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재 교수, 일제식민사학자, 쓰다소키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다

‘고구려 초기역사, 소수림왕 때 창작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신라역사도 내물왕 이전의 초기기록은 조작되어 믿을 수 없다’

‘신라는 내물왕 때 중앙집권 국가되었다’

‘신라가 서기전57년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이는 갑자년으로 조작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리고대역사를 전해주는 정사正史다. 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를 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다. 3국의 초기 역사를 보면 후기보다 역동성과 자주성을 담은 역사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조작된 가짜라는 주장을 펼치는 단체가 있다. 한국고대사학회다. 강단식민사학계를 대표하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학회가 개최한 시민강좌에서 또 다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전 강좌에서는 조작이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강좌를 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알아챌 수가 없었다. 드러내놓고 가짜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기2017.09.26.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시민강좌 제7강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고 드러내놓고 주장했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가 이 주장을 한 주인공이다. 이 같은 주장은 본 강연이 끝나고 질문시간에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을 빌어서 행해졌다.

▲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가, 서기2017.09.26.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시민강좌 제7강을 맡았다. 그는 이 강좌에서 조선총독부가 발명해 낸 삼국사기 초기기록 조작설을 설파했다. 조작설이 맞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신라가 서기전 57년에 개국했다는 기록을 부정했다.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서기전 57년이 육십갑자의 갑자년이라는 것이 의심스럽다고 했다. 불신의 근거로 고구려 주몽이 개국한 서기전 37년을 끌어왔다. 그는 “아마 신라입장에서는 주몽이 서기전 37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그 보다 더 이른 시기인 갑자년을 따졌는데 서기전 57년이다. 기원 57년에서 거기에서 만들어진 것이 맞다.” 라고 말했다.

다소 아리송한 얘기다. 전 교수가 말하고 싶은 이것이다. ‘신라는 고구려 개국 년대인 서기전 37년에 착안했다. 이것을 간지 년으로 환산해서 이를 기초로 서기전 57년을 신라개국년도로 정했다. 이 해가 갑자년으로 나오는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개국 년대를 기준으로 해서 신라 개국연대를 창작했다는 것이다. 서기전 57년으로 한 것은 이해가 간지 년으로 갑자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전 교수는 서기전 57년이 갑자년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다. 조선총독부 소속 일제 식민사학자,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전체 기년이나 역대 국왕의 세계도 또한 허구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혁거세의 건국을 갑자년으로 한 것은 간지의 시작에 맞춰놓은 것으로 이 갑자년 4월에 즉위하고 다음 갑자년 3월에 죽었다고 했고 그 재위를 정밀하게 만60년으로 한 것도 같은 사상에서 파생된 듯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 진전좌우길전집 별권제일).”

쓰다소키치는 혁거세 즉위년이 갑자년인 것이 불신의 근거라고 한다. 이날 전 교수가 한 말과 너무 닮아 있다. 이날 전교수가 펼친 신라개국연대 불신론은 전 교수가 연구해서 창안한 성과물이 아니라 일제식민사학자의 학설을 조금 변형시켜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전 교수는 이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왜 조작되었는지 나름대로 논리를 전개했다. 전 교수의 주장을 직접 들어본다.

“그러면 기원전 57년이 신라가 없었냐, 경주에 서기전 전후시기 사로국이 있었다. 고조선 유민들이 육부를 구성해서 조그마한 사로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물왕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기록을 인정하냐? 그렇지 않다. 역사를 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내물왕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연대까지 그대로 믿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연대 맞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다.

탈해가 처음에 나타났던 시기하고 왕위에 즉위한 시기하고 1백년 이상이 차이가 난다. 또 우로는 서기2백3-4십년 경에 활동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었던 흘해이사금은 서기3백년 무렵에 즉위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70년 뒤에 아들이 왕이 된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그 당시 신라 사람들이 이미 서기전 57년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맞춰갖고 나름대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전 교수는 왕들이 즉위한 시기가 지금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새가 있는가 하면, 팔이 8개 달린 아이가 태어나기도 한다.

이어 전 교수는 신라본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북한 역사서술에 비유했다.

“북한에서 최근에 나온 역사책을 봤다. 재미난다. 고주몽 서기전 227년 개국했다고 한다. 삼국사기도 거기에 맞춰 다시 편재를 한다. 신라도 마찬가지다. 서기전 57년이라는 연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춰서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해 넣은 것이다. 물론 사실관계가 없다, 그런 것은 아니다. 연대를 조정해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 교수는 북한이 고구려 개국연대를 삼국사기 고구려국 본기의 서기전 37년 보다 수백 년 높게 본 것을 신라개국년대와 동일시했다. 신라가 북한이 고구려개국연대를 높였듯이 임의로 서기전 57년으로 높여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것이 바른 역사학인지 지론을 펼쳤다.

“역사학자는 가장 중요한 게 사료가 뻥이냐, 진실을 얘기하느냐는 것을 먼저 따져야 한다. 그래야 어떤 것을 진실로 믿고 역사적 사실을 엮어서 논문이나 책을 낼 수 있다. 이것이 올바른 역사학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에게 강조할 때도 이런 태도가 역사학자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가르친다.”

▲ 전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신라 골품제도와 녹봉제도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렇게 힘주어 말한 뒤에 다시 북한을 끌어들여 신라개국연도가 가짜임을 강조했다.

“그래서 북한은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주몽이 서기전 277년에 나라를 건국했으니까, 백제 시조 온조는 주몽 아들이다. 그래서 백제연도도 끌어올린다. 거기에 맞춰서 다시 역사를 쓴다. 아마 북한이 왕조국가라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역사왜곡현장을 우리가 보고 있다. 북한과 다르려면 우리는 다양한 학설을 인정하고 어떻게 왜곡이 아닌, 진실만을 추구하는 내용들을 역사사실로 밝혀내는 가가 중요하다. 그래야 북한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 북한은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백프로 믿는다. 더 올려본다는 것이 북한 역사현장이다. 우리가 자유국가라는 것은 개인의 자율성, 다양성, 개성 이런 것을 존중하고 그것이 조화, 융화를 이루면서 사회가 발전한다. 당연히 개인의 입장에 따라서 역사관이 다르다는 것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고구려 초기역사도 조작되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고주몽 계루부 그 전에는 소노부가 왕을 계승한다. 이때가 서기전 37년 무렵이다. 그런데 주몽이 소노부를 몰아내고 왕이 된다. 그러고 나서 소노부 역사를 지워버린다. 고주몽이 왕위에 오른 때를 기원으로 삼는다. 그런데 태조왕 때 다시 태조왕을 시조로 삼고 그전 주몽이 건국했던 역사를 지운다. 소수림왕 때 주몽을 다시 복권시킨다. 주몽을 건국시조로 내세운다. 그리고 주몽왕 계와 태조왕 계를 결합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왕계를 만든다. 그 이전의 역사를 새로 복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왕 이전의 역사는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소수림왕 때 다시 쓰면서 나름대로 그 당시 관념으로 역사를 서술해서 나타나는 결과라고 얘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 교수는 고구려 초기역사도 소수림왕 때 조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일제식민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논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장이다. 일제식민사관은 소수림왕 이전을 정식국가로 보지 않는다. 소수림왕 때 와서야 고대국가로 발전했다고 한다. 전 교수가 고구려초기역사를 믿을 수 없다며 하는 말 중에서 ‘태조왕 이전의 역사는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는 표현이 있다. 이는 모본왕 때 중국 산서성 중심지 태원을 비롯하여 북평, 어양, 상곡을 정벌한 역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날 전 교수는 ‘골품제 하의 정치와 일상생활’을 주제로 강연했다. 성골과 진골이 하대신라를 어떻게 지배했고,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무엇이 지급되었는지 등에 관해서 자세히 알려 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관리들의 녹봉소개다. 일본이 서기642년경에 대화개신이라는 것을 해서 제도를 당나라 것으로 전면 개편했다고 했다. 개편된 등급에 따라 지급한 쌀 량을 소개했다. 그런데 당시 왜 관리들이 받은 쌀 량과 신라 관리들이 받은 쌀 량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왜가 많다. 일본 측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날 강좌에서도 지난번과 같이 비평문을 방청객들에게 나눠줬다. ‘수고했다’, ‘이것 누가 쓰는 것이냐’, ‘열심히 한다’ 등 덕담과 응원을 해주었다. 또 어떤 방청객은 지나가면서 따듯하게 팔을 잡아 주면서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 다음 강좌는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인사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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