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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고대사> 고구려 4방 2천리, 낙랑국과 낙랑군의 비밀.낙랑군이 서기313년 평양에서 요서지역으로 이사갔다는 식민사학계 주장도 허구다
김봉렬 | 승인 2017.10.03 15:44

<진짜고대사> 낙랑군은 중국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2부)

 

글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3. 『삼국지』는 고구려 강역을 사방 2 천리로 기록했다.

기경량은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로 진수(233~297년)의 『삼국지』를 제시하면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경량은 두 가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르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삼국사기』‘신라본기’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5년(314)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위와 같이『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기림 이사금 3년인 서기 300년 “3월에 낙랑국과 대방국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 313년에 낙랑군을 침략하고, 314년에 대방군을 침략하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낙랑국과 대방국이 있었으며,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은 따로 있었다. 기경량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반도의 낙랑국과 대방국을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있다.

둘째,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누락시켰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삼국지』위서30, 동이전, 고구려

기경량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가장 중요한 고구려 강역의 크기를 고의로 누락시켰다. 역사왜곡의 전형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리인데, 기경량의 주장대로 요동군의 위치를 요령성 일대로 보면 고구려 강역은 사방 800리도 나오기 어렵다. 『삼국지』의 기록보다 고구려 강역이 1/5이하로 줄어드는 것이다.

『삼국지』의 기록대로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찾아보자.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동쪽 국경선을 대략 백두산 일대로 보더라도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를 가면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요령성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과는 사뭇 다르다. 혹시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가 잘못된 기록일까? 아래 <그림1>지도 참조

▲ 그림1 고구려 2천리를 계산해 보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요하를 훨씬 넘어 내몽골자치지역까지 뻗어간다. 그런데 강단식민사학계는 고구려가 절대로 요하 서쪽까지 넘어 가지 않은 것으로 일관되게 그려놓고 있다.

그렇지 않다.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을 통하여 교차검증 된다.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특히 『통전』은 아래와 같이 시대별 고구려 강역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통전』권 제185, 변방1, 동이 하, 고구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강역은 신라,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남북은 1천여 리에서 2천여 리까지 변하지만, 동서의 길이는 2천여 리 보다 좁아진 적이 없었다. 즉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보다 줄어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강역이 동서 6천리로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을 넘어 섬서성 지역까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은 어떤가? 광개토태왕 이전의 강역은 요령성의 천산산맥을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 때도 현 중국 요령성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강단사학계는 중국의 수많은 정사기록들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강단사학계가 고구려 강역을 『삼국지』의 기록보다 1/5이상 좁게 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 요동의 위치를 잘못 비정했기 때문이다. 고대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요동이라는 지명이 요령성으로 이동한 것은 중국 요나라(916 ~ 1125) 시대 이후이다.(필자의 저서 『고조선으로 가는 길』89~109쪽 참조)  
고대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은 중국 서진시대의 정사인 『진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문의가 모두 멋대로 요동에 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사服事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으며,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로 합하였다. 공손문의가 멸망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고 양평에 거하였다. 함녕 2년(AD 276)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개현을 다스리고, 18,100호이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護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진서』권14, 지제4, 지리상, 평주

위의 『진서』‘평주조’ 기록은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한나라 낙랑군이 기원전 108년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어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42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를 지배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진서』기록은 전혀 다르다. 『진서』는 한나라와 삼국시대 그리고 서진에 이르기까지 중국 군현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지』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현 요령성지역과 한반도 북부는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다.

▲ 일제 조선총독부는 세키노타다시(關野貞) 같은 일제관학자들을 동원하여 평양=한나라 낙랑군을 만들어내기 위해, 북경 유리창가에서 한나라 시기 낙랑군 유물을 집중수집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가져왔다. 사진 왼쪽 세키노타다시, 오른쪽 세키노타다시가 서울 홍제동에 있는 5층석탑을 조사하고 있는 모습.

『진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였던 요동지역은 위나라가 서기 238년 공손연을 멸하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으며, 서진 또한 위나라를 멸하고 함녕 2년(AD 276) 10월에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다. 서진의 평주가 고대의 요동지역이며, 한나라 낙랑군․대방군과 요동군 등이 설치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서진의 평주 위치는 어디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진서』는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고 하였다. 서진의 평주는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는 지역이다. 고대의 요동과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서진의 평주를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 일대로 보고 있다. 이는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다. 아울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북위서』‧『주서』‧『북사』‧『수서』‧『구당서』‧『통전』등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과도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다. 

기경량과 강단사학계에 묻는다.

1. 낙랑국과 대방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2.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어디에 있는가?
3. 『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라고 하였다. 이들 지역의 위치가 하북성인가? 한반도인가?  

4. 낙랑군은 하북성지역에서 하북성지역으로 교치되었다.

기경량은 중국사서에서 낙랑군이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을 서기 313년 한반도 평양의 낙랑군이 교치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이 수차례 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진서』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낙랑군, 창려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서기 313년 장통이 낙랑․대방에 의거하다가 1천여 가를 이끌고 창려에 위치한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는데, 낙랑․대방과 창려는 모두 고대 요동인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서 하북성 지역으로 교치된 것을 알 수 있다.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서 창려지역으로 교치되었다는 주장은 『진서』의 기록과 맞지 않다.

『자치통감』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여 수 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자치통감』313년

위의 기록에서 ‘요동의 장통’이라는 표현은 ‘요동사람 장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요동지역의 장통’이라는 뜻이다. 즉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했다.”는 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은 많이 있다. 앞에서 『진서』의 기록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지역에 있었으며, 고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재야사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고대 요동지역인 하북성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은 기경량의 주장처럼 재야사학자들이 중국의 역사 전개나 교치 개념의 이해가 전무한 탓에 생긴 ‘무지의 소산’이 아니다. 중국 정사들의 기록이 낙랑군은 처음부터 하북성 지역에 설치되었고, 하북성 지역 내에서 수차례 이동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경량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스스로의 무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오류를 교정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 연구에는 자료의 성격을 정확히 판단하려는 전문적 훈련·지식과 연구 대상에 대한 겸손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학문으로서 ‘역사학’과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이비역사’ 사이에 놓인 결정적 간극이다.”

기경량에게 충고한다. 스스로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라고 하였으니 아직 젊은 나이인 모양이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라는 우물에 갇혀 꽃다운 청춘을 허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선총독부가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삼은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은 모두 이동․교류․왜곡이 가능한 것들로 역사지리를 확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것은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유물들을 핵심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은 자료의 기본 성격도 판단하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와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려면 최우선적으로 고조선의 산과 강 그리고 해안선 등 자연지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지리의 상식이다.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 의하면 고조선의 중심부에는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습수․열수․산수․패수라는 강물이 흘렀다. 이들 고조선의 강산을 연구해보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북경 일대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끝> 

김봉렬  muk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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