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 조선이 버린 만주의 비극, 우리민족 비극으로 이어지다.

광개토태왕비문, '비류곡 홀본 서성산에 세운 도읍' 의 '홀본'은 어디인가...

환인현 이른바 오녀산성인가, 요하 건너 의무려산인가...

<삼국사기> '지리지'는 요하 건너 의무려산이라고 하다...

 

 

허성관의 2015년 중국 우리 역사 현장 답사 ⑦

7월25일(토) 환인 → 단동

- 추모왕이 건설한 오녀산성에 오르다

해지기 전에 환인에 도착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동명성왕)께서 나라를 열고 도읍하신 곳이다. 필자가 젊은날에는 중국과 수교가 되지 않아서 이곳을 답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늘 밤 묵기로 되어 있는 융흥국제대주점(融興國際大酒店)은 바로 비류수(沸流水) 가에 있다. 이 근처 어는 곳에 동명성왕이 서기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우고 갈대를 덮은 궁실을 지었다. 우리 민족 국가 고구려의 출발점에 지금 서 있는 것이다.

비류수는 지금은 혼강(渾江)이라고 불린다. 강폭도 넓고 수량도 많다. 상류에 댐을 막았는데도 수량이 많다. 어디엔가 보를 쌓았기 때문이리라. 풍광도 수려하다. 2,050년 전 동명성왕이 주무시던 근처에서 필자도 하루밤을 지내게 되니 어찌 기분이 담담할 수 있겠는가!

▲ 비류수 혼강

해가 저물어 고려성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호텔을 나섰다. 환인시 중앙로를 지나는데 어! 길 이름이 ‘조양로(朝陽路)’다. 게다가 패루에도 조양문이라고 쓰여 있다. 조양은 ‘아사달’의 한자 표기이다. 만주를 답사하다 보면 조양이라는 지명을 자주 만나게 된다. 장춘에도 있고, 하얼빈에도 있고, 멀고 먼 북만주 알선동굴이 있는 아리하시에도 있다. 아사달은 단군 왕검이 최초로 도읍한 곳인데 만주 곳곳에 아사달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고려성의 주인은 광해군 때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의 전쟁에 명나라 지원군으로 참가했다가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 장군의 부하 중에서 그대로 만주에 눌러앉은 조선군의 후예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4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우리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놀랍다. 고려성 창문으로 멀리 보이는 오녀산성은 그대로 한 폭의 명화라고 들었지만 지금은 밤이어서 그 명화를 볼 수가 없다.

음식은 간이 조금 짜기는 하지만 입맛에 맞다. 우리 일행 외에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요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중국 노래와 한국 노래를 번갈아 부르면서 신나게 논다. 너무 소란스러워 짜증이 날 정도다. 어떤 젊은이들이냐고 살짝 물었더니 이 지역 출신 조선족 청년들로서 중학교 동기들이라고 한다. 모두 고향을 떠나 북경 천진 청도 서울 등에서 일하다가 중학교 졸업 몇(?) 주년 기념으로 재회한 모임이라고 한다. 조선족 청년들이라는 말을 듣자 짜증이 어느 틈에 사라지고 ‘그래 더 신나게 놀아라’라고 격려하는 마음이 우러난다. 사람이 너그러워지는 것도 잠시다. 저들은 모르겠지만 필자로서는 동족의 정이 발동한 탓일 것이다. 이곳 환인은 만주족 자치지역이다. 만주족의 역할은 거의 없고 이름뿐이라고 한다. 조선족들도 많이 살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대처로 나가고 노인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비류수 가에서 가쁜하게 하루 밤을 지내고 호텔에서 아침 식사 후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추모왕이 “비류곡 홀본 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고 전하는데 오녀산성이 이곳으로 비정되었다.

▲ 멀리서 바라 본 오녀산성

버스를 타고 한 참 가자 멀리 웅장한 바위산이 눈에 확 뜨인다. 어쩐지 오녀산성일 것이라는 예감이다. 사진에서 본 모습과도 일치한다. 정상부분에 바위가 직각으로 서있고 그 위에 널찍한 평지가 펼쳐져 있는 장엄한 산이다. 산 모양만 봐도 고구려 산성이 있을만한 곳으로 짐작이 되는 산세다. 눈대중으로도 이 산성은 난공불락으로 보인다. 그런데 산 정상이 온통 바위인데 물이 있을까?

오녀산성 아래에 도착하니 박물관이 있고 깔끔한 고구려시조비(高句麗始祖碑)가 서 있다. 비 머리 부분에 삼족오를 멋지게 새겨 놓았다. 박물관 내부를 대충 둘러보고 산성 정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산성으로 오르는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아마도 경사도가 거의 70도는 되어 보인다. 영감인 필자와 박정신 교수는 이 비탈길을 어떻게 올라갈 것인지 정말 난감하다.

▲ 고구려 시조 추모왕을 기념하는 비석

여기까지 와서 오녀산성 답사를 포기할 수는 없다. 정상까지 계단이 놓여 있다니 차근차근 올라보기로 한다. 먼저 50계단씩 오르고 쉬었다가, 다음에는 70계단씩 오르고 쉬고, 다음에는 100계단씩 올라보기로 박정신 교수와 약속하고 출발했다. 일행 중 젊은 축을 어느새 앞서가고 보이지 않는다. 좀 야속하기도 하다. 의사인 신종근 선생이 영감 두사람이 걱정이 돼서 천천히 앞서간다. 다행이 나무가 울창해서 그리 덥지는 않다. 결국 우리 두사람도 정상에 올랐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마도 일행들 보다는 30분은 늦게 도착했을 것이다.

산 정상 남쪽과 서쪽은 100-200m 직각 절벽이고 동남쪽 절벽은 500m가 넘는 아찔한 낭떠러지다.북쪽은 절벽은 아니지만 역시 급경사다. 산의 높이가 820m다. 산의 정상은 동서가 300m, 남북이 1,000m 정도인 넓고 평평한 암반인데 잡목 숲이다. 여기저기 주거 유적이 남아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히 환인이 일망무제로 들어오고 아무리 생각해도 공격해 올라오는 것은 정말 무모해보이는 지형이다. 오녀산성을 돌아흐르는 비류수를 막아 댐을 만들었는데 경치는 그만이다. 국내성과 환도산성처럼 오녀산성 역시 평지성인 하고성자성과 짝을 이루었지만 평지성의 흔적은 지금 거의 찾을 수 없다. 특히 산아래에 고구려 적석총 무덤떼가 있었는데 대부분 수몰되고 남은 것이 별로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 오녀산성에서 내려다 본 환인댐

댐으로 수몰된 저 아래 어느 곳에 횡도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나라가 일제에 망한 1910년 강화학파, 신민회, 혁신유림 등이 나라를 되찾고자 기획해서 집단으로 망명하여 일차로 집결한 마을이다. 그 중심에 이회영, 이상룡, 정원하, 김대락 등의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이 분들이 어찌 이곳을 선택했을까? 허둥지둥 재산을 처분하고 그 추운 겨울에 몰래 솔가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마차를 타고, 걸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금 나라가 다시 그런 곤경에 처한다면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여기저기 산성 유적이 남아 있다. 정상이 암반인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천지(天池)라는 우물이 있다. 길이가 5m, 폭이 2m 쯤 되는데 수심은 깊지 않다. 추모왕도 장군도 병사도 모두 마셨던 우물일 것이다. 물이 있으니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성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천지는 좀 지저분하다. 아무도 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것 같다. 우물 주위 나뭇가지에는 울긋불긋한 천조각이 걸려 있고, 조그마한 관우상도 모시고, 우물 속에는 동전이 널려져 있다. 복을 빌고 공들이는 중국 사람들의 짓이다.

▲ 오녀산성 천지

그런데 이 난공불락인 오녀산성을 함락시킨 사람이 조선 태조 이성계라고 『동국통감』은 전한다. 고려 공민왕 19년(서기 1370년) 이성계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여진족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우라산성(亏羅山城)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는데 이 우라산성이 오녀산성이다. 이성계가 편전(片箭) 70대를 쏘아 모두 명중시키자 고안위가 줄에 매달려 산을 내려가 도망했다. 지형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정상 부근이 아닌 절벽이 시작되기 전 산의 중턱에서 편전을 쏘았을 것이다. 절벽 바로 아래에서는 산 정상에 웅크린 적을 볼 수 없는 지세다. 명궁 추모왕이 건설한 난공불락의 산성을 그 후예인 명궁 이성계가 1,400년 후에 함락했고, 두 분이 모두 개국 시조이니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산성에서 동북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절벽에 설치한 잔도인데 지금은 수리 중이다. 깎아지른 경사면을 조심조심 내려올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오를 때에 비해서는 수월하다. 막상 성에서 내려오다 보니 고안위가 왜 줄을 타고 도망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만큼 험하고 위험한 길이다. 내려오는 길 여기저기에 옛 성벽이 남아 있고 성문터도 보인다. 옛적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던 건주여진의 유적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있다.

이성계가 이곳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원(元)과 명(明) 교대기에 이 지역을 고려가 사실상 지배했음을 의미한다. 고려의 북쪽 국경이 신의주와 원산을 잇는 선이라는 조선총독부가 창안한 국경선이 틀렸음을 알겠다. 이곳 오녀산성은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50km이상 떨어져 있다. 최근 고려의 북방강역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은 다행이다.

오녀산성을 내려와서 주차장에 있는 한국식 김밥집에서 김밥과 즉석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김밥집 주인은 우리말을 우리처럼 하는 동포였다. 값도 싸고 입맛에 맞았다. 서쪽으로 본계시를 거쳐 심양 단동간 고속도로를 타고 신의주 건너편 단동으로 가야한다. 가는 도중에 시간이 허락하면 고구려 산성인 봉황성을 답사하기로 한다.

버스를 타자 오녀산성 오르는데 너무 힘을 쏟은 탓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버스타고 가면서 스쳐지나가는 경관을 즐기는 필자는 좀처럼 차에서 잠을 자지 않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한 잠 자고 났더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중국 역사책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고구려에는 집집마다 부경(桴京)이 있다고 했는데 지나가는 농가 마을에 부경이 보인다. 1,800년 전 기록에 나와 있는 창고 형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는게 놀랍다. 길림성과 요녕성 동부 지역을 지나다 보면 대부분의 농가에 부경이 있는데 곡물 저장 창고다. 아래 사진 가운데 오두막 같은 건물이 부경인데 창고 바닥이 땅에서 몇 자 띄워져 있다. 심양 단동 고속도로로 들어가기 위해서 본계를 경유하지 않고 본계보다 더 남쪽으로 난 새 동서 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 가운데 오막살이처럼 보이는 건물이 부경(사진: 네이버 카페 부경운해 )

비가 계속 내린다. 봉황성 답사를 생략하기로 한다. 아마도 필자는 봉황성과 인연이 아직은 없나 보다. 수년 전에 차로 봉황산 정상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봉황성 꼭대기에서 성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기대가 컸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자 구름이 꽉 끼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늘도 그름이 끼고 비가 오니 어쩔 수 없다. 성이 아직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봉황성이 오골성이다. 평지에 우뚝솟은 바위산 덩어리 꼭대기 가운데에 쌓은 성이다. 바위산의 능선이 성벽이고 능선이 끊어지는 곳에 성벽을 쌓아 이은 성이다. 전체 둘레가 16km로 고구려 성 중에서 압록강 이북에서 제일 큰 성이다. 봉황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거점 방어성이었고, 이 후에도 우리에게 치욕이 교차한 성이다.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할 때 거쳐온 곳이 오골성이고, 요나라가 고려에 침입할 때 발진기지가 여기였고, 청나라에 인질을 교체할 때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교대하는 곳도 이곳이었다. 병자호란 후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이 청나라에 잡혀가 억류당해 있던 곳도 여기였다. 인연이 닿지 않아 보지 못했지만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 장엄할 것이다.

단동에서 심양가는 길은 사실은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길이다. 압록강 하구 박작성에서 북쪽으로 구련성 봉황성으로 이어진다. 구련성은 압록강에서 30km정도 떨어져 있는데 청나라 때 세관인 책문(柵門)이 여기에 있었다. 이는 청과 조선의 국경선이 압록강 보다 북쪽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단동에서 심양까지 가는 선상에 있는 고구려 성들을 답사해 보리라.

글: 허성관(전 행정자치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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