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역사기록은 신라가 조작한 것이다

 

‘역사자료는 주관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의심해야 한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북한 삐라와 같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신라건국년대는 신라가 삼국통일한 후 조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서기2017.11.14.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시민강좌에서 윤선태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가 강연하고 있다. 시민강좌가 종반으로 치달을 수록 방청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삼국초기역사를 부정하는 발언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올해 9월부터 한성백제박물관과 국립김해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열고 있는 시민강좌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초기역사에 해당하는 약 3백여 년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고 있다. 모두 조작된 것이라며 우리역사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실상 삼국 역사 3백여 년이 공중 분해된 셈이다.

그런데 이 3백년 역사가 이후에 전개되는 역사보다 광대하고 역동성으로 가득하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경우 모본태왕 때인 서기49년에 중국 산서성 태원까지 쳐들어가서 휘젓고 다닌다. 당시 동아시아 대제국이라던 한나라 심장부를 정벌한 것이다. 또 태조태왕 때인 서기55년에는 요서지방에 성 10개를 쌓아 고구려 땅으로 굳혀버린다. 이런 역사는 오히려 땅 따먹기 태왕으로 알려져 있는 광개토태왕 정복전쟁 보다 더 역동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역사는 배우지 못했다. 학교 국사시간에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유는 삼국초기 역사기록을 가짜로 보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일까. 이 시민강좌를 개최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 같이 우리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집단들 때문이다.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에서는 고려 국경선 바른 복원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놓은 <조선사> 번역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부류로 보이는 한국중세사학회라는 곳에서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가 고려 강역을 정상대로 복원 시켜놓은 것이 잘못된 것이라며 맹비난 했다. 여기에 박근혜 정권의 이른바 ‘불순한 혜택’을 받은 돈이 투입되었다는 것이 이유다. 이 집단은 ‘황당무계’하다는 표현까지 쓰며 바른 역사 복원사업을 중단하라고 핏대를 세웠다. 정부가 적폐청산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적폐중의 하나니 당장 돈줄을 끊어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세사학회가 주장하는 고려국경선은 신의주와 원산만 선인데 이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이번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밝혀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범죄를 감추려는 단발마적인 발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야 말로 우리정신을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파괴시키는 주범이라, 적폐 중의 적폐다.

이들은 삼국초기역사 3백년이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 삼국초기역사를 역사로 취급하지 않는 다. 이 역사범죄행위는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준 이른바 <삼국사기>초기기록 불신론에서 나왔다. 이는 자주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에 속할 정도로 다 아는 사실이다. 일제식민사학자 누가 삼국초기역사가 조작되었다고 하는지 모두 꿰뚫고 있다. 이 짓을 한 자가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인데 이제는 동네 철수이름 같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저들은 자신들이 쓰다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발뺌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지난 서기2017.11.09. 시민강좌16강을 맡은 주보돈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에게서 나왔다. 이어 이번 서기2017.11.14. 시민강좌17강을 맡은 윤선태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도 반복했다. 표현만 달랐지 같은 말의 되풀이였다.

▲ 서기2017.11.14.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윤선태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가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이날 윤 교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윤 교수는 질문시간에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빌려 삼국사기 초기역사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유를 장황하게 밝히는 가운데 내세운 ‘북한 삐라론’이 주목을 끌었다. 질문자는 윤 교수가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질문했다. “윤 교수는 신라말기 김헌창의 난이 일어난 때에 자연재해가 일어났다고 하면서 이를 역사사실로 믿고 있다. 삼국초기에도 자연재해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신라말기 자연재해는 역사로 보면서 어째서 삼국역사 초기에 나오는 자연재해는 믿지 않는가. 이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이 아닌가. 신라후기 자연재해는 역사로 믿고 초기는 안 믿는다는 것인데 이는 일관성 측면에서도 타당하지 않다.”라고 따졌다.

이에 윤 교수는 “김헌창 반란시기 자연재해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기록 믿는가.” 라는 질문자의 질문을 읽어 준 다음, “그렇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인정했다. 이어 “질문 속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으면 당신은 식민사학자다’라는 느낌이 들어가 있다. 역사학은 자료를 가지고 한다. 모든 자료가 그렇다. 굉장히 주관적이다.” 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북한 삐라에 비유하여 삼국사기 초기역사를 사실로 믿지 않는다고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북한에서 삐라가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도 역사자료다. 그 삐라는 거짓말투성이 인경우가 많다. 남한을 비방하고 남한 정치구조를 엉터리라고 한다. 중앙권력자라든가 개인 치부를 드러낸다.”라고 하며 삐라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 초기역사도 이와 같기 때문에 믿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면서 “물론 맞는 것도 있겠으나 모든 기록은 의심을 갖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역사학자의 첫출발이다. 역사학자가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역사학자라고 할 수 없다. 자료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의심을 해야 한다. 그럼 어떤 부분을 믿고 어떤 부분은 믿지 않느냐, 이 판단들은 사실은 어렵고 고도의 훈련들이 필요한 사업이다.” 라며 이 시민강좌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사료비판론을 들고 나왔다.

▲ 현재 일본 동대사에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신라산 문헌자료다. 여기에는 신라가 교역한 물건 목록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윤 교수가 말하는 사료비판론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 기준이다. 특히 일본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그 기준에 맞으면 역사고, 안 맞으면 그 사료가 정사이든 야사이든 믿을 수 없는 비역사가 된다.

윤 교수는 신라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 예를 들었다. 앞서 강연에 나선 강사들은 신라 왕 중에 아버지와 아들이 100세 이상 차이난다는 기사를 들어 신라역사 초기기록을 불신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 윤 교수는 박혁거세조항에 나오는 혁거세 즉위년을 들고 나왔다.

그는 “예를 들어 삼국사기 박혁거세라는 사람이 서기전 59년에 신라 초대 왕으로 되어 있다. 이를 서기전 59년에 박혁거세라는 사람이 국가를 만들었다고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저 같은 경우에는 삼국사기에 신라인들이 서기전 59년에 박혁거세라는 인물이 초대 왕이 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오늘날 (신라가 서기전59년에 세워졌다고)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라고 하며 신라가 서기전59년에 개국했다는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와 같은 강단주류사학계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뜻밖에도 이 기록을 신라인들이 썼는데 조작했다는 논리를 펼쳤다. 신라인들이 조작해서 썼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게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예를 들면 혁거세가 딱 60년을 한다. 60갑자다. 고구려가 서기전 37년이다. 삼국을 통일한 다음에 실제로 신라건국연대를 60년 더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선 나라다. 그런데 신라가 통일을 했는데 신라가 고구려보다 나중에 세워졌다고 하면 신라왕들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이렇게 역사기록을 조작한다. 조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작된 부분을 하나하나 다 나누어서 설명해 나가는 작업들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하며 신라인에 의한 신라삼국초기역사 조작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추적해 보면 어김없이 일제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가 닿는다. 이 같은 주장은 이미 서기1913. 일제식민사학자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가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津田左右吉, ‘朝鮮史地理’ 남만주철도주식회사, 1913). 쓰다는 이와 같이 60갑자 운운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삼국사기 상대 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것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이는 동방 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한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이 신라본기를 다시 써서 알려주겠다고 한다. “여기에 신라본기에 관한 그 대요를 적어서 독자가 참고할 수 있게 제공하려고 한다.” 참고로 이날 윤 교수는 신라 혁거세 즉위 년대를 인용하면서 서기전 ‘59’년이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조항에는 서기전57년에 즉위했다고 나온다.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

▲ 윤 교수는 이날 새로운 자료를 선보였다. 신라가 제작한 것이라며 양탄자를 보여 주었다. 신라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고 했다.

한편 이날 윤 교수는 ‘김헌창, 장보고의 야망과 좌절’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자연재해가 많았다면서 이것도 반란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전의 반란은 왕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김헌창의 반란은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김헌창의 반란은 왕위 쟁탈전이라기보다는 신라 사회 체제를 뒤엎으려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장보고 일생을 그려나갔다. 장보고는 해상세력이었는데 당시 중국 당나라에 가면서 출세를 했다고 보았다. 당시 당나라에는 무녕군이라는 세력이 있었는데 이를 도와서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했다. 특히 당시 산동성 지역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 왕국 후예들을 토벌하는데 참가한 사실에 주목했다. 이정기는 한때 이 지역을 장악하고 독립 국가를 선포했던 고구려 유민이다. 윤 교수는 장보고가 이 지역 세력을 진압하면서 국제정치 감각을 터득했다고 했다. 그러나 신라 왕족과 결혼을 하려고 할 만큼 힘이 비대해지고 욕심이 지나쳐서 중앙에서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김헌창과 장보고가 활동했던 시기를 신라가 몰락으로 가는 때라고 주장했다.

이날도 비평문을 나눠주었다. 연세 지긋한 한 방청객은 3장을 달라고 하며, 그동안 들은 강연과 비평문을 본 느낀 점을 말해 주었다. 비평문에서는 그동안 몰랐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면서 고마워했다. 또 시민강좌와 비교된다고 덧붙였다. 어떤 방청객은 두 손을 붙잡고 “수고하십니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또 늘 그렇듯이 모자를 쓴 분은 웃으면서 거수경례로 인사를 했다. 다음 강좌는 경희대학교 조인성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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