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4세기 중반까지 신라는 아직 건국되지 않았고, 진한 사로국이었다'

 

‘삼국초기역사는 삼한체제로써 신라는 진한 속의 사로국에 지나지 않았다’

‘아까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했듯이, 삼국사기 초기기록도 사료 비판해야 한다'

‘그 결과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문제가 많다’

‘삼국초기는 원삼국시대로써, 신라는 4세기 중반까지 진한체제 속에 있었다’

 

▲ 서기2017.11.23.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 시민강좌에서 강원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김창석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이날 김 교수는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곡옥달린 목걸이를 외국산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서기2017.09.05.부터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리는 ‘신라천년역사와문화’ 시민강좌가 계속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시민강좌를 맡은 한국고대사학회의 역사관이 그 중심에 있다. 이 시민강좌에는 이 학회소속 교수 및 국사편찬위원회 및 국립중앙박물관, 기타 기관 인사들이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하나같이 신라가 통상 서기4세기 이후에 건국했다고 주장한다. 그 이전의 신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이나, 식민지 수탈요원을 길러내던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에서 복무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하는 소리와 같다. 서기4세기 이전에는 신라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믿기 힘들지만 이 같은 주장은 사실이다.

실제로 이 단체는 시민강좌를 하면서 주제를 ‘신라천년역사와문화’라고 정해놓고서는 서기 5세기 이후만 강연하고 있다. 이전 역사는 유령취급하고 있다.  총 22회 중 서기2017.11.23.까지 20회를 마쳤다. 그런데 서기5세기 이전을 다룬 것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기껏해야 신라 내물왕이나, 진흥왕부터 다루었다. 소위 신라지역에서 나왔다는 고고유물도 이 시민강좌에서 제시한 연대를 보면 서기5세기 이전으로 절대로 올라가지 않는다. 신라 역사 초기 3백년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우연 일치인지 조선총독부 관학자, 쓰다소키치가 완성한 것으로 나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같다.

서기2017.11.23. 시민강좌에서도 어김없이 이런 시각이 깔려 있었다. 이날 강좌는 강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김창석 교수가 맡았다. 김 교수는 이날 ‘신라와 서아시아의 만남’으로 강연했다. 이날 그의 입에서는 원삼국시대, 신라사로국 출발설, 서기4세기 중반 신라건국설, 그 이전에는 진한속국이었다는 설 등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질의응답시간에 “이 강좌는 어째서 서기5세기 이전은 다루지 않는가, 혹시 신라역사로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질문했는데 그는 없는 것 취급했다.

그래서 강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직접 물었다. 이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위와 같은 설들을 거침없이 쏟아낸 것이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시민강좌는 왜 서기5세기 이전 신라역사는 다루지 않는 것인가, 혹시 역사로 보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라고 다시 물었다. 이에 김 교수는 “아까 다른 부분에서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도 옥석을 가리는 사료비판을 해서 본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문제가 많다.” 라고 운을 뗐다. 이어 “삼국 초기는 원삼국시대로 보는데 신라는 진한시대 아닌가, 사로국이 그 속에 있었다”며 “신라는 사로국에서 나왔고, 서기4세기 중반에 고대국가가 되었다는 일반적 견해다.”라고 소신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서기4세기 중반 이전은 신라역사가 아니고 진한역사다.”라고 덧붙였다.

▲ 김창석 교수는 이날 신라가 서기 4세기 중반에 건국되었다고 해서, 이전 3백년 신라역사를 부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에 “그런데 이 시민강좌에서 강사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총독부 일제식민사학자들이 하는 소리와 똑 같았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고 응수했다. 김 교수는 여태까지 다른 강사들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한 독특한 견해를 내놨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식민사학자들이 아니다. 그 중에는 진짜 학문을 한 학자들도 있다. (이 시민강좌에서 그런 사람들과 같은 소리를 했다면) 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식민사학을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라고 반격했다. 이에 따르면 김 교수와 같은 학자들은 일제시기 일본인 학자들이 내놓은 연구 성과를 학문자세로 탐구하고 연구해보니 수용해도 될 만큼 수준이 높다. 그래서 일제식민사관을 떠나서 학문차원에서 설득력 있는 학설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김 교수는 돌아가야 할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의외로 질문에 적극 답변했다.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상세하게 답변을 이어 갔다. 그래서 중간에 ‘감사하다’는 말로 끊었다. 김 교수가 강원대학교에서 온 것으로 보여 밤에 먼 거리를 가야하는 입장이라 더 시간을 뺏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김 교수는 신라인과 서역인간의 교류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신라인과 서아시아인과의 접촉 시점을 서기5세기 후로 상정했다. 그 시점을 서기10세기를 기준으로 풀어나갔다. 강좌가 끝물로 치달으면서 신라도 말기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신라가 서역과 접촉한 근거로 신라지역에서 나왔다는 몇 가지 유물과 중국 당나라시기 기록을 들었다. 그 후의 기록은 주로 고려사에 나오는 대식국大食國을 참고하여 고려도 서역인 들과 교류했으니 신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신라왕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이색적인 유물을 모두 외국산으로 몰아갔다. 계림로14호 분에서 나왔다는 이른바 황금보검, 유리잔, 구슬목걸이 등 예외 없이 원산지를 중동지역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찾았다. 이 같은 시각은 이 분야 학계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로마나,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나온 물건과 비슷한 것이 신라지역에서 나오면 모두 그곳에서 왔다고 본다.

▲ 김 교수는 '호선무胡旋舞'를 중앙아시아 고대 민족, 소고드인의 춤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신당서> 등에 분명히 고구려인의 춤이라고 하는 기록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날 김 교수가 제시한 구슬 목걸이를 보면 우리나라 고유 제품이라고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곡옥이 있다. 충청, 전라, 경상도를 아울러 골고루 출토된다. 이 곡옥이 김 교수가 외국산이라고 내놓은 구슬목걸이에 달려 있다. 김 교수는 곡옥 위에 붙은 구슬을 보고 중동 지역 산이라고 했다. 거기에 새겨진 인물이 서양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다. 그러나 같은 모양의 청색구슬도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거기에는 흰 얼굴을 한 인물이 새겨져 있다. 서역인에 가깝다. 그런데 구슬 원석은 인도네시아 일대에서 왔다고 한다. 이 구슬은 김 교수 견해를 따라도 도저히 서역 산이라고 볼 수 없다. 곡옥목걸이는 더구나 김 교수에 따르면 미추 왕릉에서 나왔다. 왕이 죽으면서 자체 제작한 목걸이를 묻은 것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개 상인이나 사신이 가져온 것을 묻었다는 것인데 이는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황금보검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산이라는 주장했고 이에 다른 가능성 있다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중앙아시아 산이 확실하다고 일갈했다. 거기에 박힌 보석이 한국에서는 나지 않고 그 지역에서 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문양을 보면 우리고유 문양이라고 알려진 삼태극 문양이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새겨져 있다. 또한 금장식도 누금기법이 사용되어 신라의 금관제작기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로만글라스’라고 하는 화려한 유리잔들도 김 교수는 동로마산으로 보았다. 그 쪽 지역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유리생산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서기전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남 보령 청라리에서 발굴된 산화납 유리구슬이다. 이어 유리생산이 전라도를 비롯하여 북한 지역까지 확인된다. 더구나 당시 중국 것과 비교해도 우리 것이 더 독특하고 우수하다는 평가가 내려져 있다. 그래서 인지 유리구슬 형식의 목걸이가 경남지방만 하더라도 무더기로 차고 넘치게 나온다. 이런 기술이 집약되어 소위 ‘로만글라스’와 같은 유리잔 제작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이 유리잔은 적석목곽분에서 나왔다고 한다. 적석목곽분은 북방유목민족이라고 알려진 흉노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로마 산이라는 유리잔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편 이날 김 교수는 이색적인 유물들이 모두 그쪽에서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이 신라에 와서 남겨놓은 것들이라고 보았다. 신라가 그 쪽으로 간 역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서역의 페르시아나, 아라비아 세력의 활동 폭이 넓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신라는 이에 훨씬 폭이 못 미쳤다고 강조했다. 또 김 교수는 서역에서 온 사람들이 주로 당시 중국을 거쳐서 온 것으로 파악했다. 바다를 통해서 왔을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 김 교수는 이른바 '황금보검'을 카자흐스탄 산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날 김 교수는 우리나라 현재 국경선을 말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압록강 두만강선의 국경선은 조선 초기에 완성된 것” 이라고 했다. 시야를 넓혀야 한다면서 나온 주장이다. 그전 고려왕조는 이 보다 못 미쳤다는 전제를 깐 시각이다. 이 같은 주장도 조선총독부가 정해준 사관을 따른 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이날도 지난번 강연을 비평한 인쇄물을 방청객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이 날은 지난번에 질문한 방청객이 더 자세한 질문을 해 왔다. 이 시민강좌를 열고 있는 단체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하는 이유가 뭐냐”라고 하여 식민사학의 정곡을 찔렀다. 그러면서 “삼국초기 역사를 믿지 않는다면, 수백 년이 역사공백으로 남는 것 아니냐”며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이었다. 이 부분을 집중 탐구하고 있었는데도 이 같은 질문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잠시 후 나름 대답을 해 주었다. “그 수백 년의 역사공백을 저들은 북에는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으로 채우고 있고, 남쪽은 촌락사회로 우글거린다는 삼한시대로 채우고 있다.”라고 엉성하게 남아 밝혀 주었다. 다음 강연은 한기문 경북대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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