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성 호로도시 수중현이 갈석궁이라면 진시황은 물속에 궁을 지은 것이다.

 

곧 거짓말로 들통 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일삼는 강단식민사학계, 그들은 왜 이토록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그 대상이 역사를 아는 일부 각성된 역사학자가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들이기 때문이다.

 

서기2016년 “중국 요서 답사 토론회” 유감 (1) - 윤용구씨 편

필자는 작년에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에서 진시황은 산해관을 넘어간 일이 없음을 고증했다. 또 중국 당국과 국내 강단사학계에서 “진시황 행궁”이자 “갈석(산?)”의 소재지라고 주장하는 요령성 수중현의 유적지는 진시황과는 무관함을 밝힌바 있다. 얼마 후 동북아역사재단의 주선으로 서기2016.08.18.부터 국내 강단사학, 민족사학, 몇몇 신문사와 함께 중국 답사에 나섰다. 그리고 저녁에는 고대사 관련 전문가들과 “중국 요서 답사 토론회”를 가졌다. 첫째 날 토론회에서 같이 간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낙랑평양설’을 부정하면서 그 근거를 들었다.

“고대 요동(지금 요서 지역) 출신인 장통(張統)은 한반도는 구경도 못했다. 낙랑군과 낙랑 교군(僑郡)은 모두 고대 요동 내에 위치했으며 낙랑교군설이 한반도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증거는 못 된다.”

이 소장이 말하는 고대 요동은 현재 중국 하북성 난하 하류 동쪽의 노룡현, 창려현 갈석산 일대를 말한다. 이에 강단 사학자를 대표한 윤용구씨가 이곳이 당시에 물에 잠겨 있어서 낙랑군이 설치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학계 연구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한(前漢) 무제부터 후한(後漢) 말까지의 유적·유물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당시 크게 범람한 바닷물에 200년 정도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낙랑군이 이 지역에 설치됐을 수는 없다.”

이 내용은 필자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당시 같이 간 중앙, 세계, 동아, 조선일보가 전부 보란 듯이 기사화 된 내용이다. 이튿날 요령성 호로도시 수중현의 이른바 “갈석궁” 유적에서 이번에는 고고학자를 대표한 영남대학교 정인성씨가 진나라 강역 동쪽 끝에 갈석산이 있다는 민족사학계의 주장을 이렇게 반박했다.

“(이 ‘갈석궁 유적’에서) 진나라 궁궐에 쓰인 것과 비슷한 부재와 방식으로 만든 구조물이 확인됐다. (재야의 주장처럼 이 일대가 고조선 영역이었다면) 고조선 관련 유물이 나올 만도 한데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 측 주장을 따라 수중현 일대야말로 진정한 갈석산의 소재지라면서 갈석산이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는 역사기록조차 애써 부정했다. 참고로 수중현은 하북성 창려현에 현재 존재하는 갈석산 보다 훨씬 동쪽에 가 있다.

필자는 이게 정말 고고학자가 한 소리인가 싶어서 그 소리를 들은 귀를 의심했다. 고고학자가 삽질을 해서 유물을 찾을 생각을 해야지 지상에 남은 유물이 없다고 고조선 땅이 아니라고 단정을 내린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영토가 결정된다면 고고학자가 왜 필요한가. 물론 각각 역사학과 고고학을 대표한 윤용구씨나 정인성씨 두 사람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다.

▲ 중국학계가 내놓은 서기전 3세기 진시황이 지었다는 진신황 행궁 유적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아 당시에는 수중에 잠겨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도 고고학을 전공했다는 영남대학교 정인성 교수는 진시황의 행궁이 맞다고 한다. 모두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을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하기 위한 포석이다. 그러나 중국 정사 등 어떤 사료도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는 기록은 단 한개도 없다.

요령성 호로도시 수중현이 진시황의 갈석궁이 될 수 없는 증거들...

이날 요동의 차가운 8월 소나기를 맞으면서 필자는 황순종 선생과 함께 강단학자와 동행 기자들 앞에서 왜 수중현의 이 유적지가 갈석 행궁이 될 수 없는지에 관하여 5분이 넘도록 반론을 폈다. 반론 핵심은 아래와 같다.

①진나라가 수중현까지였다는 것은 진한대 유물을 근거로 한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②수중현은 평지여서 진시황, 한 무제가 “올랐다(登)”는 산지라는 중국 정사기록과 모순된다.

③역대 사서에서는 진시황, 한 무제가 “동쪽으로 발해를 굽어보았다”라고 적었으니 갈석산이든 갈석궁이든 간에 당연히 발해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수중현 유적은 발해의 ‘북쪽’에 있다.

④지난 2,000년 사이에 수중현을 갈석산 또는 갈석궁으로 소개한 문헌기록은 전혀 없었다.

⑤고고학적으로 100% 완벽해도 문헌적 뒷받침이 없는 주장은 공허한데 단순히 고고 유적, 유물에만 의존해서 수중현 유적지를 진시황의 갈석궁이고 진나라의 유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귀국 후 각 언론사가 기사화 한 내용은 ‘강단사학계 친화적인’ 편파왜곡 기사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반면에 재야측 주장에 대해서는 고작 한두 마디로 구색만 맞추었다. 그나마 세계일보에서는 수중현의 ‘갈석궁’이 문헌 속에 소개된 갈석산과는 방향이 정반대라고 한 필자의 반론을 실어 객관적인 입장을 지키려는 노력은 했다. 문제는 조선일보였다. 필자와 황순종 선생의 반론을 철저하게 은폐한 채 겨우 다음과 같은 기사만 보도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문성재 박사와 황순종씨는 이곳이 ‘진시황 행궁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와 황선생이 위의 근거들에 입각해서 장장 5분 넘게 제시한 반론은 단 한 마디도 기사화 하지 않은 것이다. 단지 재야 학자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반론권조차 철저하게 무시당해야 했다.

<문제의 조선일보 기사와 당시 편파보도 항의 댓글

- http://premium.chosun.com/…/h…/2016/08/22/2016082200446.html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명색이 대한민국의 대표 언론이고 객관적인 입장을 지키는 정론지라는 조선일보가 대놓고 강단사학을 비호하기로 작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자리를 빌어 작년 여름 “요서 답사 토론회”, 그리고 동행 기자들이 관련 보도에서 거의 기사화 하지 않은 필자의 반론 내용을 소상하게 공개하고 한중 양국 갱단 학자들의 강변에 반론을 펴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윤용구씨의 요서 200년 수몰설은 맹랑한 낭설에 불과하다...

윤용구씨는 작년에 “중국 학계의 연구 결과”라면서 요서지역이 200년 동안 수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는 낙랑군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 같은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지금까지 중국학자들은 요서지역 전체가 수몰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대를 전후하여 발생한 해일로 인하여 해수면이 상승함으로써 하북의 경동지역이 침수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윤용구씨의 거짓말과는 달리, 당시 해침현상이 일어난 곳은 극히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중국에서 해수에 의한 침수 즉 ‘해침’설이 제기된 것은 1960년대부터다. 당시 어떤 중국학자가 <해수 침수 문제를 재론한다(再談海侵)>라는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1963년 (필자가 관련 조사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유적유물과 묘장이 전국-전한대에 해당되고, 후한대의 것이 확실한 유적유물들은 보기 드물어서 천진의 북부인 계현 등지에 후한 대 유적유물이 대단히 풍부하게 발견되는 현상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조사(調査)>에서는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

“천진 교외, 황화(黃驊) 북부, 영하(寧河) 남부에서는 전국-전한대 유적유물만 보일 뿐 전한 말기와 후한 대 유적유물들은 보이지 않으며, 더 늦은 당송 대 유적유물만 나와서 연대적으로 연결되지 않아서 중간이 두드러진 단절현상이 존재한다.”

중국학자들이 증명하는 당시 침수가능지역들...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1960년대에 중국 하북지방의 경우 발해만 서안을 둘러싼 천진 동부, 황화 북부, 영하 남부 일대에서는 전한대의 유적, 유물들만 발굴되었다. 전한대 말기부터 후한-당송 대까지는 고고학적으로 공백상태에 있었다. 후한대의 유적, 유물들도 풍부하게 발견되는 천진 이북 각지의 상황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두드러진 “연대단절” 현상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윤용구씨가 본 논문은 1960년대 것이 다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해침설 자체가 고무줄이다. 침수는 됐다고 보지만 일시적인 침수인지 영구적인 침수인지가 불확실하고 학자마다 시기나 범위가 제각각이다.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거들 리가 없다. 그 사이에 게으른 국내 강단사학계는 1980년대 이후로 폐기되다시피 한 해침설 들먹이면서 요서는 없었다고 이상한 소리를 해대고 있다. 중국학자들이 얼마나 강단사학계를 기특하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다가 1970-80년대에 접어들어 고고 발굴기술이 진보하고 각종 토목공사가 빈번해지면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대진(大秦) 철로, 반산(盤山) 전기공장 등의 건설현장에서 전한과 후한을 아우르는 한대의 유적유물들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게다가 1960년대 연구에서는 연대적으로 단절현상이 보인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천진 동부, 영하 남부, 황화 북부 등 발해만을 접하고 있는 저지대에서조차 연대 판정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후한-위진대 유적유물, 묘장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기존의 통설은 완전히 무너졌다.

(2001년) 현재까지 발해만 서안에서 한대 유적유물이 100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천진시가 50여 곳, 황화시가 50여 곳 정도이며, 이미 발표된 고고자료와 문물파일들에 근거하더라도 전한 후기, 후한 초-후기는 물론이고 삼국(위)시대의 것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단속적으로 형성된 조개무지 층이 발견된 곳에서조차 대부분 전국-한대 유적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위진-당대의 유적유물들까지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 중국 <사기>, <전한서>등은 위 노란색 표시와 같이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순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발 높이도 당시 물에 잠길만하지 않다. 그런데도 윤용구씨는 당시 저 지역이 2백년동안 물에 잠겨 있었다고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다. 중국의 모든 사서는 저 지역이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씨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자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주장한 것이다.

윤용구씨가 침수되었다고 주장하는 지역은 결코 침수될 수 없는 지역으로 밝혀져...

그렇다면 현재는 바다에 침수가 되었더라도 경동의 남부 및 천진의 동쪽 등 발해만을 접하고 있는 평지에서만 부분적으로 침수가 발생했을 뿐이다. 경동지역에서 전역에 걸쳐 침수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중국 학계에서는 단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었던 셈이다. 가장 최근인 서기2001년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윤용구씨가 거짓말을 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가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했던 “200년” 침수는 전한대 말기부터 당송 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발생한 적이 없다. 중국 학계도 이미 그 같은 발상 자체가 “당시의 인식과 작업의 한계가 빚은 허상”이었다고 입장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를 진옹이라는 학자에게서 들어 본다. 그는 이 지역의 침수를 국부지역에서 발생하고 침수폭이 작은 단기적인 해수면 변동이어서 침수라는 표현조차 어울리지 않을 정도라고 단언했다.

초기의 연구에서조차 발해만을 접하고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동지역은 해수로 인한 침수의 피해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설사 발생했다 하더라도 일시적, 단기적인 것으로 그 피해가 충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미미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최종적으로 내렸다.

①1970년대부터 (해발 3-3.5 이상의) 발해만 서안에서 전한-후한-삼국(위)시대의 유적유물이 100개소가 넘는 곳에서 잇따라 발견됨

②과거의 통설처럼 떠들던 발해만 서안 고대 유적유물들에 있어서의 연대 단절현상은 “전혀 존재하지 않음(幷不存在)”

③발해만 서안에서 전한대 말기에 침수가 발생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임 (단, 고도 3m 이하 지역에서는 당연히 침수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음

고도로 따지면 침수가 되었을 곳은 요서가 아니라 수중현 지역...

그렇다면 발해만 서안은 어째서 해수의 침수현상이 발생했던 것일까. 그것은 해당 지역이 고도가 상당히 낮은 저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연구(硏究)>에 따르면, 경동지역의 지세로 볼 때, ‘4m’ 이내의 지역만 침수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의 침수는 거의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관내의 경동지역은 발해만을 접하고 있는 저지대만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이 해발 5m 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동안 고조선의 자리로 알려져 왔던 노룡이나 창려 같은 곳은 고도가 해발 20m가 넘는다. 그러니 이런 곳이 침수 피해를 당했을 리가 있는가. 윤용구씨가 얼마나 엄청난 거짓말을 기자들 앞에서 해댔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이 지역에서는 천진 등 해발 3m 지역에서조차 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해발이 3-3.5m로 상당히 지대가 낮은 이런 곳에서 고고 유적, 유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전한대는 물론 후한-위-진-남북조-수-당-송의 1,000여 년 동안 중국인들이 이 지역을 여전히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고,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역사무대에서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처럼 해변에 자리 잡은 이 저지대조차 해수에 침수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지대가 높은 지역은 그 당시에도 해침의 피해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는 말이다.

전 지역이 침수됐다는 소리도 거짓말인데 거기다 “200년 동안이나 전 지역이 침수돼 있었다.”라니 이 자들이 사기꾼이지 무슨 학자란 말인가. 하북지방의 지형, 연혁에 관한 원문 자료들과 위성사진을 토대로 자세하게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당시 수몰된 것은 지금의 천진(天津)지역과 당산(唐山) 이남 등 해발 2m도 채 되지 않는 일부 저지대뿐이었다. 반면에 해발 10m 이상의 창려(昌黎)․노룡(盧龍)․갈석산 등 경동의 2/3이 넘는 지역은 ‘해침’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엄연히 육지였다. 이것은 중국 학계도 인정하는 정설이다. 실제로 위성지도를 보면 갈석산은 해발이 695m, 창려현은 평균 16m, 노룡현은 20m여서 해발 2-2.5m 남짓의 천진지역․당산 이남보다 고도가 훨씬 높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강단사학자, 고고학자가 진시황의 ‘갈석궁 유적(?)’이라고 우기는 수중현의 표고는 발해만 서안을 둘러싸고 있는 천진 인근 지역처럼 해발이 2-4m에 불과하다.

▲ 위 사진은 위성지도이며 숫자는 해발고도를 나타낸다. 중국에서 갈석궁과 유적이 발견된 지역이라고 하는 곳이다.

위의 위성지도에서 “0”으로 표시된 곳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해발 0m 지점이고, “4” 또는 “5”로 표시된 곳들은 이른바 ‘갈석궁 유적’과 유물이 발굴된 지점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 위치가 해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윤용구씨 주장대로 해침이 정말 중국 북부에서 발생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해발 4-5m밖에 되지 않는 수중현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정상인가, 해발 15-20m가 넘는 노룡, 창려 등지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 정상인가.

학자들의 주장에는 네 편 내 편 따져 가면서 잣대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면서 우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해수면이라는 것은 발해이든 황해이든 동해이든 전부 동일한 고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다면 한대에 해수면이 높아지고 해침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해발 4-5m 지역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고 해발 15-20m 지역이 육지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결론 아닌가. 그럼에도 윤용구씨는 지금 해발 4-5m는 침수되지 않았고, 해발15-20m가 2백년간 침수되었다고 하고 있다.

과학적 결과로 보면 수중현 해발 4-5m가 침수된 상태다. 윤용구, 정인성 등 강단사학 주장대로 이곳이 진시황 행궁이었다면 진시황이 가지고 싶어 한 것이 해저 궁전 “용궁” 이라는 것인가. 그가 미치지 않은 이상 집채만 한 파도가 시시각각 덮쳐 오고 수시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개펄에 건축물, 그것도 황제의 거대한 행궁을 조성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고고학을 들이대기도 전에 건축학․지형학․해양학적으로 이미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따져본다면 수중현 ‘갈석궁 유적’에서 발견되고 지금 국내외 학자들이 한 결같이 진시황 ‘갈석궁 유적’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유물․유적들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 자리에 존재하려야 존재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 학계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국내 강단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 와당․벽돌․도기 등의 유물들도, 그 진위의 여부는 둘째 치고, 최근에 누군가에 의하여 타지에서 반입된 후 그 자리에 새로 ‘세팅’되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그리고 위의 모든 논거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윤용구, 정인성 두 사람이 작년에 거론한 이른바 ‘해침현상’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해침설’을 중요한 논거로 들먹인 윤용구씨는 자신이 근거로 내세운 그 주장이 자신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라면 중국의 어느 학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근거로 어떤 상황에서 한 소리인지 분명하게 해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철저하게 사실만을 근거로 삼아야 할 학자가 허무맹랑한 낭설로 그 자리에 동석했던 수십 명의 학자, 기자, 공무원들을 우롱했다는 지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글: 문성재(중문학 박사) 저서: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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