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꼭 돌아갈 것이다, 내 어머니 조국에, 사랑하는 내 가족 품으로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 김련희입니다.

고향 땅,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눈이 멀어가는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제 얼굴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저를 평양으로 보내주세요.”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는 서기2017.08.15.에 일제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조명한 바 있다. 일제강제징용 피해자들 중 파악조차 안 되는 수많은 사람들은 서기1945.08.15.해방이 되었으나 끝내 그리운 고향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북으로는 러시아 사할린 섬에서부터 남으로는 남태평양 티니안 섬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침략전쟁지라면 안 끌려간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 중 숫자조차도 파악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리고 전후 전범으로 몰려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의 원혼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본지에서는 서기1948.에 가수 현인이 처음 부른 ‘고향만리’를 기사에 그대로 실었다.

이 노래는 정확하게 동남아시아 인도네시아 지역으로 끌려간 징용희생자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근현대사의 쓰라린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눈에 익은 너의 모습 꿈속에 보면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바닷가 저편에

고향산천 가는 길이 고향산천 가는 길이

절로 보이네”

한 조사기관에서 죽음을 앞둔 군인들에게 누가 가장 생각 나냐고 물었다. 그들은 대부분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래서 당연히 기독교 신을 부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간절하게 보고 싶고 부른 이름은? 엄마였다. 나를 낳아 이 세상에 보내주신 존재, 어머니가 죽음을 앞둔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의지 처였다. 위 노래에도 어머님 얼굴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인간은 아무리 강한 존재라고 해도 죽음의 공포가 몰려 올 때 결국 어머님 품에 안기고 싶은 나약한 어린애 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역만리 동남아시아 낯선 곳 밤하늘별을 보고 어머님 얼굴을 떠올렸을까. 꺼져가는 숨 속에서도 어머님 얼굴이 보이고 어머님과 살았던 고향 땅이 눈에 선하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고향 땅은 바닷가 저편에 있다. 저 수평선 너머로 고향산천 가는 길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지금도 이 같이 고향 땅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6.25동란 때 헤어진 이산가족일 수 도 있겠으나 아니다. 그녀는 불과 50전후로 보이는 여성이다. 20대 초반의 딸과 남편 그리고 부모가 있다.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며 가고 싶은 고향 땅은 강제징용희생자들처럼 이역만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예전 통일노래 중 하나에서 나오듯이 택시요금 5만원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북한 평양이다. 북한 평양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여러 해 동안 눈물로 호소하는 그녀의 이름은 김련희다. 김련희씨는 의사이며 가수이기도 한 어머니와 무용수로 있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음악에 많은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남편은 김책 대학교 교수다. 딸은 현재 장성해서 음식조리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 평양주민 김련희씨 책 <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출판기념회를 마치고 주요인사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가운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가 김련희씨.

서기2017.08.31. 서울 종로 기독교 회관에서 김련희씨 책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평양주민 김련희 송환 촉구모임’ 주최로 열린 출판기념 행사는 그동안 김련희씨를 송환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온 인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이종근 한국진보연대 조직위원장은 김련희 씨를 소개하면서 김련희씨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밀항도 하고 여권도 위조해 보고 간첩이라고 속여서 징역도 살았고 고향 가는 길이 절망스러워 칼로 손목을 그어 2번이나 자살시도도 해보았다고 했다. 2011.에 한국에 들어온 지 7년이 되었다. 이종근 위원장은 연이어 김련희씨에게 “생지옥 같은 7년이었겠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듯한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북녘 동포들에게도 전하고 기억 주시길 바란다.” 라고 요청했다. 이 위원장이 소개를 하는 가운데 그동안 김련희씨를 평양으로 송환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인사들이 송환을 추진해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 문대궐  목사가 김련희씨 송환운동을 한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먼저 국가정보원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김련희씨 송환을 위해 개인적 피해를 감수하며 노력해온 문대궐 목사가 말문을 열었다. 문 목사는 김련희씨가 광주항쟁 망월동 묘소를 참배하면서 평양시민 김련희라고 서명을 한 것을 눈여겨보고, 왜 ‘조선민주의 인민공화국 김련희’라고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련희씨는 그렇게 쓰면 싸우는 것 같고, (남과 북이)싸우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했다.

이어 김련희씨가 집에 돌아가기를 얼마나 소원하는지 자신의 기도얘기로 표현했다. 문 목사는 36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한 번도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잘 못하는 기도지만 김련희씨 송환을 위해서 했다면서 이번에는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줄 것을 믿는다며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2월 중순 쯤 문 목사에게 김련희씨가 찾아와 자신의 손을 잡고 “목사님 저 평양좀 데려다 주세요, 목사님 손잡으면 저 평양갈수 있어요” 라며 호소하는 것을 뿌리지 못했다며 돕게 된 사연을 풀어놓았다. 송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 대사관에 간 얘기도 들려주었다.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 한겨레신문 허재현 기자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갔는데 결국 허사가 되었다고 했다.

▲ 문 목사가 김련희씨를 뜨겁게 안아주고 있다. 문 목사는 딸 같은 김련희씨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7년째 눈물로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송환운동에 노력하고 있다. 이날 문 목사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김련희 자매를 한번 뜨겁게 안아주고 싶은데 되겠느냐'고 제안 했고, 김련희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겼다.

이어 김련희씨가 왜 반드시 북한 평양으로 다시 가야 하는지 상징성을 부여했다. 김련희씨가 다시 집으로 가게 되는 것은 분단을 치유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고 남북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북한체제는 그리 편하게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래도 이렇게 분단 상태로 살면 안 되고 70년이 넘게 싸우고 서로 미워하는 것은 이제 끝을 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호소했다. 이런 점에서 김련희 송환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어 권오헌 '민주화가족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양심수 명예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먼저 자신이 입고 온 양복이 북한산 소재로 만든 것이라며 남과 북이 싸우지 말고 동포형제로 하나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김련희씨 문제는 이미 개인차원의 문제를 넘어 국제사회로 옮겨지고 있다고 했다. 자유인권이라는 세계인민의 보편적인 문제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련희씨를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와 억류당하는 희생자로 보았다.

김련희씨가 남한으로 오게 된 사연을 들어보면 이런 주장도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김련희씨 주장에 의하면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갔는데 남한의 공작원들이 접근해서 남한 가면 돈 많이 벌 수 있으니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김련희씨는 이 말에 속아 남한도 중국처럼 왕래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돈 많이 벌어서 북한으로 다시 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남한에 와 보니 국가보안법이 있어 다시는 북한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남북통일이 되지 않는 한 합법적으로는 결코 북한에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것이고 또 하나의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북한이 싫어 자발적으로 탈북 하여 남한에 온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 권오헌 민가협 명예훼장이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다.

권오헌 민가협 회장은 이어 북한의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그는 누군가 자기를 치려고 하면 본능적으로 방어를 하게 되어 있다고 하며 눈이 가장 직관적으로 반응하며 눈을 감는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지금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대북한 압제에 대한 생존본능의 방어라고 평가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미국중심으로 돌아가는 국제사회와 대한민국은 북한을 무조건 핵전쟁을 하려는 위험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며 미국과 문재인 정부를 성토했다. 그러면서 한미는 오히려 5015라는 작전계획에 따라 을지훈련을 명분으로 북한을 치려는 전쟁연습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련희씨가 출판한 책은 남과 북의 대결과 반목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통일을 위한 교과서라고도 평가했다. 책은 남한을 깎아내리지도 않고 북한을 찬양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동포애를 바탕에 깔고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장경욱 변호사가 이어갔다.

장 변호사는 김련희씨를 처음 면회 갔는데 자기를 간첩이라고 소개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간첩은 아닌 것 같아서, 간첩조작으로 변호하려는데 이 구도가 실패작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다른 변호사의 주장대로 김련희씨가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속아서 들어온 것으로 변호해서 김련희씨에게 유리하게 되었다고 했다.

네 번째 이야기는 한겨레신문의 허재현 기자가 맡았다. 허 기자는 김련희씨를 취재하여 여론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허 기자는 자신이 김련희씨를 취재하면서 김련희씨 발언을 그대로 실어 피해를 주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취재 기사에 김련희씨가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대답을 한 기사를 낸 것이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조사를 지금도 받고 있는데 경북 경찰청 보안수사대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탓이니 조사를 중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여전히 엄혹한 시대를 살고 있다면서 국보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제2의 김련희는 또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이 법을 국회서 폐지, 개정 논의자체가 지금 나오지 않는데, 10년 전까지 만 하더라도 논의가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당시에는 지금 집권당이 공론화 했지만 지금은 아예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생활 10년을 하고 있지만 기자들도 이 국보법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출판된 김련희씨 책이 내년 평양에서도 나오고 또한 내년 10월 즘에는 평양에서 김련희씨와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로 마쳤다.

▲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종근 한국진보연대 조직위원장, 장경욱 민변 변호사, 최봉태 민변 변호사, 허재현 한겨레기자.

이 책을 낸 출판사측에서도 한마디 했다.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게 책을 쓰려고 했는데 김련희씨가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실어달라고 고집하면서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또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북한을 좀 더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대구에서 올라온 민변의 최봉태 변호사도 그간 김련희씨 송환운동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어 이번 나온 책이 통일을 위한 교과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행사의 주인공, 김련희씨가 나와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그녀는 지난 7년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도와준 남쪽 동포들에게 너무 많은 ‘민폐’를 끼쳤다며 평양가면 민폐의 대명사가 될 것이라며 웃음도 지었다.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는 고통 준다고 하는데 이렇게 심한 고통을 주시나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당신을 원망할 겁니다. 그랬는데요. 딸도 소중한데 그래도 더 소중한 게 부모님 같습니다.

제 어머님이 지금 실명할 것 같은데 단 1분이라도, 제 얼굴을 한순간이라도 보여 드리고 싶다. 제 얼굴을 보여드리고 실명해도 하면 좋겠다는 이 마음이 급해지구요. 여러분 앞에 서니 남녘에서의 7년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없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을 것이다. 따듯한 혈육의 정이 없었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이고 오래전에 이미 감옥에서 사라져버렸을 거다. 정말 두렵고 두려운데요. 나는 인복, 사랑복 타고 났다. 복이 많은 사람이다. 이제 제가 집에 가게 되면 하나의 대명사로 남을 것 같아요. 민폐의 대명사가 될 것이다. 민폐만 끼친 것 같고 너무 부담만 준 것 같고, 순간순간 마다. 너무 편하고 내가 가족과 함께 있나 내 집에 있나 착각할 정도로 이렇게 편하고 잘해주셨습니다.

▲ 서기2017.08.31.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북한평양주민 김련희씨 책<나는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김련희씨가 참석자로 부터 꽃다발을 받고 그동안 남한사회에서 생활했던 세월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저의 사연을 사심 없이 그대로 들어주고 믿어주고 세상 밖으로 저를 알려주신, 제 목소리를 내 도록 도와주신 장경욱 변호사님 허재현 기자님 최승호 피디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세상에 나가서 첫 걸음을 뗄 수 있게 손잡아 주시고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부모님처럼 언니처럼 동생처럼 따듯하게 안아주시는 그분들 감사드립니다. 북녘에는 부모님 딸 남편이 있지만 여기 남녘에는 수많은 부모님들 언니 오빠들 내 형제들, 제가 북에 가게 되면 이분들 너무 보고 싶어서, 달려오고 싶어서 어떡할까 참아낼 수 있을까 이게 제일 두렵습니다. 제가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고통스럽지 않게 빨리 통일이 되어서 여러분들도 저의 집 평양에 다니시고 저도 여러분들 집도 다시 올 수 있는 통일조국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자리를 빌러 저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준 남녘 동포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이 날에 행사에서는 김련희씨를 위한 노래도 울려 퍼졌다. ‘우리나라’ 악단 가수들이 불렀다. 피아노 반주와 기타 울림으로 시작된 노래는 김련희씨가 감옥에 있으면서 평양의 딸에게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내 딸아 고운 꿈꾸렴-

사랑하는 내 딸아

어둠이 진다고 무서워 마라

밤하늘에는 달도 별들이 있어

우리를 지켜 줄 테니 내 아가야

창가에 홀로 앉아

나를 부르는 너의 울음소리

바람타고 여기까지 날아와

이 어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데

바람아 나를 데려가 주렴

바람아 나를 데려가 주렴

우리 하나의 고운 꿈속에

사랑하는 나의 고향에

여기서 다시 현인의 ‘고향만리’를 떠올린다. 이역만리 일제강제징용으로 끌려간 동포의 한이 담겨있다. 일본군과 군속들 그리고 가족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가 와서 싣고 갔다. 그러나 나를 데려가는 배는 오지 않는다. 그래도 기다리련다.

“날이 새면 만나겠지 돌아가는 배

지난날 피에 맺힌 꿈에 조각을

바다위에 뿌리면서 나는 가리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으로”

▲ 노래패 '우리나라' 가 김련희씨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두번째 노래는 '나의살던 고향은' 이었고 모두 함께 불렀다.

이날 행사 주최 측에서는 김련희씨의 책 <나는 평양에 사는 대구시민입니다>를 김련희씨가 함께 하는 가운데 판매했다. 또 저녁시간임을 감안해서인지 떡과 과일 그리고 음료를 제공했다. ‘주권방송’등 언론들도 취재를 함께했다. 행사장은 거의 가득채운 시민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가 끝나고 김련희씨와 사진을 함께 찍는 시간을 가졌다. 수많은 인파가 서로 사진을 찍겠다고 나섰는데 이를 통해서 이미 김련희씨는 분단치유, 평화통일의 전도사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친일과 반공은 동전의 양면이다. 남한에서는 친일반공세력이 반공을 내세워 친일부역범죄를 묻어왔다. 반공을 이유로 분단은 더욱 고착되었고 72년이 넘도록 북한은 대화상대가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제 뒤틀린 이 비극의 시대가 종말로 치닫고 있다. 소모적인 이념대결, 반공구도를 과감하게 돌파하지 않으면 통일은 북으로부터 해일처럼 몰려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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