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학회 시민강좌, 조선총독부 황국사관 반복하다

 

이마니시 류와 스에마스 야스카즈의 황국사관(1)

조선총독부 황국사관학자 이마니시 류,

‘백제는 4세기 중반부터 국제교통을 시작했다. 신라는 가장 늦어서 6세기 상반기부터 그것도 백제 사절을 따라 들어갔다’

한국고대사학회 하일식 연세대 교수,

‘하 교수는 신라의 경우 발전과 성장을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보았다. 특히 중국 <양서> 신라전에 나오는 신라모습을 기준으로 신라를 판단했다. 이에 따르면 신라는 외교관계에서 백제 에 붙어 다녔다. 백제가 아니면 중국과 사신교환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서기 2017.09.22.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교 205에서 한양 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가 주최한 학술토론회가 있었다. ‘경성제국대학과 동양학 연구’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날 관심을 끄는 것은 첫 번째 주제발표였다. 한림 대 정상우 교수가 첫 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섰는데 그는 대일항쟁기 경성제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총독부 황국사관을 전파한 일제 관학자 2명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스에마스야스카즈(末松保和)다.

그동안 이들이 어떻게 황국사관(식민사관)을 전파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관련 연구자들이 필요에 따라서 언급했을 뿐이다. 이번 학술토론회처럼 본격적으로 해부하는 수준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정 교수에 의하면 일제는 한반도 침략 및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황국사관을 만들어냈다. 일제가 당시 소중화 조선보다 국력이 강해짐에 따라 한일관계 역사도 재편성한 것이 황국사관이다. 일본제국주의 국력이 과거 상고, 고대에도 똑 같았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 상, 고대사를 왜곡 조작했다. 당시 소중화 조선은 정체되어 있고 발전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보고 일본이 지배하여 다스려야 된다는 논리다. 여기서 정체성론이니 타율성론이니, 일선동조론이 싹튼다. 모두 황국사관, 즉 식민사관이다.

먼저 정 교수가 밝힌 이마니시 류의 황국사관을 살펴보자. 이마니시 류는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만 중국 사료에서 뽑아다가 우리역사를 그 아래에 끼워 넣는 방법으로 황국사관을 만들어간다.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낙랑바다 가운데 있는 왜인들이 백여 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국에 해마다 조공하고 있다는 기사다. 이마니시 류는 이시기를 서기1세기경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시기 삼한이 중국과 교통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착안해 삼한보다 왜가 발전된 나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 때 왜는 열도 섬에서 중국대륙까지 왕래 할 만큼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 한림대학교 정상우 교수가 대일항쟁기 경성제국대학에서 활동한 일제황국사관론 자들의 식민사관 전파를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교류할 선박도 만들지 못하는 저발전 된 상태라는 논리다. 이 때 왜는 한반도를 경유해서 중국과 교류했다고 한다. 삼한은 왜에게 길을 열어주었고 이는 왜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임나일본부가 생기기전의 전 단계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한나라 낙랑군 시대에 와서는 왜는 낙랑군과 교통하기 위해 한반도를 이용했다. 이렇게 되려면 남부지방은 강력한 백제나, 신라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전형적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조작이 진행된다. 이에 기초해서 이마니시 류는 남한에 70여 개국의 작은 연맹체 소국들을 집어넣는다. 물론 삼국지 위서 한전에 나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왜는 특히 이용거점을 임나에 두고 있었는데 이 임나는 오늘날 경남 김해라고 한다. 또는 경남 함안을 임나로 보기도 한다. 가야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가야, 즉 임나가 백제에게 시달리자 왜에 구원을 요청하여 파병하는 과정에서도 이 지역을 왜가 점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또 신라는 삼국통일 전이나 후나 일본에게 끊임없이 조공을 바치는 신하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조에서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고 한 기사에 근거하여 이른바 삼국을 통일시기 이후에도 일본에 신속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신라가 일본을 심히 두려워하여 문무왕이 일본 침략을 막겠다고 뼈를 바다에 뿌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일화를 끌어왔다.

이마니시 류는 경남 지방 등 이른바 임나로 비정한 곳에서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나오지 않자 문헌으로 이를 증명하는 논리를 폈다. 물론 직접 관계도 없는 중국 사료와 일본서기 그리고 광개토대왕비 등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여 임나가 경남지방이라고 했다. 이마니시류가 얼마나 우리역사 왜곡에 앞장섰는지 그의 행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벌써 서기1906.에 고고학적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서기1910.경술국치(한일합병)이후에는 촉탁을 맡고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전국의 주요 유적을 파헤쳤다. 그 과정에서 이미 날조된 것으로 증명된 점제현신사비를 내놓았다. 또한 평양과 황해도 일대를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인 낙랑군 및 대방군으로 확정했다. 또한 조선총독부의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에도 뛰어 들어 조선사에서 고대사 부분을 담당했다. 그는 <조선사개론>, <가라강역고>, <사림> 등 수많은 한국사 왜곡 서책을 내놨다.

▲ 한양대 박찬승 비교역사문화연구소장이 학술발표회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박 교수는 식민사관 조명작업 최근에는 주로 탈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연구소에서는 지난 시기에도 이런 학술발표회를 했다고 했다. 그 때 발표자료를 묵어 펴낸 책이 <식민주의 역사학과 제국>이다.

한편 그는 한일관계 고대사를 연구하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이 필연으로 혈연관계가 있음을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애써 부정하려고 갖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인종적으로는 가까울지는 모르지만 섬과 반도에서 이미 주요한 점에서 풍속을 달리하여 별개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일관계역사가 동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궤설을 늘어놓는다. 이는 일제의 일선동조론과 관련 있는 것인데 이 시기는 아직 일선동조론을 전면으로 내세운 정책이 시행되기 이전으로 보인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이 조상이 같다는 주장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일제는 일제침략이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부터 우리민족을 일제에 완전히 흡수시키려고 일선동조론을 적극 펼친바 있다. 일본과 한국은 본래 한 조상에서 나왔으니 식민통치에 저항하지 말고 순응하라는 식민사관이다.

그런데 현재 국내 강단식민사학계가 이들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올해 하반기에 들어서 서울 한성백제박물관과 경남 김해박물관에서 총 33회에 걸쳐 시민강좌라는 것을 열어 시민들에게 이마니시류 같은 황국사관론자들이 만들어 놓은 침략 및 지배논리를 역사라는 미명하에 주입시키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리는 시민강좌에서 한국 고대사학회 회장,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이마니시 류가 한 말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 했다. 신라가 가장 늦게 발전했는데 백제사신을 따라 중국에 입조했다고 했다. 신라가 백제를 통해서 중국과 교통을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백제가 없으면 불가능했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는 이마니시류가 이미 서기1910년에 한 말이다. 신라는 가장 늦은 시기인 6세기경부터 지나支那(중국)에 백제 사절을 따라 들어갔다고 한다. 하 교수의 논조가 이마니시 류 한 말과 거의 같다. 지난 서기2017.09.27. 김해박물관에서 강연한 이 영식 인제대 교수도 마찬가지다.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과 위나라 시기의 대방군을 서북 한에 설정해 놓고 이 두군 의 선진문물을 받아 삼한이 발전했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런데 이마니시 류가 이미 이러한 논리를 펼쳤다.

식민사관 중에 이른바 교량 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일본이 선진문물을 한반도에서 수입했는데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역할만 했다는 이론이다. 선진문물은 당연히 한반도 것이 아닌 중국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마니시류가 주장하는 황국사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서기2017.09.27. 김해박물관에서 강연한 김현구 전 교수가 그의 책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이날 한양대 학술토론회에서는 이 밖에 현 서울대학교 전신인 경성제국대학에서 어떻게 식민지 통치이론을 개발해서 퍼뜨렸는지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경제 분야에서도 식민 지배를 위해서 일제가 얼마나 집착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2부에서는 스에마스야스카즈의 황국사관을 중심으로 알아본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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