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쟁의 선봉, 대종교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읽는다.

 

대종교 환국71주년기념 학술대회

백두산 앞뒤 뜰에 퍼진 겨레는

오천년 뿌리박은 깨끗한 핏줄

빚어낸 불함문화 아름다우니

이상은 홍익인간 그 아니 큰가

-대종교 정열모가 쓴 홍익대학 학보 창간호에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정체성正體性(identity)을 추구한다. 정체성은 개성 또는 자기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자존감으로써 한세상 살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면서부터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기만의 모양새를 갖추어 나간다. 거의 자기가 태어난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서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그래서 정체성인 자존감이 사라지거나 상처를 입을 경우 자포자기나 자살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개인이 모인 것이 사회고 국가라는 공동체다. 그리고 민족이다. 국가나 민족 차원의 정체성은 국학으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국학은 여러 학문으로 짜여 있다. 종교와 역사가 대표적이다.

서기19세기말 유교 성리학 질서로 5백년을 지탱해온 소중화 조선이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왕조국가의 말기적 증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통상의 말기적 증상인 부패와 사회모순에서 소중화 조선 정권도 비껴 갈 수 없었다. 이 때 허물어져가는 집을 고쳐서 쓸 것이냐, 아예 모두 허물어 버리고 새집을 지을 것 이냐를 두고 다투었다. 고쳐서 쓰자는 것이 복벽주의고 새로 짓자는 것이 개벽주의다. 소중화를 더욱 굳히자고 일어난 인물들이 있었는데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일으킨 의병투쟁도 이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결코 민족이나 백성을 위해서 일으킨 것이 아니다. 나중에 나라가 망하고 독립투쟁을 하는데 소중화 왕조를 다시 세우자고 하는 것이 복벽주의인데 이들의 의병투쟁과 근본적으로 같다. 이들은 나라 정체성을 소중화에 두었다.

반면에 이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도 터져 나왔다. 동학 천도교와 증산 계열의 보천교, 나철의 대종교가 대표적이다. 천도교의 경우 수운 최제우의 사상이 바탕이 된 동학농민전쟁과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주도한 3.1만세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엿볼 수 있다.

보천교는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주로 독립투쟁 자금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감지한 조선총독부는 교주 차경석이 죽자마자 정읍에 본부를 두고 있던 보천교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전十日殿을 허물어 버리고 보천교도 해체해 버린다.

▲ 북로군정서에서 사용한 태극기와 소총들. 대종교는 제2대 교주 무원 김교헌이 서기1914년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긴다. 이후 군관학교를 운영하며 중광단重光團을 결성하고 이를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조직한다. 서기1920. 10. 백포 서일徐一이 총재로 이끄는 가운데 김좌진, 이범석 등의 북로군정서가 화룡현 청산리지역에서 일본군 1개 연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이룬다.

대종교는 앞의 두 종교처럼 교주가 신과 접신하는 것과 같은 과정을 거쳐 새롭게 만든 종교가 아니다. 없었던 것을 창조하지 않았다. 역사적 존재인 단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중화 조선정권이 말살한 우리 원형을 복원하여 이를 토대로 새로운 세상을 모색했다. 유교 성리학이라는 남 것으로 살아보니 안하니 만 못하다는 깨달음 속에서 원래 우리 것을 가지고 변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일항쟁기 대종교의 파급력이 다른 어떤 민족종교세력보다 강하고 지대했는지도 모른다. 나무가 부리가 깊을수록 바람에 흔들림이 적듯이 민족사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단군에 뿌리박은 대종교는 적어도 5천년 가까운 역사의식으로 무장하여 대일항쟁에 나섰다.

정체성이 이렇게 오래되고 깊었기 때문이었는지 일제 말까지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던 세력이 대종교였다. 사상전인 역사전쟁과 무력전쟁을 같이 벌였다. 사상전에서는 대종교 2대 교주인 무원 김교헌의 신단실기 신단민사를 시작으로 백암 박은식이 한국통사로,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로, 위당 정인보가 조선사 연구 등으로 일제 식민사관과 맞서 싸웠다. 모두 대종교인이다. 무력전으로는 서일이 총재로 있던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이 이끈 청산리 대첩이 대표적이다.

▲ 일제침략기 개신교회의 하나인 '대구신졍장로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볼 때 신사참배와 일제를 찬양하는 순서를 먼저 진행했다. 사진은 위 교회의 서기1943.04.11.자 주보인데, 모두 기립해서 국가를 봉창한다고 써있다. 여기서 국가는 일본 기미가요를 말한다. 그리고 궁성요배를 하도록 되어 있다. 이어 대동아전쟁을 이기도록 묵도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두 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 교회는 황국신민서사를 성인용과 어린이용으로 나누어 불렀다. 성인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련다. 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련다(출처: http://m.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623)."  이렇게 외래종교인 한국교회가 일본제국주의에 편승하여 매국행위에 여념이 없을 때, 만주에서는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종교 간부들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간부10명이 죽고 나머지도 수십 년 형을 선고 받고 액화감옥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반면에 민중구제 지상천국을 만들겠다고 이 땅에 들어온 교회세력은 일제침략전쟁에 적극협조하며 일본인이 되자고 적극 선전, 선동하고 다녔다. 예배드릴 때 ‘기미가요’를 부르고 일왕의 궁성이 있는 동경, 동쪽을 향하여 90도 절을 했다. 교회출입문 조차도 동쪽으로 일부러 내기도 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왜색불교로 개종해서 결혼한 왜색풍의 승려들이 전국 사찰을 장악하고 친일에 열을 올렸다. 한 친일승려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사명대사 비를 일경에 고발하고 비를 네 조각내서 밟고 다니도록 했다. 해방 후 친일불교청산하자는 운동이 일었는데 조계종이 앞장섰다. 현재 북한산 아래 도선사에서 마지막을 보낸 청담대종사가 조계종 수장으로서 불교정풍운동을 주도했다. 왜색불교의 잔재, 대처승종단과 싸워서 한국불교의 원래 모습을 대체적으로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친일청산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는 게 일반론이다. 그래서 인지 단군부정, 제사부정 등 반민족적이고 부정, 부패와 외세 의존적 행태를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도 지난 이명박근혜 친일숭미정권 때 급속도로 세속화하여 한국교회 못지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평이다.

▲ 사진 왼쪽부터 윤일병, 조완구, 윤세복, 김승학. 윤세복은 대종교 3대 지도자로서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서 살아남아 해방 후 대종교를 재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대종교는 이러한 외래 종교가 대일항쟁기에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이 땅의 주인인 단군을 시조로 모신 주인종교다운 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은 주인이 지키게 되어 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기 때문에 소극적이거나 관심이 없다. 자기에게 더 잘해주는 자를 새 주인으로 모시면 그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대종교와 기독교, 불교 등 외래 종교가 대일항쟁기에 보여준 행태가 극명하게 대비된다. 대종교는 주인으로 살았고 외래종교는 종으로 살았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다. 외래 사상인 유교 성리학으로 무장한 집배세력은 다 도망갔다. 토속종교에 깊이 뿌리박은 민초들이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이 땅의 주인임을 드러냈다.

이 같은 대종교 실체를 보다 잘 알 수 있는 행사가 지난 서기2017.08.14.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후원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광복이후 대종교 환국과 한국현대사’라는 주제로 대종교 환국 제71주년 기념학술회의 형식을 띄었다. 이날 학술회의는 대종교 연구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대종교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과 투쟁의 역사를 듣는 시간이기도 했다.

인하대학교 서영대 교수가 사회를 맡은 가운데 진행된 학술회의에는 모두 다섯 명의 발제자가 나서서 대종교 역사를 증언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영훈 박사가 ‘대종교와 한국 근현대’를 맡았다. 이어 한국외국어대학교 이숙화 박사가 ‘환국직전의 대종교’를 ‘임오교변’을 중심으로 발표하였다. 고병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해방 이후 대종교의 환국과 교단 재건’에 대하여 심도 있는 발표를 선보였다. 박용규 고대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환국 이후 대종교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상세하게 전했다. 마지막으로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은 ‘대종교 환국의 종교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날 발표에서 특히 주목을 끈 부분은 정영훈 박사와 박용규 연구교수의 발표였다. 정영훈 박사는 그동안 대종교인으로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근현대사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특히 해방 후 남북분단과 6.25전쟁 과정에서 북에 활동한 김두봉이다. 김두봉은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과 북조선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학글학자 주시경의 영향으로 대종교에 입도한 후 대종교 1대 교주 홍암 나철이 구월산에 들어가 자결할 때 곁에서 모신 인물임이 드러났다.

박용규 교수는 이날 발표에서 대종교에서 배출한 역사학자들의 투쟁과 이와 반대에 서 있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이병도를 대조하여 주목을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살아남은 대종교의 민족사학자 안재홍과 정인보가 처음에 우리나라 국학과 사상계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기간에 납북되어 식민사학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우리 역사학계를 이병도가 키워놓은 세력이 지배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일제식민사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숙화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는 일제 말기 대종교가 어떻게 일제에 의해 극악한 탄압을 받았는지 소개했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가장 큰 세력으로 대종교를 지목했다고 한다. 일제의 신도와 반대되는 단군을 중심으로 독립투쟁하는 세력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는 지하로 숨어든 대종교를 합법화 시킨다는 명분으로 양지로 끌어내서 임오교변으로 대변되는 사건을 일으켜 대종교를 말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고병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는 해방공간에서 대종교를 재건하는 노력들을 소개했다. 고병철 박사에 따르면 해방공간에서 대종교는 활발한 재건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고 했다. 성제 이시형이 부통령을 했고 안호상이 초대 문교부 장관을 맡아 제도적으로도 여러 성과를 냈다. 대표적인 것이 홍익대학교 설립이다. 단군과 홍익인간사상을 토대로 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또한 개천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전국 주요 지역에 단군전을 건립하고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에서는 주기적으로 행사를 거행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의 외면과 이념투쟁 이에 따른 국가보안법 제정 그리고 대종교 주요 인사들의 납북으로 쇠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대종교의 수행과 종교적인 면은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장이 소개했다. 대종교는 하느님 신앙에 바탕을 두고 수행을 하는 종교라고 했다. 하느님은 우리역사의 시작부터 신앙해온 존재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하느님 용어가 과거역사에서 사용된 사례를 소개했다. 또한 수행도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라고 했는데 <삼일신고>에 나오는 ‘지감’, ‘조식’, ‘금촉’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대종교의 핵심 이념인 홍익인간 사상이 우리 교유의 이념으로 자리매김 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반영되어 우리 교육법에는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이 명시되어 있다. 이날 학술회의는 72주년 광복절과 연계해서 진행되었는데 일제강제징용에 끌려간 원혼들을 모셔오는 행사에 대종교도 참여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강제징용희생자 유해 봉환을 주도한 일본 동경의 국평사國平寺, 주지 윤벽암尹碧巖스님도 참석해서 축하를 했다.

▲ 이날 대종교 환국71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는 인하대학교 서영대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대종교 역사를 보면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 같다. 소중화 조선이 문들 닫은 자리에 우리의 정신과 사상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틈도 없이 외세가 낚아챘다. 일제가 이러한 기회를 빼앗아 가버렸다. 고려가 외래 유교 성리학 세력에게 나라를 넘겨 준 후, 소중화 조선말 우리 고유 정신과 사상으로 나라를 세우려고 했으나 일제에 의해서 좌절된 것이다. 해방 후에 다시 이러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실패하고 만다. 이 땅에 주둔한 미국군이 대종교를 비롯한 자주세력의 염원을 꺾어버렸다. 대신에 기독교로 대표되는 이승만과 소중화 조선 지배세력 출신의 친일부역자들에게 대한민국을 내 주었기 때문이다.

독립전쟁에 투신한 독립투사와 광복군 세력이 주도하지 못한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 풀려난 지 72년이 지나고 있지만 이승만과 친일부역자들의 손아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역사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좌파우파’, ‘종북좌파’의 이념 구도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의 후신인 국가보안법에 의해 친일종미세력의 포로가 되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며 여전히 해방공간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식이 해방정국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자존감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속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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