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학설이 얼마나 허술한 비학문인지 밝혀지다

미사협 학술원 하반기 학술대회(1)

서기313. 평양에 있다던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요서지역으로 이사 갔다는 교치설,

일제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일본이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2백년 이상 식민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 일제의 조선침략에 맞춰 날조해낸 것이다.

 

서기2017.에도 민족사학계와 조선총독부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식민사학계간의 보이지 않는 역사전쟁이 치열하다. 강단식민사학계는 국가가 돈과 시설 및 인력까지 지원하는 가운데 올해에도 시민강좌라는 미명하에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준 식민사관을 주입시키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드러난 것만 해도 경주국립박물관에서 10여회에 걸쳐 진행했다. 하반기에는 더욱 노골화 하고 있는데 경남 김해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총15회에 걸쳐서 ‘한국고대사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로 시민들에게 퍼뜨리고 있다. 서울에서는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총 24회에 걸쳐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라는 주제로 주 2회씩 퍼뜨리고 있다.

이에 민족사학계는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 상임대표 허성관-전 행정자치부장관)를 지난 서기2016.06.에 발족시킨 이래, 매달 전국 순회 바른 역사 시민강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학술원을 지난 서기2017.04.13.에 개원해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학술대회를 열었다. 서기2017.10.27. 서울시 서대문구 독립공원에 위치한 순국선열유족회 강당에서 실시되었다. ‘사료로 보는 낙랑군과 임나일본부설 비판’을 주제로 이날 열린 학술대회는 강단식민사학이 내세우는 핵심 학설들을 집중 검증, 비판하는 시간이었다.

▲ 서기2017.10.27.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에 위치한 순국선열유족회 강당에서 제2회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 학술원 주최 학술대회가 열렸다. 주제발표자들과 주요 참석인사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에 앞서 미사협을 대표해서 손윤 미사협 공동대표가 인사말로 학술대회 문을 열었다. 손 공동대표는 미사협이 그동안 이룬 성과를 소개하면서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을 밝혔다. 미사협을 교육부에 등록해서 강단식민사학계처럼 정부지원을 받는 단체로 키우겠다는 계획이다. 손 공동대표는 교육부에 들어가 담당 공무원에게 미사협 사업을 설명하면서 겪은 애로를 소개했다. 담당 공무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이해 시켜야 했는데 3개월 정도 걸렸다며, 공무원들이 얼마나 역사지식과 의식이 없는지 실감했다며 소회를 털어놨다. 이어 고려대 전 교수, 김현구씨가 출판금지가처분 신청한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의 <우리안의 식민사관> 책 소송 건이 좋게 풀리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 책을 출간한 도서출판<만권당>을 상대로 김현구씨가 출판금지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항소심에서 패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미사협 공동대표를 맡아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뛰어 듣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아울러 역사를 바르게 세우는 차원에서 역사의식이 뚜렷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이 창당했던, 한국독립당을 재건해서 정치 분야에서도 바른 역사 광복에 힘쓰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조만간 한국독립당 발기인 대회를 크게 갖는다고 했다.

▲ 손윤 미사협 공동대표가 학술대회에서 미사협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손윤 대표는 교육부에 미사협을 사단법인으로 등록신청하면서 활동목적으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사관 청산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어 미사협 학술원장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학술원 활동을 간단하게 소개했고,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이 학술원장은 올 4월에 학술원 출범 학술대회를 가졌다는 말로 운을 뗐다. 이어 같은 달 중국 주석, 시진핑(習近平)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 일부였다’는 발언을 했는데 우리역사를 책임진다는 강단사학계가 아무런 대응을 안 할 때, 미사협 학술원이 나서서 반박 학술대회를 열어 대응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 학술원장은 올해 말에 학술지를 발간하고, 학술등재지로 만들어 이 학술지에 올라온 논문이 향후 강사나 교수로 진출할 때 경력사항으로 채택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학술대회가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강단식민사학계와 날카롭게 대립하는 쟁점들이 드러났다.

먼저 이덕일 학술원장이 제1주제발표에 나섰다. 이 원장은 ‘시기별 사료로 보는 낙랑군 위치’를 꺼내 들었다. 이 원장은 먼저 양 학계간의 정점에 있는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 위치를 두고 현재 강단식민사학계에서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낙랑군 교치 설’을 검증했다. 이 원장은 교치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추적했는데 역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1백여 년 전에 이미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개탄했다. 서기1913. 경에 일제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총독부, 중추원내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조선반도사>에서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를 먹기 위해 중국의 그 수많은 자료를 다 뒤져서 일응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식민사관을 만들어 냈다고 놀라워했다. 중국 <자치통감>이라는 사료에서 어떻게 낙랑군이 평양에서 중국 요서로 이사 갔다고 믿을 만한 근거문장을 찾아냈는지 감탄할 정도라고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 근거문장이라는 것이 평양에 있던 낙랑군이 이사 갔다는 교치설 근거가 결코 될 수 없다고 증명했다.

▲ 이덕일 미사협 바른역사 학술원장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 원장은 강단식민사학계가 내 놓은 '낙랑군 교치설'도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갖다가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강단식민사학은 고구려 미천 태왕에게 평양에 있다던 낙랑군이 서기313. 멸망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체부터 거짓임을 <삼국사기> 해당조항이 증명한다. 멸망했다는 기록이 없다. 침공했다고 나올 뿐이다. 그런데도 강단식민사학계는 이 때 낙랑군이 멸망했다면서 나머지 잔존세력인 약1천 가구가 요서의 모용 씨에게 귀부해서 모용 씨가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낙랑군 교치설 핵심이다. 이 원장은 1천 가구 인구정도로 한 개 군을 설치한 예가 없고, 평양에서 중국요서 지역으로 이사 간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산과 강이 가로 막고 있고, 또 고구려가 그 사이에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적국을 통과하여 갈 수 있냐는 것이다. 더구나 패주하는 낙랑군 잔존세력 중에 어린애와 노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적지 않았을 텐데 수천리가 넘는 거리를 무사히 통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일반 상식으로도 평양에서 요서로 교치는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자치통감>에 있는 교치내용은 원래 하북성 지역에 있던 낙랑군이 거기서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중국 사료에 하북성 지역으로 비정되는 '한나라 설치' 낙랑군 기록을 여러개 제시했다. 또한 낙랑군과 관련된 열수, 험독 등이 모두 북한이 아니라 요동에 있다는 사료를 들어 낙랑군이 중국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동북공정관련 중국 측 자료와 지도에도 험독이 중국 요동에 있다고 하는데 국내 강단식민사학은 북한 평양일대로 그려놓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험독현만 제대로 고증해도 낙랑군이 평양이 아닌 중국 대륙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어 정암 전 관동대학교 겸임교수가 ‘임나 위치비정 비판고찰’을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정 전 교수는 일제가 정한론征韓論을 내놓은 시점에 주목했다. 이 시기는 서기19세기 중후반인데 이 때 벌써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등장했다고 환기시켰다. 정한론은 일제가 당시 우리나라를 정복해서 일본의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일제는 이 이론을 일본 국민들에게도 교육시켜 전 일본이 정한론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했다.

정 전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이 세계2차 대전 이전과 이후에 어떻게 변해 가는지 나누어 살펴보았다. 2차 대전 이전에는 조선총독부와 같이 야마도 왜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임나로 하여 식민통치한 모습으로 그렸다고 했다. 정치, 군사로 지배, 군사기지, 왜왕의 직할지 등의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는 이전의 학설이 지배하다가 서기1963. 북한 학자 김석형 교수가 ‘삼한, 삼국 일본열도내 분국설’이 나와 이전의 학설이 주춤했다고 했다.

이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지명을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적용하고 있는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임나일본부설이 패전 이후에는 이전보다 누그러들었다. 그런데 스에마스야스카즈(末松保和)가 <임나흥망사>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이 유지되고 있다. 정 전 교수는 쓰에 마스의 임나위치비정을 중심으로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을 검증해 나갔다. <일본서기> 소위 ‘신공황후49’연조에 나오는 지명들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이 쓰에마스다. 조금이라도 비슷하거나 추론이 가능한 지명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있으면 <일본서기>에 나오는 곳이 그 곳이라고 정하고 있다.

▲ 정암 관동대 전 겸임교수가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고 있다. 정 전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일제침략을 뒤받침하려고 임나일본부설을 개발했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일본서기>에 ‘비자발’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비자와’, ‘비사벌’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쓰에마스는 일본서기 비자발=삼국사기 비자와, 비사벌 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곳이 현재 경남 창녕이라고 한다. 또 <일본서기> 탁국을 <삼국사기> 달구 현이라고 하고 이를 현재 경남 경산이라고 한다. 또 <일본서기> 안라는 <삼국사기> 아시량국이라고 한다. 정 전 교수는 쓰에마스의 이 같은 위치비정은 모두 말소리를 가지고 한 것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문헌학, 역사지리학, 언어학 등 어떤 기준으로도 맞지 않는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쓰에 마스는 한국어 음운학 지식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서기1895. 을미왜변(민비시해) 일으킨 일본인 ‘아유카이’가 이미 우리나라 침략이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한다.

이날 정교수가 심각하게 지적한 것은 전 고려대 교수, 김현구씨 같은 비중 있는 인물들이 모두 쓰에마스가 학문근거도 없이 억측으로 비정한 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동북아역사재단도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 버팀대로 작용했다’고 비판했다. 학문이 아닌 침략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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