 기근을 인정한다는 것인지요? 그런데 이 시민강좌는 신라건국을 서기4세기경으로 봅니다. 그래서 그 이전 역사는 유령취급, 역사로 다루지 않습니다. 신라역사천년이라고 하나, 5백년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혹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 아닌지요? 신라형성에 낙랑군선진문화가 기여했다고 하는데, 낙랑군 위치는 어디에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이 같은 질문에 이날 채 교수는 답변을 회피하겠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신라 자연재해와 관련해서 신라초기역사를 인정할지, 말지 망설이더니 “이건 곤란한 질문”이라면서 이런 질문이 자주 나온다고 했다.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뒤이어 “이건 질문을 회피하고 싶다”고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여기서 얘기해 봤자 좋은 꼴은 안날 것 같다”고 덧붙였다.

▲ 채웅석 교수가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질문자의 질문에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그 때 마다 "답변을 회피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질문자 포함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채 교수 자신도 우스운지 같이 웃었다.

질문에서는 자연재해, 기근을 채 교수가 신라사 ‘전체에 걸쳐서’ 통계를 냈다고 했다. 채 교수는 이 같은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통계 낸 자료를 다시 띄웠다. 그는 “그래서 이 표에서도 6세기부터 한정해서 봤습니다” 라고 밝혔다. 질문과 달리 자신은 분명히 서기6세기 이후 것을 통계 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라초기 역사를) 부정한다, 안한다는 이 시대 전공이 아니어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없다”며, “이 질문은 회피하는 걸로 하겠으니 양해해 달라”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분명히 채 교수는 본 강연에서 자연재해 통계표를 보여주면서 “신라시기 일어났던 자연재해를 죽 통계 내 본 겁니다.” 라고 밝혔다. ‘신라시기’ 자연재해라는 것이다. 서기 6세기 이후 자연재해 통계를 내면서 ‘신라시기’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이 말은 서기6세기 이전은 신라시기가 아니니 신라역사로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신라초기역사를 믿느냐, 안 믿느냐고 하면서 이에 대답을 회피하겠다고 했지만 그의 강연과 답변에서 이미 대답을 사실상 한 셈이다. 그가 “전 그걸 부정한다, 안한다, 이 시대 전공이 아니어서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없다”고 한 말이 사실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분명히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밝히지 않고 회피하겠다고 한 것이다.

채 교수의 이러한 반응에 더 이상 이 부분은 파고들지 않았다. 대신에 신라가 언제 건국했다고 보는지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기원전 시기를 말들 하죠. 다만 사로국이라는 신라의 전신이 있는데 사로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다만 지금 말씀 하신 것처럼 초기기록을 신빙하면 언제라고 딱 될 수 있죠, 그죠? 그런데 초기기록이 어떤가, 이는 고고학적 증거로써 사로국이 확인되는데 적어도 기원전 시기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저는 인정합니다. 다만 확정해서 말씀드리기는 말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채 교수는 신라대신에 사로국을 언급했다. 채 교수가 언급한 ‘기원전 시기 사로국’은 신라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온 것이 아니다. 중국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의 삼한조에 나오는 명칭이다. 질문은 신라 건국시기가 언제냐는 것인데 채 교수는 사로국 얘기만 했다. 그래서 다시 신라를 환기시키며 신라건국시기를 물었다.

“신라, 신라요, 그러니까 신라, 여기서는 4세기 중반이나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이에 채 교수는 “그것은 고대국가로 갔을 때 내물왕 이후에 고대국가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을 때 그런 얘기를 하거든요”

이에 질문자는 다시, “교수님도 그렇게 보신다는 거죠?” 라고 확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채 교수는 “아...회피하겠습니다” 라고 다시 웃으면서 응수했다. 이 때 질문자와 방청객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채 교수는 이어, “제가 그 부분 주제를 맡았다면 제가 말씀을 막 드리겠습니다마는 쓸데없는 논쟁이 될 것 같아서 이만... ” 이라고 마무리 했다.

▲ 이 시민강좌를 개최한 한국고대사학회 하일식 회장이 종강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하 회장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민강좌를 개설하겠다는 의지를 내 비쳤다.

채 교수가 이날 질문에 대응하면서 한 발언을 보면 그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신라건국시기에 대한 입장을 확고하게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건국시기를 ‘내물왕’ 이라고 한다는 말과 ‘고대국가’라는 표현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그는 “쓸데없는 논쟁이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의견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앞서 ‘사로국’과 ‘고대국가’, 그리고 ‘내물왕’ 시기를 분명히 언급했다. 이러한 말들은 신라사를 다룰 때 기본소양처럼 회자되고 있다. 이 시민강좌에 나온 강사들에게서 확인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 교수는 거의 상식처럼 되어있는 이 같은 주제가 논쟁이 될 것 같아서 답변을 회피한다고 했다. 한편 이날 채 교수는 이 시기 전공이 아니라서 대답을 못하겠다고도 했다. 이날 나눠준 강의요약 인쇄물을 보면 채 교수가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한국역사연구회 회장도 역임한 것으로 나온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대사는 전공이 아니라서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날 질문은 전문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일반상식에 속하는 수준의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채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 회장도 지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한국역사연구를 했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 고대사도 연구했다는 뜻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도 논쟁이 될 것 같아 답변 거부했다. 그래서 채 교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채 교수 앞 회차에서 강연한 한기문 경북대학교 교수도 이 같은 태도를 보여 빈축을 샀다. 그 이전에도 경주대학교 임영애 교수, 경희대 조인성 교수, 강원대학교 김창석 교수 등이 대답을 거부하거나 질문이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 한 바 있다. 같은 질문이 되풀이 되다보니 개최 측에서 강사들에게 어떤 언질을 주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그래서 인다.

이날 종강 인사말을 하고 내려오는 하일식 학회장에게 학회의 공식견해를 확인하고자 질문을 했다. “교수님 한 가지 말씀 좀 여줍겠습니다, 신라초기역사를 연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느 대학교 어디 있는지...”

이에 하일식 교수는 질문을 가로 채며 신경질 반응을 보였다. “그냥 소설 쓰세요. 하지도 않은 말을 막 써 제끼는데, 뭐 하러 물어요.” 라며 무시했다.

그동안 본지에서 하일식 연세대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고대사학회 시민강좌를 보도한 것이 눈에 가시였던 모양이다. 좋게 기사를 써 주었으면 했는데 온통 비판기사로 써대니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한국고대사학회의 식민사관을 보도한 기자가 눈에 가시 같은 기피인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감정이 하 교수에게서 진하게 묻어났다.

▲ 신라 말기에 들어서자 왕조말기증상이 터져나왔다. 지배층의 향략과 타락과 가렴주구로 민중들은 멀어져 갔다.  백성들은 기근과 자연재해로 유리걸식하기도 했다. 또 지방세력의 할거와 반란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어 의지할 곳을 찾았다. 질병이 창궐할 때는 각종 신앙에 의지했다. 처용설화가 그 중 하나라로 채 교수는 증언했다.

한편 이날 채 교수는 ‘지방사회의 동요와 호족의 등장’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역사에서 한 왕조나 나라가 말기에 접어들면 말기증상이 나타난다. 중앙과 지방이 따로 놀면서 지방 통제가 안 되고 민심이 이반되어 정부에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킨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러한 말기현상에 인간의 힘이 아닌 자연현상이 근본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날도 채 교수가 신라멸망으로 가는 말기증상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자연재해와 기근이다. 이는 우리나라 왕조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환기시켰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 일정기간 나타난 자연재해를 통계 낸 자료까지 보여주면서 일반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중국 측 자료까지 가져다가 왕조말기증상으로써 자연재해나 기근은 동아시아에서 공통사항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수확이 줄어들었고 그럼에도 조세를 부담하는 농민들이 가장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조세를 피하고자 고향을 버리고 떠돌게 되고 초적이 되고 반란 세력으로 변해 갔다고 주장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고통을 더는데 불교 등 종교 힘을 빌고자 했다고 평가했다. 이때는 당나라에서 들어온 불교 선종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았다.

또 중앙정부의 수탈이 심해져 지방간의 양극화가 깊어짐에 따라 지방통제가 불가능해 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지방의 독립화가 진행된 것이다. 자립해서 자체 힘이 커져 감에 따라 호족이 성장하고 이들이 각기 지역을 통치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경제력과 무력까지 갖추어 중앙에서는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에 납부하던 세금도 거부해나갔다고 했다. 이를 통해서 지방경제력이 성장하고 이는 지방문화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당나라산 선종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당나라 유학생들도 한몫했다고 덧붙였다. 대표인물이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하고 당나라에서 벼슬하고 돌아온 고운 최치원이라고 소개했다. 유교정치사상이 신라말기에 불교 선종과 더불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채 교수는 지방 세력이 커져 가는 과정을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촌락문서자료를 근거로 예를 들었다. 당시 특기할 만한 일은 향도香徒라는 불교신앙결사체의 활동이다. 채 교수는 신라말기 사회변혁의 주된 세력으로 이 향도를 들었다. 이들이 각종 재해와 기근에 시달리는 당시 신라민중들을 종교에 의지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사회불안시기에 흔히 유행하는 말세론의 일종인 미륵불신앙이 유행했다고 밝혔다.

▲ 채 교수는 이날 신라말기 증상가운데 하나로 자연재해와 기근을 손 꼽았다. 문제는 서기6세기 이후 것만 계산했다는 점이다. 이는 서기6세기 이전은 역사로 보지 않는다는 조선총독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이날 강연은 마지막 강좌였다. 그래서 주최 측에서는 떡과 음료로 간식을 나눠주었다. 또한 신라천년역사문화를 담은 ‘시디’를 강연 끝나고 돌아갈 때 배포했다. 또 한 번도 시민강좌를 빠지지 않은 방청객에게는 신라천년역사문화 책 30권을 보내주겠다며 개근자의 주소를 받았다.

지난 서기 2017.09.05.부터 시작한 3개월간의 시민강좌는 동국대학교 이승호, 연세대학교 장병진 간사가 실무를 맡아 수고했다.

한편 이날도 지난번 강연을 비판한 인쇄물을 나눠주었다. 이날 강연을 끝으로 시민강좌가 마무리되어서 인지 방청객들의 반응이 다양했다. “오랫동안 수고하셨다”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방청객은 비평문을 가리키면서 “이제 언제 이런 명필을 볼 수 있을까요”라면서 깊은 아쉬움을 표했다. 또 어떤 분은 이날 강연 비평문은 어디서 볼 수 있느냐 역시 서운해 했다. 그래서 “비평문 아래에 전자우편 주소가 있으니 거기로 연락주시면 마지막 강연 비평문도 써서 보내드리겠다.”고 위로했다. 또 연세가 지긋한 분은 이 비평문을 나눠주는 측에서는 “언제 이런 시민강좌를 하느냐”며 혹시 있으면 알려 달라면서 명함을 주었다.

이번에도 지난번에 질문한 방청객이 또 질문했다. “이 시민강좌를 개최한 세력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하는 이유가 뭐냐”면서 의혹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래야 고대사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를 설치할 수 있기 때문” 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비평문을 나눠주면서 수많은 방청객과 정이 들었다. 마치 이웃과 같은 친근함이 넘친다. 이 방청객 시민들을 이제는 바른 역사를 밝히는 민족사학계 시민강좌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또 이 시민강좌를 주도한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이 우리나라 역사학을 책임 지고 있는 세력이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단재 신채호 선생과 같은 주인사관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서울과 김해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동시에 진행한 시민강좌 비평문에서 수없이 밝힌 것이 증거자료다. 주인사관에서 증명 한 자료가 조선총독부사관이 제시한 증거를 질과 양면에서 압도한다.

역사는 반드시 주관을 피해갈 수 없다. 역사는 그래서 선택과 믿음 문제다. 그렇다면 순수역사학 측면에서도 주인사관으로 방향전환 하는 것이 옳다. 한국고대사학회가 과감하게 총대를 메고 총회라도 개최해서 주인사관 채택을 공론화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민족사학계와 힘을 합쳐 중국 동북공정과 일본의 재침략을 분쇄할 수 있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중화패권주의사관, 일본 황국사관에 따라 학문이기 전에 우리에게 죽느냐, 사느냐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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