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2주년을 무색케 하는 일제침략이 남겨놓은 깊은 상처들, 세계곳곳에 남아 있다.

 

날이 새면 만나겠지 돌아가는 배

지난날 피에 맺힌 피에 조각들

바다위에 뿌리면서 나는 가리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으로

 

어릴 적 들은 한 노래가 아직도 가슴속 깊이 울린다. 흔히 유행가라고 하는 것이다. 간절함을 넘어서 절규에 가까운 이 노래는 꿈같은 어릴 적 추억 속으로 끌고 간다. 그 때는 이 노래가 무슨 사연을 담고 있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냥 말 할 수 없는 무엇으로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그런데 이 노래가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쓰라린 비극의 현장을 담고 있음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서기2017.08.03.부터 08.07.까지 일본 구주지역 역사유적을 답사하고 있었다. 일단의 동행자들과 함께 4박5일 동안의 역사기행이었다. 일본 상고대사 유적에서부터 일제침략기까지 아우르는 답사였다. 이 여정에 군함도 답사도 예정되어 있었다. 결국 태풍 노루 때문에 파도가 높아 위험해서 군함도 가는 일정은 취소되었다. 대신 '아리타'의 도자기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군함도와 여기에 끌려간 우리 노동자들에 대한 얘기로 다소 긴 이동시간을 때웠다.

그런데 같이 간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가 강제징용은 일제침략지 전역에 걸쳐서 벌어졌다면서 동남아시아로 끌려간 노동자들도 기억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가수 현인이 부른 ‘고향만리’라는 노래를 아느냐며 일행에게 이 노래가 나온 사연을 상기시켰다. 동행한 일행이 잘 모르는 듯하자, 직접 찾아서 틀어 주었다. 그때서야 '아 그 노래라'며 호응했다. 아주 이국적인 전주곡으로 시작되는 노래에 마음이 흔들리며 먹먹해졌다.

서기1945.08.15. 일왕 히로히토가 항복하자 일본군과 그 군속들은 썰물처럼 돌아갔다. 그런데 강제로 끌려와 중노동에 시달리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그대로 버려졌다.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국으로 데려갈 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해를 거듭해도 돌아가는 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원치 않게 일본군이 만든 포로수용소 간수를 했다고 전쟁 후 현지 전범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임을 당한 조선인도 있었다. 양칠성 같은 조선인은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현지 인도네시아인 들을 모아 제국주의 식민지배에 항전하여 독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항복을 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유일한 희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데려갈 배는 결코 오지 않았다. 서기1948. 독특한 유행가 창법으로 유명한 가수 현인이 부른 ‘고향만리’라는 노래에는 이때 끌려가서 버려진 조선인들의 피맺힌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고향만리-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눈에 익은 너의 모습 꿈속에 보면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바닷가 저편에

고향산천 가는 길이 고향산천 가는 길이

절로 보인다

처음 일제가 항복했을 때 현지 조선인들도 다른 나라 식민지 노동자들처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잠 못 이루었을 것이다. 이 노래 가사에는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지옥 같은 야만의 현장에서 버틸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나온다. 어머님 얼굴이다. 그리고 고향 땅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세월이다. 다시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서 사는 날만을 기다리며 참혹한 생활을 견뎠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고향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사는 날만 남았다. 바닷가 저 편에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고향산천이 아른 거린다. 얼마나 간절하게 꿈을 꾸었는지 고향산천이 바닷가 저편을 가기만 하면 저절로 보일 것이라고 한다.

날이 새면 만나겠지 돌아가는 배

지난 날 피에 맺힌 피의 조각을

바다위에 뿌리면서 나는 가리다

물레방아 돌고 도는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으로

그러면서 날이 새면 고향으로 나를 데려다 주는 배를 만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난날 피에 맺힌 고생들을 이제는 기억의 조각들로 바다위에 뿌리면서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며 꿈에 부푼다. 그 지난날은 피의 조각이다. 이 피 조각들을 바다위에 뿌리면서 새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가리라. 그 고향은 물레방아 돌고 도는, 물레방아 돌고 도는 내 고향이다. 그런데 아...아...날이 새도 돌아가는 배는 오지 않는다. 다음 날도 배는 오지 않는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세월만 흐를 뿐 고향으로 나를 태우고 가는 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이역만리 버려진 신세. 흐르는 것은 회한의 눈물뿐이다. 그리운 어머니, 동무들과 뛰 놀던 고향 땅...이제는 아련한 꿈속의 일인가. 이역만리 낯선 땅... 목 놓아 운다.

보르네오 깊은 밤에 우는 저 새는

이역 땅에 홀로 남은 외로운 몸을

알아주어 우는 거냐 몰라 우는 거냐

기다리는 가슴속엔 기다리는 가슴속엔

고동이 운다

보르네오 깊은 밤이라고 한다. 보르네오라고 했으니 지금 인도네시아다. 여기 까지 우리 젊은이들이 끌려가 일제 침략전쟁의 소모품이 되었다. 깊은 밤 이역만리 보르네오 밀림 속에서 울다 지쳐서 쓰러졌다. 처량한 신세를 알라 주기라도 하듯이 이름 모름 새가 울고 있다. 이역 땅에 홀로 버려진 내 마음을 알아주어 우는 거냐, 몰라서 우는 거냐. 그래도 기다리련다. 우리 어머니, 내 고향을 꼭 보련다.

일제는 우리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독립투쟁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만행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노동력 강제징발이나 왜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 우리민족 전반에 걸친 인력수탈은 일제가 남긴 상처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 외에 강제징용 희생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강제징용은 북으로는 사할린 섬에서부터 남으로는 남태평양 군도 티니안 섬에 이르기 까지 상상을 초월한다. 서기1939년에서부터 일제가 패망한 서기1945년까지 불과 6년 남짓 기간에 군인, 군속, 정신대, 노동자 등으로 강제징용 된 희생자만 하더라도 6백만 명에 달한다(「한민족의 강제연행기록」, 『태평양전쟁 당시의 강제징용과 무연고유골 위령에 관한 자료집』, 한문화원 편찬).

불과 6년 남짓한 기간에 6백만 명에 달하는 우리민족이 해외로 끌려가서 죽거나 다쳤다. 일제 침략전쟁의 ‘노예’로 끌려간 숫자가 이 정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침략 35년 동안 끌려간 사람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

▲ 서기2017.08.15.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광복된지 72년만에 고국에 돌아온 일제강제징용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서기2017.08.15. 오늘은 광복72주년이다. 친일매국 적폐정권이 촛불봉기로 쫓겨나고 처음 맞는 광복절이다. 광복절을 맞이해서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투쟁에 헌신한 집안은 3대가까지 국가가 보상하겠다고 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잘산다는 말이 속담처럼 회자되어 온 세월이 70년이 넘고 있다. 늦어도 한 참 늦은 것이지만 이제라도 국가가 애국을 바로 평가해서 보답한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강제 징용되어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과 그 후손들이 일제침략전쟁 지역에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

본지, 코리리히스토리타임스는 지난 서기2017.03.20.에 보도한 바와 같이 남태평양 티니안 섬에는 아직도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 후손들이 외롭게 집단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1). 천도교 동학민족통일회 송범두 상임의장에 따르면 송의장 일행이 15년 전에 이 섬에 관광객으로 방문했다. 이 섬에는 강제징용 한국인 후손들과 당시 90세가 넘은 강제징용 생존자도 있었다. 송 의장 일행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는데 떠나올 때는 90넘은 노인이 손을 잡고 한사코 놓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반면에 이 섬에 여행객으로 온 일본인은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한국인은 이 원주민 한국인들과 함께 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데 일본인은 멀리 떨어진 해변가 등지에서 먹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강제징용희생자의 원혼을 달래주는 유해 봉환 사업은 정부가 마땅히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 72년 동안 정부는 관심도 없었다. 강제징용 피해조사자체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간에서 뜻있는 단체들이 관심을 갖고 추진 중일 뿐이다. 지난 서기2017.08.04. 김포공항을 통해서 일본에 끌려간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 동경의 국평사國平寺(주지 윤벽암尹碧巖 서기1956년생)에 101구가 넘는 유골이 모셔져 있는데 이 중 일부인 33구가 돌아온 것이다. 이 유골들은 연고자가 없다. 가족이나 조상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원혼들이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이 원혼들은 출생연대와 사망연대까지 확인이 된다. 대부분 서기 1910년부터 1920년대 생이며 서기1980년에서 1990년대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사망연대를 보면 우리정부에서 충분히 조사 및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아무것도 안했다. 이 원혼들이 강제로 끌려간 곳을 보면 탄광, 군수공장, 건설현장, 항만 등이다.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받고 극심한 노동에 혹사당했다.

▲ 서기2017.08.14.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 앞에서 기자에게 윤벽안 스님이 당신의 집안 내력과 유해를 국평사에 보관하게 된 내력을 들려 주고 있다.

필자 할아버지(오병록 吳炳祿, 서기1903-서기1979.)도 일제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오셨다. 그 후유증을 잊기 위함이었는지 유난히도 술을 좋아하셨다. 결국 신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필자를 귀여워하면서 늘 안아주셨는데 할아버지 두루마기에서 풍기는 싸한 소주냄새가 지금도 살아있다.

이날 봉환된 고인 중에는 박성룡朴性龍 할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연이 있어 심금을 울렸다. 박성룡 할아버지는 서기1921.08.26.에 태어나서 서기2002.12.06.에 사망했다. 본적지는 알 수 없다. 박 할아버지는 사할린(카라후토)에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죽도록 일했다. 해방이 되자 당시 같이 일했던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은 현지에 버려졌다. 어떤 청년들은 절망감에 자살을 선택했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일본정부에 의해서 배를 타고 모두 본국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박 할아버지가 다른 조선 청년들과 달리 일본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아내와 자식3명을 먹여 살리고자 하수도 공사장에서 뼈 빠지게 일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처자식이 박 할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홀로 남겨졌다. 늙어서 일을 못하게 되자 돈이 없어 전기, 가스가 끊겼고 죽을 날만 기다렸다. 다행히 이웃사람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이야기를 알린 일본인 후꾸코씨는 아이타마현 <아이다병원>에 입원해 있던 박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때를 잊지 못했다. 박 할아버지는 6년 동안 한 번도 목욕을 못한 상태였다. 살갗이 시커멓다.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 몸을 닦아주니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당시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은 작은 함에 들어 있는 몇 벌 옷가지뿐이었다. 후꾸코씨는 그 날 이후로 뜻있는 사람들과 같이 교대로 할아버지를 문안 가서 보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약간의 용돈을 드렸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단 엿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 박성용 할아버지가 이제야 꿈에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온 것이다. 한줌의 유해로.

이 사업에는 국평사 주지인 윤벽암 스님이 큰 역할을 했다. 국평사 주지 윤벽암 스님을 서기2017.08.14.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만났다. 예인홀에서 열린 대종교 환국 학술발표회 자리였다. 윤벽암 스님은 본인이 재일동포였다. 부와 조부가 모두 스님이었는데 일제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따라 당시 조선의 전국 사찰도 왜색화 되어 갔는데 일제는 재가 승려들을 적극 양산했다. 재가 승려는 결혼해서 가정을 둔 승려를 말한다. 이에 따라 전국사찰의 주요 직책도 독신으로 수행하는 한국식 승려가 아닌 왜색불교를 잇는 인물들로 채워나갔다. 이때 윤벽암 스님의 부와 조부도 일제강제정책에 따라 일본에 왔고 일본식 불교로 바꾸었다고 했다. 현재 일본 동경에 있는 국평사도 윤벽암 스님의 부와 조부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윤벽암 스님은 자연스럽게 이 절을 상속하게 되었고 주지가 되었다. 강제징용 희생자 유골을 모시게 된 것은 조부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렇게 모셔오던 것을 한국의 민족종교단체들과 연계를 해서 이번에 유골 일부를 한국으로 송환하게 되었다고 했다.

▲ 이번 일제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봉환 사업 실무를 맡은 이찬구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 사무국장이 서기2017.08.14. 서울 기자회관 건물 지하 다방에서 그동안 봉환사업을 하게된 사정을 들려주었다.

한편 이날 이 사업 실무를 맡은 이찬구 겨레얼살리기운동본부 사무국장과도 대화를 나눴다. 이찬구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 사업을 몇 년 전부터 비밀리에 추진했다고 한다. 공개해서 사업을 추진하면 방해하는 세력들이 많기 때문에 성사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성사되는 시점에 비로소 알리게 되었다고 했다. 이 찬구 사무국장은 강제징용 희생자들이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무슨 해방이고 광복이냐고 울분을 토했다.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이 조국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광복, 해방을 입에 담을 수 있다고 아직도 소극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서 꾸짖었다.

아직도 ‘고향만리’는 일제침략이 현재 진행형임을 구슬프게 노래하고 있다.

보르네오 깊은 밤에 우는 저 새는

이역 땅에 홀로 남은 외로운 몸을

알아주어 우는 거냐 몰라 우는 거냐

기다리는 가슴속엔 기다리는 가슴속엔

고동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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