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신주의에 코박고 사느라 오늘 우리를 있게 한 역사유적 나 몰라라 ...

미사협 바른역사 전국순회 강연 당진 편

동학농민혁명, 식민사관에 따라 축소왜곡된 채 알려져왔다...

동학농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한 동아시아 전쟁의 한 축이었다...

끝까지 조선총독부 사관 전파에 광분하는 <한겨레21>과 한국고대사학회....

고구려와 발해는 동아시아 제국, 중국 침략야욕을 분쇄하는 길은,

바른역사 복원과 이를 통한 자존감 회복...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가 지난해부터 전국순회 바른역사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도 1월부터 시작하여 벌써 8번째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 달에는 당진에서 진행했다. 미사협의 이러한 역사광복투쟁에 맞서 조선총독부사관을 추종하는 강단식민사학계가 올해에도 지난해에 이어 역사 강좌를 펼치고 있다. 전반기에는 경주에서 실시하더니 하반기에는 김해국립박물관에서 계획하고 수강시민을 모집하고 있다. 식민사학의 소굴이라고 비판받는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연세대 하일식 교수)가 주도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지난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전후반기 총24회에 걸쳐 반도식민사관을 퍼뜨렸는데 올해에도 반복하고 있다. 식민사관에 비판적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낙마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인 한국고대사학회의 망국적 조선총독부사관 살포행위가 언제까지 진행될 것인지 지켜 볼 것이다.

미사협 바른역사 순회강연 당진 편에서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김홍신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 손윤 미사협 공동대표가 강연을 맡았다.

이날 강연에는 세 번째 강사로 나선 손윤 의암 손병희 기념사업회 이사장에게 눈길이 쏠렸다. 당진시민들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 강연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동학이다.

손윤 이사장은 이날 동학을 중심으로 강연했다. 손윤 이사장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동학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동학하면 동학농민혁명이 떠오르고 거기에 전봉준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나 손 이사장이 보는 동학혁명은 동학 지도부가 중심이 된다. 최시형과 손병희가 동학농민전쟁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동학이 총 기포(봉기)한 날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서기1894.09.18.이 아니다. 이 보다 훨씬 빠른 서기1894.04.06.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러 들어온 일본군의 국내 침탈일이 훨씬 앞당겨진다. 통상 서기1894.06.20.에 일본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는다. 국내 상황을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동학농민군 학살에 나섰다고 가르쳐 왔다.

▲ 손윤 의암 손병희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동학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그는 3.1 혁명은 동학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손 이사장이 밝혀낸 것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미 이해 이른 봄에 국내에 들어와서 동학혁명군을 학살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교수 최시형은 앉아서 죽을 수 없다며 동학군 총 기포령을 내린다. 이때가 서기1894.04.06.인데 그 전에 이미 여러 곳에서 지역단위별로 기포가 있었다. 충북 옥천, 보은,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기포했다. 처음 이 지역에서 기포한 것이 서기1894.03.08.이다. 이어 전북 정읍에서 서기1894.03.20.에 기포했다. 최시형이 동학농민군 대통령이 되고 그 밑에 대접주들이 포진해 있었다. 손병희는 경기, 충청 대접주였고 백범 김구는 황해도 접주였다고 한다. 전라도 지역은 북도에 손화중, 남쪽에 김개남이 있었다. 전봉준은 오히려 그 밑에 있었다고 한다.

최신 무라다 소총과 캐틀링 기관포로 무장한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 동학농민군이 갖고 있는 화기라고 해봐야 화승총이 다였다. 나머지는 칼, 창, 농기구 등에 지나지 않았다. 화승총은 1백보가 최대사거리인데 비해 일본군 소총은 5백보라고 했다. 일본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는 말이 여기에 나왔다. 당시 일본군이 남겨놓은 일기를 보면 일본군 한 사람당 동학농민군 3백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 일본군 병사는 이렇게 일방적인 학살이 이루어지자 양심의 죄책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서기1894.10.27. 인천에서 교신한 일본군이 남긴 진중일기를 보면 ‘카라카미 소로쿠라’는 전장의 부대장이 지휘부에 보고를 하면서 동학당을 많이 잡아 놓았는데 어떻게 할까라고 묻는다. 이에 지휘부에서는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격을 요하고 이제부터 모조리 살육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에게 산하를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여기에 관군도 가세했다.

진압된 후 동학농민군 대통령인 최시형이 처형된다.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처형판결을 내린 자가 기가 막히다. 동학농민혁명의 불을 댕긴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이 승진하여 중앙의 고위직에 있다가 판사로 나와 최시형을 처형한 것이다. 이뿐 만이 아니다. 고종은 동학농민군을 학살, 진압한 일본군 미나미 대대장을 경복궁으로 불러 노고를 치하한다며 잔치까지 벌여주었다. 고종에게는 동학농민군이 나라를 뒤엎을 반역도들에 불과했기 때문이리라.

▲ 박갑대 선생(경남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이 이 지역 고성산성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히 학살된 동학농민군을 애도하는, 전해오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왜놈장수 목을 베어 그대 원수 갚아주마, 고시랑 고시랑 고시랑 당에 흐느껴 우는 우리 님아, 밤새도록 슬피 울어 이내 간장 다 녹인다, 고성산성 소쩍새는 우리 님의 넋이런가" -한국방송, 역사스페셜 서기2006.09.01. ‘동학군 수괴’ 유골 왜 일본에서 발견되었나-

동학혁명의 중심에 서 있던 손병희는 피신을 거듭하다가 충남 당진 수성동 띠울 마을 민간에 숨어든다. 이날 손윤 이사장은 이 부분을 강조했다. 손병희는 이 지역 동학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 집에서 약 1년 1개월 여간 은신하면서 재기를 도모한다. 손윤 이사장에 따르면 손병희는 이때 동학농민혁명이 무력으로 진압되어 무력으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비폭력방법으로 혁명을 다시 꿈꾼다. 그것이 3.1혁명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이 띠울 마을 고택은 현재 택지개발지로 수용되어 헐릴 위기에 있다. 손윤 이사장은 이 고택은 우리 근대역사의 획을 그은 인물이 거처한 곳이기 때문에 없애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안희정 충남지사에게도 이 같은 사실을 알려 교육현장으로 활용하라고 촉구했다고 했다. 이곳이 중학교 부지로 들어가는데 학교 한쪽에 보존하여 학생들에게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 같으면 벌써 유서 깊은 사적지로 보존해서 국민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었을 것이다.

▲ 이 집을 떠난 마지막 주인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듯이 대문 밖으로 자물쇠를 채워놓았다. 오른쪽은 이 집의 아래채 부엌이다. 왼쪽은 땔감으로 쌓아놓은 솔가루다.

강연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의 안내로 수성동 띠울 마을에 있는 고택 현장을 찾았다. 오래도록 폐허가 된 집이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마당에는 무릎이상 까지 차오르는 풀로 가득했다. 안방에는 달력이 걸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살던 사람이 남겨놓은 것이었다. 서기2000. 달력인데 10월이었다. 지금부터 17년 전 10월에 마지막 주인이 이 집을 놓고 떠난 것이다. 벽에는 네모난 시계도 있었는데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루는 온전했고 건넌방은 바닥이 오랜 세월을 머금은 때 묻은 판자로 되어 있었는데 가운데는 판자가 가라안자 구멍이 나 있었다. 벽은 벽지가 오래되어 떨어져 너울 거렸다. 벽지는 이집 역사를 말없이 보여주었다.

▲ 충남 당진시 수성리 띠울 마을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 선생이 머물던 집. 손병희 선생은 이 집에서 약 1년간 머물면서 제2 동학혁명을 구상한다. 그것은 3.1만세혁명으로 나타난다.

가장 안쪽에 붙어있는 벽지는 신문이었다. 동아일보였다. 아마 벽 바탕지로 쓴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신문 날짜를 보는 순간 숨을 멎을 뻔했다. 소화昭和 4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화 4년이면 조선총독부시절 일제침략기다. 서기로 환산해 보니 서기1929년쯤이다. 이 때 이 집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손병희가 머물렀다는 서기1898.경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집을 안내한 김학로 소장에 의하면 이 집이 약 150년 되었다고 했다. 이 집은 사방으로 작은 채로 이루져 있었다. 안채 정면에는 손님맞이하는 사랑채로 보이는 아래채가 있었고 오른쪽 채도 사람이 머무는 집칸처럼 보였고 왼쪽 채는 생활도구와 농사를 위해 도구를 보관하는 곳으로 보였다. 아래채는 부엌이 딸려있고 옆에 대문이 있어 바깥으로 통했다.

▲ 이 집 안채 건넌방 벽에 벽 바닥지로 붙어 있던 신문지. 동아일보인데 소화4년으로 새겨져 있다. 서기1929년이다. 오래 되어 흐물 거릴정도였다.

안채 부엌이나 아래채 부엌에는 땔감으로 긁어모은 솔가루가 가득 쌓여 있었다. 또한 아래채 처마 밑에는 수백 장이 족히 되는 연탄이 허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색 바랜 상태로 쌓여 있었다. 대문에는 바깥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떠난 집주인은 언제라도 다시 와서 살고자 그렇게 자물쇠를 채워놓고 간 것이리라. 마당과 마루에는 풀과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이끈 인물이 머물다간 집이 쓰러져 가고 있었다. 물신주의의 노예가 되어 개발논리에 따라 영리와 사리사욕에 파묻혀 사는 단군의 자손, 대한민국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이날 순회강연 강사로 나선 이덕일 소장은 매국사학이 어떻게 나라를 좀먹는지 한국고대사학회(조선총독부식민사학)가 주축이 되어 저질러 놓은 역사범죄행위를 고발했다. 이덕일 소장의 강연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식민사학은 중국 식민기관,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다. 그 근거중의 하나가 열수가 평양 대동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열수는 중국 사서에 분명히 요동에 있다고 한다. 열수가 대동강이라고 하려면 증거를 대야 하는데 근거를 대지 않고 있다. 또한 험독현은 중국식민지 한사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중국 사료에는 분명히 요동으로 나온다. 그래서 중국 동북공정지도에서도 현재 요동 안산시로 그려놓고 있다. 독립투사들은 거의가 역사에도 정통했는데 모두 한사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식민사학계는 북한에 그려놓고 있다. 더구나 식민사학계는 동북아역사지도를 만들면서 서기4세기에도 백제와 신라, 가야를 그려 넣지 않았다. 이때까지 이 나라들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일본역사는 크게 그려 놨다. 서기3세기 일본지도를 보면 이미 일본열도 대부분을 왜가 차지한 것으로 그려놓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결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일본 고대사에 정통한 고 최재석 고려대 교수가 그린 지도를 보면 확인된다. 일본은 6세기가 되어도 철을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 식민사학계는 이때 일본은 백제와 대등한 군사강국이라고 그려놓고 있다. 그 이유는 백제가 철기를 당시 왜에 갖다 바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 있을 수 없는 역사왜곡이다. 한국과 일본 할 것 없이 고고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열도로 일방적으로 건너간 역사라고 한다. 유적 유물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시절에는 탄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총독부사관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해방된 지 72년이 지나고 있는 이제까지 총독부사관을 추종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국내 식민사학계의 역사매국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이날 이 소장은 특히 <한겨레21>의 거듭되는 비상식적인 단군과 민족 부정 그리고 조선총독부사관 전파행위를 질타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사카와 재단 등 일본극우자금이 국내에 들어와 움직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종대 호사타 유지교수의 얘기를 들어보면 무슨 이야기 인지 이해가 간다. 호사카 교수에 의하면 일본극우자금이 들어와 활동하면서 새로운 친일파들이 대폭 늘어났다고 한다. 식민사학계는 동북아역사지도를 그리면서 독도를 일관되게 제거했는데 이 일본극우자금과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지도 책임자로 알려진 동북아역사재단 배성준은 독도를 다룬 논문에서 “독도문제가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과연 일본의 음흉한 음모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일본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한 것이다. 일본극우자금이 연구비 명목으로 들어왔다고 알려진 시기에 한국에서 일본유학열풍이 대대적으로 불었는데 이해가 간다.

독도는 일본에서도 명치정권에서 이미 본방과 관계없다고 최고위층인 태정관이 결론 내렸다. 그런데도 일본극우파의 독도침략정책에 동조하고 있다.」

이날 이덕일 소장은 특히 「한겨레21」의 매국역사행위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본에 3년간 특파원으로 가 있던 인물이 이 잡지의 편집장인데, 단군과 민족을 사이비 역사로 매도하고 있다고 했다. 아주 작정하고 연속으로 조선총독부사관을 싣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짓은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분노했다. 최남선의 예를 들었다. 최남선은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했는데 나중에 해방 후 다른 변절행위는 인정하지만 단군을 부정했다고 하는 것은 억울한 누명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겨레21」이 일제보다 더 악질적으로 우리역사를 매도하고 있는데, 일제조선총독부 식민사학자들과 같은 소리를 하는데 서도 또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일제식민사학자 나가미치요나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단군을 불교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 역사로 보지 않았는데, 「한겨레21」이 하는 짓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당시나 지금이나 단군은 신으로 신앙하는 존재가 아니라 민족의 조상으로 섬겨온 것인데, 전형적인 종교 신으로 왜곡해서 신화로 몰아가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최근 더욱 거세게 반발하는 강단식민사학계의 매국사학을 한방에 날려 버릴 책이 나왔다면서 소개했다. <매국의 역사학 그들만의 세상>이 서점에 진열되기도 전에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단식민사학자들이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을 위한 역사학을 할 것이라고 믿으면 큰일 난다고 했다.

김홍신 원장이 호소력 있는 강연을 이어갔다.

김홍신 원장은 소설가인데 박근혜정권에서 ‘블랙리스트(제거명단)’에 올라가 있었다는 말로 시작했다. <단 한 번의 사랑>이라는 소설책이 발단이 되었다고 했다. 이 책에 친일파를 실명으로 거론하고 독립투사는 못 먹고 친일파는 잘 먹고 잘산다고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일파를 비판하면 사방에서 칼날을 겨누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가 민족을 알아야 하는 이유를 들었다. 우리 조상들은 죽어 땅속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우리 몸속에 살아 있는 것이니 민족은 우리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했다. 우리 민족을 그래서 바로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중국에서 우리를 동이족이라고 말하는데 흔히 오랑캐라고 알려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이족을 새롭게 풀이했다. 동이족은 동쪽에서 큰 활을 잘 쏘는 민족인데 군자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군자는 활을 잘 쏘아서 먹을 것을 주고 큰 덕을 베풀어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어 중국의 역사왜곡 사례를 들어 우리역사가 어떻게 잘려나가고 왜곡되었는지 밝혀나갔다. 한 예로 고구려 연개소문 대막리지를 들었다. 연개소문이 중국기록에는 천개소문으로 성이 바뀌어 나온다고 했다. 당나라를 세운 자의 이름이 이연인데 그 이름과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또한 발해를 세운 대조영을 중국 사료에서는 다른 종이라고 하여 말갈족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왜곡이라고 했다.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왕족이라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족이 무수히 늘어나자 직계 왕가만 원래 성을 유지하고 다른 왕족은 별도로 성을 내려주어 혈통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조영이 대 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해가 문을 닫고 왕족들이 고려에 들어왔는데 고려에서는 다시 태 씨를 내려주어 지금 우리나라에 대조영의 후손이 태 씨로 남아있다고 했다.

▲ 김홍신 민주시민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발해의 기상을 자세히 소개했다. 발해인들이 이끈 위대한 역사을 오늘날 되살려 중국 동북공정을 극복하자고 역설했다.

김홍신 원장은 고구려의 기상과 저력을 높이 샀다. 고구려가 문을 닫은 뒤에 끌려간 후손 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사례로 들었다. 티베트에 토번제국이 있었는데 당나라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속국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딸을 시집보내기 까지 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토번제국을 처음 정복한 사람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고선지 장군이라고 했다. 이어 중국 심장부에 고구려 후손 이정기가 왕국을 세웠다고 했다. 발해도 중국 산둥 반도를 쳐들어가 차지했고 북경 근처까지 점령한 사실을 밝혔다.

김홍신 원장은 이러한 저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지금 중국 동북공정과 중국 국력신장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이를 극복하려면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하는데 이는 우리역사를 바로 복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잃어버린 자존감,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사대모화 및 식민사관을 걷어내는 길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통일한국을 이루면 중국의 도전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날 강연회에는 김홍장 당진 시장도 참석해서 눈길을 끌었다. 보통 강연회 지역의 자치단체장이 인사말을 하러 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날 강연회에는 지방자치단체장 까지 관심을 갖고 참석해서 강연 내내 자리를 뜨지 않고 거의 다 방청했다. 이외에 당진문화원장, 서해안신문회장 등이 참석해서 큰 관심을 보였다. 이날 강연회에는 당진상공회의소 대강당을 대 채우고 모자라 뒤에까지 의자를 추가로 배치할 정도로 시민들이 많이 몰려 왔다. 다음 미사협 바른 역사 순회강연은 인천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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