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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삼 교수, ‘신라, 서기4세기 중앙집권국가되었다’한국고대사학회, 우리 고유 사상과 종교는 없는가
오종홍 기자 | 승인 2017.11.08 03:54

정병삼 교수,

신라 종교와 사상도 서기7세기 중반 만 다루다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기다

그것도 우리 것이 아닌 불교사상을 조명하다

그에게 우리 고유 사상과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가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가 시민강좌에서 신라불교를 주제로 다루었다. 위 사진은 원효를 그린 영정이다. 서기14세기에 그린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내에 없고,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하는 시민강좌가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계속되고 있다. 지난 서기2017.09.05. 시작한 이래 벌써 15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서기2017.11.07.에는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정병삼 교수가 맡았다. 제목은 ‘원효와 의상-같은 목표 다른 길’이다. 정 교수는 신라불교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삼국통일 전쟁 결과로 보았다. 정 교수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뒤에 신라왕실에서는 사회구조 재편성을 시도했다. 자세한 원인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늘어난 인구, 넓어진 영토, 대중들의 의식변화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 교수는 삼국 통합 후 신라를 이끌어갈 정치이념을 유교가 맡았다고 했다. 불교는 정권을 직접 담당하지 않았으나 지배종교로써 삼국불교를 통합하고 새로운 사상체계를 만들어갔다고 했다. 동시에 민간신앙으로써도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불교는 신라사회를 관통하는 사상체계를 세우고 일반대중들에게 신앙으로 자리잡아간다. 이것이 하대신라 불교의 두 가지 큰 흐름이라고 했다. 그는 사상측면에서 유식사상과 기신론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신앙과 실천 측면에서는 밀교, 미타, 관음 등의 정토신앙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이 시기 불교사상을 가장 먼저 이끈 인물을 원측圓測으로 보았다. 원측은 유식사상을 주장했다. 세상만물은 그 자체 보다는 사람 마음의 인식작용에 달려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그래서 집착을 제거하고 중도에 이르는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고도로 관념화된 사상을 일반대중들은 알 턱이 없다. 그래서 다른 방편을 강구했는데 여기에는 미타신앙과 관음신앙 지장신앙 등이다. 모두 바탕에는 기복신앙성격을 띄고 있다. 미타신앙은 이른바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하게 염송하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로 가서 태어난다는 신앙이다. 내세신앙이다. 관음신앙은 개인의 현세이익을 구하는 신앙이다. 이에 국가 평안을 비는 요소가 덧붙여져 있다. 지장신앙은 석가가 입멸한 뒤에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죽은 자를 구제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나중에 지방서민들에게 깊숙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약사신앙도 있는데 주술을 통하여 병을 치료하는 신앙이다. 당시 질병과 기근이 유행했는데 이에서 벗어나려는 백성들이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 서기2017.11.07.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정병상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정 교수는 우리 고유사상체계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날 강연을 외래 불교로 잡아 빈축을 샀다.

7세기 중반에 이러한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나타난다. 원효와 의상이다. 원효는 6두품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나 10대 중반에 이미 승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정규불교교단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일정한 거쳐 없이 떠도는 도인들과 어울렸다. 그러는 가운데 그가 깨달음을 얻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의상과 서기661년에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던 길에 비바람이 불어 길가 흙구덩이에 몸을 피했다. 여기서 잘 알려진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는 일이 일어난다. 한밤중이라 그냥 물 인줄 알고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것을 알았다. 원효는 이때 마음 작용을 깨닫는다. 그가 남긴 당시 심정이 <송고승전>에 전해온다. 정 교수는 이 구절을 소개했는데 다음과 같다.

“전날 밤에는 흙구덩이라 생각하고 편안했는데 오늘 밤에는 귀신집이라 생각하니 탈이 많구나. 그러니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구덩이와 무덤이 아님을 알겠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뿐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이후 원효는 승복을 벗고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대중교화에 나선다. 또한 요석공주와 결혼해서 설총을 낳는다. 불교핵심을 알기 쉽게 대중들에게 전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남긴 대표저서는 <대승기신론> <십문화쟁론>이다. 원효 핵심사상은 일심一心사상이다. 서로 다투는 일이라도 일심에서는 둘이 아닌 같은 하나라는 사상이다. 이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책으로도 쓰인다. 화쟁론이 그래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은 서로 상반되는 데 일심에서는 다르지 않다. 하나다. 영원한 것과 삶과 죽음은 언 듯 보면 다른 것 같으나 일심에서는 같다고 한다.

한편 의상은 원효와 같이 당나라로 구법유학을 떠난 인물이다.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수행승의 면모를 보인다. 무소유에 가까운 최소한 소유를 고집했다. 또 현실생활 속으로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는 활동을 했으나 원효에게는 못 미쳤다. 그는 불교사상과 교학에 집중한 인물로 평가된다. 또 화엄종을 이끌었는데 평등과 조화를 강조했다. 그래서 종단 수행자들 중에는 밑바닥 계층민들이 많았다. 당시 신라사회가 골품제로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했지만 의상의 화엄종단에서는 신분제약을 뛰어넘어 평등함을 지향했다.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많은 저술을 하지 않았다. 짧은 게송을 남겼다. 또 원효와는 달리 의상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또 부석사를 세웠고 그 제자들도 수많은 사찰을 세웠다.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등이 의상의 후예들이 세운 절이다.

▲ 원효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일심一心사상이다.

정 교수는 이날 원효와 의상의 사상과 활동을 집중 조명했다. 그러면서 이들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사례로써 지금 기독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실정을 지적했다. 현재 기독교회 상황은 중세 마틴루터의 종교개혁 직전의 타락한 기독교계와 같다고 했다. 개혁 주체에서 개혁대상이 되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현실에 원효와 의상이 내놓은 해법을 적용하면 개혁할 수 있다고 점쳤다.

이날 질의응답 시간에 정 교수는 따가운 질문을 받았다. “당시 신라에서 불교나 유교와 같은 외래 종교와 사상만 있었느냐”는 지적이었다. 또 “우리 고유사상과 종교로 시민강좌 주제를 잡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정 교수는 “정신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며 따가운 지적을 받아 들였다. 그러면서 “왜 우리 고유사상인 풍류사상은 얘기를 않느냐”는 질문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나 질문자의 의도를 애써 모른 척하기도 했다. 그는 “강연 주제가 풍류까지 포함해서 신라 전체를 담은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신라불교, 특히 원효와 의상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풍류사상이 빠졌다”고 변명했다. 그러면서 원효와 의상을 다루게 된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중국을 그렇게 좋아했다는 유학자 최치원도 유교, 불교, 도교에 도통했다고 한다. 여기서 도는 우리 풍류를 말한다. 최치원은 유. 불. 선 3교가 따로 따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근본은 우리 풍류라고 할 만큼 강조했다. 아마 이걸 그대로 따라서 한다면 원효와 의상이라고 하더라도 이 부분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며 풍류도를 정 교수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어 그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이야기 하는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 아니고, 우리다운 불교를 했다는 자체가 새로운 모색이고 완연한 신라다운 모습” 라며 외래 종교, 사상을 능동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밝혔다. 그러면서 풍류도라는 우리고유 사상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

“다만 그러면 왜 풍류에 토대를 두지 않았느냐, 비유가 적절치 않으나 정신세계가 아닌 물질세계를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기구라든가 이런 것만 가지고 천년만년 이어 갈수는 없다. 새로운 게 들어오면 받아들여서 거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을 우리에게 맞게 만들어야 한다. 또 그것은 그대로 수입한 것이 아니고,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기본 바탕이 되는 우리의 흐름이 있다. 거기에 외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든 불교든 접목해서 가져가는 것이 우리의 생각, 사유체계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음을 촉발시킨 무덤 속 하루밤을 지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날 정 교수는 “신라가 언제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서기4세기 무렵이라고 대답했다. 이 같은 주장은 이 시민강좌 첫 강좌부터 붉어진 문제다. 시민강좌에 참여하는 강사들이 거의 신라 건국시기를 서기 4세기 이후로 본다. 이는 이미 수없이 지적되었듯이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이다. 이날 정 교수도 이 주장을 되풀이 했다. 몸에서 묻어나듯이 자연스럽게 주장했다. 한국고대사학회 같은 단체에서는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자로서 당대 최고 지식인이자 지성을 자랑하는 고운 최치원도 우리에게 현묘한 도로써, 풍류風流가 있다고 했고 유. 불. 선 삼교를 다 포함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날 정교수가 택한 강의 주제는 외래 종교사상이다. 국사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외래 종교사상만 언급함으로써 국민들이 우리고유종교사상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이는 국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책임자들의 심각한 역사직무유기라고 할 것이다.

이날도 비평문을 나눠주었다. ‘감사한다’, ‘수고한다’, ‘지난번 비평문도 달라’ 등 이전 과 같은 반응들을 보였다. 한 방청객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별도로 개최하는 강좌를 소개해 주었다. 그러면서 방청할 것을 권했다. 시간이 되지 않아 어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강연 자료를 복사해서 갖다 주겠다고 했다. 다음 강좌는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가 맡는다.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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