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교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반대한다고 하면서 실제는 찬성하다.

 

박대재 교수,

‘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정반대 입장이다’

‘신라는 사로국에서 나왔는데 처음에는 군郡 크기의 소국에서 출발했다’

‘진한 12국 중의 하나로 탄생한 것이 신라다’

‘신라는 서기3세기 이전에는 왕국이 아니었다’

 

요즘 누리망 상에 유행하는 말이 있다. “다스 누구 거야?”, “아, 글쎄 다스 누구 거냐고?” 이른바 BBK(비비케이) 사건과 관련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겨냥하여 풍자하는 말로 보인다. 비비케이 사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연루되어 있고 범죄혐의가 짙어지면서 처벌하라는 여론을 타고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말이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생겨날 듯한 분위기다. 강단식민사학계를 겨냥한 것인데, “신라 도대체 언제 건국한거야?”라는 조소다. 서울 한성백제박물관과 김해국립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지난 9월부터 동시에 진행하는 시민강좌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강좌에 등장하는 강사마다 제각기 신라 건국시기를 직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서기4세기 신라가 ‘성립’되었다고 하는 강사가 있는 반면에 조금 더 후대에 성립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강사는 서기3세기에 ‘왕국’이 되었다고 한다. ‘성립되었다’, ‘왕국이 되었다’, ‘고대국가가 되었다’ 등 표현도 여러 가지로 쓰고 있어 방청객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사들이 한 결같이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조선총독부사관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어떤 강사는 직접 추종하기도 하고 어떤 강사는 부정한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보면 추종하고 있다.

▲ 서기2017.10.17.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대재교수가 한국고대사학회가 주도하는 시민강좌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날 박 교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사로국을 등장시켜 사로국이 주변소국을 복속해 가는 과정이라며 초기기록을 인용했다.

서기2017.10.17.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시민강좌에서도 같은 주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날 시민강좌는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대재 교수가 맡았다. ‘사로국에서 신라로’ 라는 제목으로 강연에 나섰다. 박 교수는 신라가 사로라고 하는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여 신라라는 큰 왕국이 되었다고 했다. 신라가 이른바 고대국가, 즉 큰 왕국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견해다 있다고 소개했다. 하나는 진한이라는 작은 나라 연맹체가 있었는데 서기4세기 중엽 내물왕대 와서 신라가 되었다는 견해다. 서기 4세기를 기준으로 이전에는 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이 있었는데 그 후에 신라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사로라는 작은 나라가 성장 발전해서 3세기경에 신라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사로가 진한의 여러 작은 나라를 통합해서 신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영역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후자를 따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사로국이 어떻게 주변 소국을 정복하면서 신라로 성장해 갔는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을 제시했다. 파사이사금 때 서기102년에 음즙벌국, 실직국, 압독국을 복속했다고 하며, 이어 파사이사금 때인 서기108년에는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 등을 정복했다고 한다.

신라는 지증마립간대에 와서 신라라는 이름으로 통합된다. 박교수는 이 때 신라라는 국호가 공식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 때 신라가 왕국이 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여 기존의 시민강좌 강사들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다른 강사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삼국지 동이전 한조를 끌어들여 초기 신라사를 다시 구성하는 방식을 버리지는 못했다. 삼국지에 묘사된 진한을 그대로 끌어다가 신라초기역사를 해석했다. 이에 따르면 신라는 서기3세기까지 왕국이 아니었다. 사로라는 아주 작은 고을수준의 집단에 불과하다. 그는 이를 군과 같다고 표현했다.

삼국지 동이전, <한韓>조에 따르면 이 소국들은 큰 것은 4,5천 가구(大國四五千家)이고 작은 것은 6,7백 가구(小國六七百家)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국 중에 사로가 나온다. 사로국이 아무리 인구가 많아 봤자 4,5천 가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 가구당 7명씩 잡아도 아무리 많아봐야 3만5천명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나라의 경우 6,7백 가구라고 했으니 한 가구당 7명잡아도 아무리 많아봐야 4천9백 명 수준이다. 사로국 규모가 이 정도라는 얘기다. 박 교수는 신라가 서기3세기경까지 이정도의 고을 군이라고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가 아니다. 이때까지 신라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서 나왔다. 일제식민사관을 연구하는 학계가 내린 결론이다.

▲ 이날 강연에서 박교수는 사로국이 경주를 중심으로 주변 소국을 정복하면서 신라로 커져갔다는 논리를 펼쳤다. 위 지도는 사로국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박 교수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중국 삼국지를 기준으로 본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신라는 박 교수가 상정하는 초라한 작은 고을 소국이 아니다. 유리이사금 때인 서기 32년에 이미 17관등제를 실시하고 있다. 또 스스로 ‘짐朕’이라고 부르고 있다. 파사이사금 때인 서기84년에 이미 남신현南新縣이 존재하고 있다. 이어 서기90년에는 주군州郡이 등장하고 있다. 주군에 사자 10명을 파견하여 각각 주주, 군주를 삼고 있다. 아달라이사금 때인 서기167년에는 백제와 전투를 벌이면서 2만 병력을 동원한다. 더구나 기마병8천을 지휘하기도 한다. 일식 등 천문현상기록은 신라개국 초기부터 나온다. 신라 초대왕인 혁거세 거서간 때부터 일식 등 천문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신라가 처음부터 왕이 통치하는 강력한 고대국가였음을 말한다. 주군 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앙집권국가였다.

그러나 이 날 박 교수는 이런 기록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나오는 사로국 수준의 신라만 설명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어디에도 사로국이 신라의 나라이름으로 사용된 예가 나오지 않는다.

신라 1대왕 혁거세조에는 분명히 나라이름을 ‘서나벌’이라고 한다. 그 후 탈해이사금 때는 계림으로 부른다. 어디에도 신라를 사로라고 한 사례가 없다. 다만 지증마립간에 와서야 나라 이름이 시조가 창업한 이래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사라, 사로, 신라로 불렀다고 할 따름이다. 사로라고도 불렀다고 하지만 신라본기에는 어느 왕 때 사로라고 했는지 나오지 않는다. 서나벌이라고 했다거나 계림이라고 부른 사례만 나온다.

그러나 박 교수가 강력한 고대국가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런 신라기록을 믿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인지 이날 질문시간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불신하는 일제식민사학자, “쓰다소키치의 주장과 박 교수의 주장이 대동소이한데 이는 우연의 일치인가?” 라는 질문이 나왔다. 박 교수는 이에 발끈하면서 자신은 쓰다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따르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교수는 원래 지난 9월 초에 이 시민강좌 3강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두염이 생겨 못했다. 그래서 이날 강연을 했다. 이 날도 아직 후유증이 남았는지 강연시간 내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 답변을 하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박 교수 자신은 오히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반대라고 강조했다.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 박 교수는 중국 삼국지를 기준으로 우리 나라 정사인 삼국사기를 끼워 맞추는 기법을 동원해서 우리역사를 바라본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내용면에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과 다르지 않다.

강연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다시 질문이 있었다. 신라가 서기3세경 까지 고을 수준의 사로국이었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초기부터 천문현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가 개국초기부터 강력한 고대왕국이었다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박 교수는 신라초기 천문기록이 당시 중국 것을 베낀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경주에 있는 첨성대가 생긴 이후에나 신라가 천문관측을 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옆에 있는 이 시민강좌 실무를 진행하는 이승호 동국대 강사가 거들었다. 후한서를 베낀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이에 고천문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현재 고등과학원에 재직 중인 박창범 교수의 주장을 제시했다. “박창범 교수가 증명해 낸 바에 따르면 당시 중국 천문기록보다 삼국사기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나오는데 이건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고 되물었다.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천문현상은 그것이 임의로 집어넣었는지, 다른 것을 베낀 것인지, 정말로 일어난 현상을 기록한 것인지 증명이 가능하다. 과학으로 검증이 가능하다는 박창범 교수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신라초기 기록도 진짜 일어난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민강좌에 참여한 강사들이 거의 그렇듯이 겉으로는 일제식민사관을 극복해서 더 이상 추종하지 않는 것 같이 말하지만, 내용에 들어가서는 여전히 식민사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날 박 교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날도 지난번 강좌를 비평한 비평인쇄물을 배포했다. 늘 그렇듯이 수고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이날 박 교수가 지적했듯이 참석 인원이 크게 줄어 있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3분의 1수준이었다. 이날도 주최 측과 다른 곳에서도 강연을 영상으로 담았다. 다음 강좌는 연세대 이현숙 교수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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