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고고학 여전히 일본종속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한자용어 대부분이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 준것...

 

역사학/고고학 분야에 만연한 왜색 표현들 - “교구”편

필자가 국립 중앙박물관에 갈 때마다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출토 유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국보 제89호로 “금제 띠 고리” 또는 “금제교구(金製鉸具)”로 불리는 유물입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이 유물의 이름을 우리말로는 “띠 고리”, 한자어로는 “교구(鉸具)”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둘 다 옳은 표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사진1  국보 제89호 평양 석암리 황금 대구>

“고리(ring)”란 반지처럼 안에 구멍이 난 원형의 쇠붙이를 주로 일컫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유물은 어디를 뜯어 봐도 “고리”라고 부를 만한 부위가 없습니다. 차라리 이 유물을 어떤 물건을 걸거나 끼우는 도구라는 뜻에서 “갈고리(hook)” 또는 “띠 걸이”, “띠 걸개” 식의 이름을 붙였다면 그래도 봐 줄 만은 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조차도 이 유물의 일부에만 해당되는 불완전한 표현일 뿐이지만요. 이번에는 한자어 “교구”를 따져보도록 하지요. “교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교구(鉸具) [명사] 허리띠 장식

그러나 이것은 정상적인 한자어가 아닙니다. ‘교(鉸)’는 중국과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가위’를 뜻하는 한자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유물이 가위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조선왕조실록에는 “교구”나 “교”를 “허리띠 장식”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사례가 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교(釘鉸)”라는 표현에서 ‘리벳(못)’의 의미로 사용된 사례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국 최대의 한자어 사전인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에도 “교구”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고 “교”는 ‘가위’라는 의미와 ‘(등자) 장식’이라는 의미밖에 없었습니다. ‘연결고리’의 의미로 사용된 “교공(鉸孔)”, “교접(鉸接)”, “교련(鉸鏈)”은 모두가 근대 이후에 도입된 일본식 표현들이었지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일본어사전인 《대사림(大辭林)》을 펼쳐 보니 아니나 다를까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구【鉸具】

가죽띠 등에 사용하는 버클. ‘교구두(鉸具頭, 카고 가시라)’로 일컬어지는 고리형 쇠붙이와 ‘자침(刺鉄, 사스가)’으로 일컬어지는 작은 핀으로 구성되는데, 교구두로 관통시킨 띠의 구멍에 자침을 끼워서 둔다. 마구의 등자를 고정시키는 데에도 사용한다.

かこ【鉸具】

革帯などに用いたバックル。鉸具頭かこがしらと称する輪金と刺鉄さすがと称する小舌片よりなり、鉸具頭に通した帯の穴に刺鉄を刺して留める。馬具の鐙あぶみをつるのにも用いた。

이 “교구”라는 단어는, 이른바 ‘낙랑호구부’라는 널판의 ‘현별(縣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00여 년 전에 일본에서 서구 문물을 수입하면서 세키노 등 일본 식민사학자들을 통하여 수용된 일본식 표현인 것입니다. 일본에서 “교구”는 말안장과 등자(鐙子)를 연결하는 ‘이음쇠’를 뜻하며, 때로는 등자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 가문의 문장(紋章)들을 소개해 놓은 15세기의 《켄몬쇼카몽(見聞諸家紋)》에 따르면, 백제 근초고왕의 후예로 일본으로 귀화한 후 카마구라(鎌倉), 무로마치(室町) 두 막부 시대에 명문가로 존경을 받았던 미요시(三善)가를 상징하는 문장이 바로 이 등자 즉 “교구”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교구”는 사이타마(埼玉)현의 이나리야마(稻荷山) 고분을 위시하여 전국의 고분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부장품이지요. 이는 “교구”가 부여계(백제, 고구려) 도래 인들에 의하여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 <그림1  일본의 사무라이 명문 미요시 가의 문장. 모두 “교구”(등자)가 들어 있다>

<교구 - http://www.harimaya.com/kamon/column/kakomon.html >

국보 제89호 이른바 석암리 황금 “교구”는 전형적인 ‘버클(buckle)’입니다. 현재 우리말에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를 대체할 만한 표현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만일 ‘버클’이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다고 느껴진다면 편의상 “띠의 갈고리”라는 의미의 전통적인 한자어인 “대구(帶鉤)”로 부르는 편이 더 낫다고 봅니다.

어쨌든,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국보 제89호 유물을 부르는 이름인 “교구”는 우리식 표현이 아니라 일본식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 역사학, 고고학 분야의 전문용어들 중에서 상당수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일본식 한자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사학, 고고학 분야의 학자들이 서구 역사학의 ‘한국화’, 서구 고고학의 ‘한국화’에 전혀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관심이 전혀 없는 걸까요? 강단주류 역사학계가 바빠서요?

우리나라 유물을 소장-전시하는 중앙박물관에서 유물 이름을 일본식으로 붙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역사학, 고고학의 첫 걸음이 일제 식민사학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1대 비조들이 전부 조선총독부에 부역한 일본인 어용학자들이라는 아픈 역사는 굳이 들추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2017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이런 식의 ‘근본도 없는’ 일본식 표현이 매일 수많은 우리나라 참관자들이 찾는 대한민국 역사문화의 중심부라고 할 국립 중앙박물관에 보란 듯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지금까지도 학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적으로조차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봅니다.

글: 문성재(중문학 박사) 저서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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