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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고학회, 강단식민사학계와 결별하나, '왕검성 평양이 아니다'‘우리 고고학은 물건이 먼저다. 문헌기록은 어디까지나 다음이다’
오종홍 기자 | 승인 2017.11.05 10:32

 

영남대학교 정인성 교수,

고고유물로 보면 위만조선 왕검성은 기존 문헌사학의 통설과 달리, 평양이 아니다

고고유물은 고조선이 훨씬 오랜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하는데

문헌사학으로 가기만 하면 서기전 7,8세기로 추락한다

 

▲ 서기2017.11.03.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제41전국고고학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수백석의 좌석이 모두 찰 만큼 관심이 높았다.

우리 고대역사에서 가장 큰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이른바 위만조선의 서울이라는 왕검성 위치다. 또 하나는 위만조선을 중국 한나라가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 그중에서 낙랑군 위치다. 민족사학계와 강단식민사학계(식민사학계)가 이를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민족사학계는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하고 식민사학계는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 대일항쟁기에도 일제와 이를 두고 싸웠다. 독립투사들은 왕검성, 낙랑군이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했고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은 북한 평양설을 고집했다. 독립투사들에게 바른역사정립은 일제에게 정신을 뺏기지 않으려는 또 다른 독립전쟁이었다.

현재 식민사학계 특히 한국고대사학회에서는 조선총독부사관에 따라 왕검성과 낙랑군을 북한 평양일대라고 한다. 이것은 해방 후 72년 동안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불변하는 통설이다. 이를 전제하고 고대사를 다루고 있다. 식민사학계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나라 고고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식민사학계와 함께 식민고고학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고대에 일본 야마토 정권이 우리나라 남부를 식민 지배했다고 주장한 일제식민사학자, 쓰에마스야스카즈(末松保和)라는 인물이 있다. 이 사람을 고고학자 김원룡이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에 초청하여 모신 일화가 있다. 김원룡은 ‘원삼국시대’ 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식민사학과 한 몸이라는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우리나라 고고학을 대표하는 한국고고학계가 이 김원룡 학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식민사학의 아류 또는 종속된 행태를 보여 왔다. 식민사학을 물건으로 받쳐주는 학문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식민고고학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학계가 최근 식민사학 통설에서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식민사학의 종속학문이라는 누명을 벗고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한국고고학회가 서기2017.11.03.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제41전국고고학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 제목은 ‘고고학으로 본 고조선’이었다.

본 대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신 대학교 이남규 한국고고학회장이 개회사를 했다. 이 학회장은 ‘고조선을 사학으로 다루는 것이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또한 ‘사학적으로 연구하기가 어려워 논란이 많다’고 털어놨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조선총독부 역사관으로 얼마나 강고하게 고여 있는지 일단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이 학회장은 ‘ 다행히 고고유물이 있어 그나마 고조선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며 고고학 대회를 갖게 된 소회를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강단식민사학계와 결별하겠다는 의지로 읽혀진다.

한편 주제발표에서는 고고학계가 고조선을 고고학 관점에서 다루고 싶어도 강단식민사학계의 눈치를 보느라 그동안 다루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발언도 나왔다. 고조선은 역사학에서만 다루어야지 고고학에서 다루지 말라는 무언의 금기사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영남대학교 정인성 교수가 발표에 앞서 이 같은 사정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정 교수는 “오랫동안 고고학회에서 고조선 문제를 다루기를 꿈꿔왔다. 그리고 가능하면 처음 무대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오늘 이렇게 열리게 돼서 감격스럽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조선을 정면으로 다루는 대회가 열리게 되어 정말 감격스럽다.” 라고 주제발표에 나서는 심정을 드러냈다. 정 교수의 이 같은 발언도 그동안 식민사학계의 하위학문으로써 받은 서러움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어 주제발표가 시작되었고 식민사학계와 다른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 모임 핵심관계자들 스스로 말했듯이 ‘충격’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왕검성 위치가 평양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와 난공불락이라고 하는 통설과 정면충돌하는 양상을 보였다. 영남대학교 정인성 교수가 주인공이다. 만약에 왕검성이 통설과 같이 북한 평양이 아닌 것이 드러나면 지금까지 이를 전제로 쌓아온 강단고대사학은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석사, 박사 학위논문들이 모두 거짓이 된다.

▲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정인성 교수가 토론회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정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위만조선 왕검성은 평양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쇄기를 박았다. 요동이서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날 정 교수는 통설처럼 위만조선 수도, 왕검성이 평양일대라면 이 지역에서 위만조선 흔적이 나와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위만조선이 멸망했다는 서기전 108년 이전에 해당하는 유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해당하는 어떤 유물과 유적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교수는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내놓은 평양지역 고고유물을 아무리 뒤져도 위만조선시기를 말해주는 유물, 유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왕검성이 평양성임을 증명하려고 일부러 세형동검과 같은 유물 시기를 올려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어떤 것도 평양이 위만조선 왕검성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 철도를 깔려고 주변을 파면서 무덤도 나왔는데 모두 서기4세기 경 것이라고 했다. 이외에 병기창을 개발하면서 나온 유적과 유물도 모두 서기전 3세기경 왕검성 시기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시기를 보면 후한시대 것이거나 고구려 이전 시기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기반토지 까지 파내 보아도 없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유물이 묻힐 만한 가장 깊은 지대까지 파헤쳤는데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평양성 칠성문, 보통문 등 보수공사하려고 기초까지 파내려가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거듭 지적했다.

더구나 왕검성이라고 추정되던 만수대 일대 지하 암반까지 파내려 갔는데도 고구려 이전으로 소급하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위만조선 시기 화폐인 반량전은 안 나오고 상관없는 오수전만 260여개가 나왔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이러한 발굴이 모두 일제 강점기때 세키노타다시(關野貞) 같은 조선총독부 관학자들이 한 것이라고 했다. 식민사학을 뒷받침 하고자 고고유물 확보에 열을 올리던 일제 학자들이 혈안이 되어 뒤졌는데도 위만조선 왕검성 관련 유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 토성 한두 개나 나오나 그것도 아니라고 밝혔다. 문헌사료에서 나오는 서기전 위만조선 상황들을 알려주는 고고학 자료가 서북한 지역에 없었다고 연거푸 피력했다. 그는 “토성이 5,6개가 나오고 북한에서 새로운 자료를 내놓길래 정말 쾌재를 불렀다. 새로운 정보가 있겠지, 샅샅이 뒤져도 없었다. 그러니까. 토기가 나오지만 아니다. 지탑리 토성은 신석기 것이다.”라고 실상을 밝혔다. 이어 “그래서 시야를 넓혀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라며 위만조선 왕검성을 평양이 아닌 대륙으로 보게 되었다고 심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오는 기사를 제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왕검성에는 연나라, 진나라 유물이나 왕검성 성곽으로 볼만한 유적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평양지역에는 이런 흔적이 없기 때문에 요동 등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요동으로 가면 연나라, 제나라, 한나라, 진나라식 토기나 제기, 청동기가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연나라나 제나라가 지배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부가 이주해서 살다 남겨놓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고 했다. <사기> 조선열전을 염두에 둔 주장으로 보인다. 그는 이어 “<사기> 조선열전에서 표현하는 위만조선의 문화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라고 물으면서 “중원문물이 전혀 없는 (서북한 지역 평양)공간에서, 위만조선이 영원히 보이지 않는 그런 산골에서 우리가 위만조선 왕검성을 찾아야 하는가” 라며 목소리를 높여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발상의 대전환을 할 때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마무리했다. 이날 정 교수는 발표문에서 왕검성이 요동에 있을 수 있다는 사료근거도 제시했다. 왕검성 요동설을 소개하면서 한서에 후한시대 응소 주장한 주석을 들었다. 이 주석에는 요동군 왕험현이 조선왕의 옛 도읍지라고 되어 있다. 조선왕의 옛 도읍지가 곧 위만조선 왕검성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왕검성이 평양이 될 수 없고 최소한 요동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정 교수가 처음이 아니다. 민족사학계에서는 이는 상식이 될 만큼 특별한 주장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강단식민사학계와 한국고고학계 같은 주류학계에서만 거부하고 있었을 뿐이다.

▲ 한국고고학회가 주최한 전국고고학전국대회 종합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이청규 영남대학교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기존 통설을 깨는 주장들이 나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정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식민사학계 뿐 아니라 고고학계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큰 획을 긋는 발언이다. 이는 이날 정 교수가 발표를 마치자 사회를 맡은 국립중앙박물관 이양수씨가 충격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읽혀진다. 정 교수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하여 토론자로 나선 이는 이화여대 오영찬 교수다. 그는 낙랑봉니를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다가 이화여대 교수로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오 교수는 토론자로 참석하지 않았다. 토론문만 책자에 끼워져 있었다.

그래서 이 토론문을 토론에 참여한 국립중앙박물관 박진일 씨가 대신 읽었다. 이에 정 교수는 비록 점잖게 표현했지만 아주 불쾌한 기운이 역력했다. 그는 “이 행사를 대표하는 오영찬 선생님 하고 오늘 좋은 토론을 기대하고 긴장도 많이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바람 맞은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라고 하여 언짢은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오 교수는 토론문에서 왕검성과 낙랑군은 같은 곳으로 문헌사료에서 일관되게 나오는데, 정 교수는 왕검성과 낙랑군이 다른 곳이라고 한다며 납득하기 어렵다고 따졌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평양에서 왕검성 고고유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향후 발굴성과가 쌓이면 충분히 드러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근거로 풍납토성 예를 들었다. 서기1980년대까지 누구도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 왕성지라고 보지 않았는데 풍남토성 발굴로 드러났다고 했다. 평양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 이남규 한국고고학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이 학회장은 소통과 화합을 강조했다.

이에 정 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하루아침에 급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십년, 십오 년을 넘게 자신도 기존의 통설에 따라 평양이 왕검성일 것이라고 믿고 연구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드러난 것은 평양이 왕검성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고 토로했다. 고고학자는 유물, 유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그 결과 평양성은 왕검성이 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백제풍납토성과 평양=왕검성을 같은 사안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미 이 지역이 백제왕성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보고 꾸준히 주시해 왔고 결국 발굴을 통해서 드러났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반면에 평양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왕검성을 나타내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 교수에 따르면 한나라가 왕검성을 함락시킨 후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함락시킨 자리가 아니라 수천리 떨어진 평양에 설치한 것이 된다. 이에 오 교수는 납득할 수 없다고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정 교수는 이것이야 말로 문헌사학계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문제라고 맞받아쳤다. 고고유물로는 너무 선명하게 평양성은 왕검성이 될 수 없다고 증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 교수가 고고학전국대회에서 기존 통설을 깨는 주장을 함으로써 향후 고고학계와 강단식민사학계간의 관계정립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정 교수가 고고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상황도 배제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 분위기를 보면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당분간 이 상태가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이날 정 교수는 낙랑군위치 문제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낙랑군은 왕검성과 달리 평양일대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일갈했다. 강단식민사학계와 이 점에는 같다. 낙랑군=평양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최근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낙랑군 위치다. 우리학계에서는 거의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일각에서는 낙랑군 위치가 어디인가 심각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고고학계가 본격적으로 대응을 못해 왔으나 이제 분명히 해야 한다. 낙랑군 위치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낙랑군 문헌사료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삼한전, 왜인전과 고고유물을 비교해 보면 낙랑군 위치는 일관되게 정리된다. 삼한 사회, 예, 왜가 중원사회와 통교하는 매개체가 일관되게 낙랑군 또는 대방군을 나타난다. 특히 평양토기 전파 확산 경로를 보면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평양 토성리 토기 회도 단경호, 한강유역 회도 단경호가 같다. 재지에서 약간 씩 변형시켜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역 특성이다. 마한, 예, 동해안 지역도 대동소이한 토기들이다. 일본 대마도, 산음지역 잔모치 유적 등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일제가 조작했느니 하는 것이나 낙랑호구부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해방 후 새롭게 나온 고고학 자료만 가지고도 낙랑이 평양이 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학자 양심으로 말할 수 있다. <삼국지> 삼한전, 왜인전에 나오는 기록과 고고유물이 일관되게 일치한다.」

이날 정 교수는 발표를 준비하면서 왕검성과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보는 주장들을 두루 살펴보았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 학자들도 이날 고고학전국대회에 어떤 모습으로든지 참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문헌사학을 하는 학계의 많은 논문도 보고 학자들에게 물어보았다. 또 어제 일본고대사를 하시는 분들과 대화를 해보니까, 여전히 낙랑과 왕검성을 한 몸으로 생각해서 대동강 북안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라는 언급이다.

한편 이날 문헌식민사학계를 비판하는 발표는 정인성 교수 외에 또 있었다. 이형원 한신대학교 박물관 학예사가 주인공이다. 그는 문헌식민사학계에서 고조선의 상한을 아무리 높여 봤자 서기전 9세기라고 한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그러나 자신이 토기를 중심으로 연구해 보니 최소한 서기전12세기까지 거뜬히 올라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고학을 하고 있으므로 고조선 역사는 문헌이 아니라 물건이 먼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배 관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은 여러분들의 것이라며 박물관이 벌이고 있는 각종 행사를 많이 이용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전체 흐름은 강단식민사학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조선이라고 했지만 이들이 말하는 고조선은 단군과는 상관없는 위만조선이거나 그 앞의 기자조선에 지나지 않았다. 고조선의 상한을 서기전 13세기까지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이다. 발표자들과 토론자들 어디에도 단군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까지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였다. 이청규 교수에게도 고조선이 어느 조선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단군조선도 포함되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회피했다. 질문의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국수주의로 빠지면 곤란하다는 답변을 했을 뿐이다. 강단식민사학계와 마찬가지로 ‘단군’, ‘민족’ 이런 개념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 였다.

이날 행사에는 전국에 모여든 고고학 전공 관련자들이 몰려들어 대강당을 거의 채웠다. 대부분 고고학 전공과 관련된 학생들이었다. 이날 기조강연을 맡은 이청규 교수에 의하면 고 김원룡 교수가 한국고고학계를 만든 태두라고 언급했다. 결국 이날 몰려든 장사진을 친 수백 명이 김원룡 교수 후학들이라는 소리다. 한국고고학회는 이날 뿐 아니라 다음날인 서기2017.11.04.에도 분야를 바꾸어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또한 대학교 외에 각종 고고유물 국공립 또는 사설 발굴 단체들도 대거 참여해서 주제발표와 각종 대회를 가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고고학전국대회를 풍성하게 벌이는 장소로 제공된 셈이다. 대강당과 앞 널찍한 공간과 복도에는 고고유물 관련 사진 전시가 있었고 그동안 발간한 책자들을 해당 출판사에서 직접 판매하기도 했다. 이틀에 걸쳐 고고학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 주최 측에서는 그동안 고고유물 발굴을 담은 책자를 판매했다. 국내 뿐 만 아니라 몽골 초원 등지에서 발굴한 북방 흉노족 유물을 담은 자료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한편 이날 학회 주최 측에서는 동영상 촬영 취재를 못하게 막았다. 이유도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초상권을 이유로 들었다. 발표자들이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 학회 총무간사인 한신 대학교 박물관 강정식이 막았다. 잠시 후에는 학부생으로 보이는 젊은이와 함께 막았다. 신경전이 오가고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며 험악한 말까지 나오게 되자, 이날 발표자로 나선 한신 대학교 박물관 소속, 이형원씨가 그만하라고 했다. 그런데 행사 진행 중에 또 강정식과 학부생이 곧 육탄으로 저지할 것 같은 기세로 촬영하지 말라고 했다. 육두문자가 나가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기자가 ‘아까 니들 선임으로 보이는 인사가 그만하라고 했다’고 고지하자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날 개회사를 한 이남규 학회장은 소통과 화합을 강조했다. 이 소통과 화합이 누구를 대상으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주취측은 행사장 앞뒤에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또한 돌아다니며 행사 사진을 찍었다. 초상권을 핑계로 저지했는데 자신들이 찍으면 초상권이 보존되고 공공목적을 위해서 취재하는 언론사에서 찍으면 초상권이 침해된다는 발상은 모순이다.

더구나 주최 측은 발표책자를 1만5천원 주고 팔았다. 공짜가 아니라 돈 주고 듣는 것이다. 여기에는 가만히 듣기만 하는 것 외에 필요에 따라 발표장면을 사진으로 담을 수도 있고 영상으로 저장할 수 있는 권리까지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저지했다. 이는 비판적 기사가 나가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주최 측의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한 가지 주장만 강요하는 풍토, 명령과 복종만이 지배하는 권위주의로 굴러가는 학계의 풍토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했다. 며칠 전 병원에서 지성의 상징, 교수가 전문의 과정 의사들을 말 잘 안 듣는다고 무차별 구타해서 피멍들게 한 사건과 과연 다른 풍토라고 할 수 있을까.

 

오종홍 기자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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