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후손 후원금 모으기 성공 강연회 성대하게 열리다...

 

독립투사후손 재산 찾아주기 운동 다방면으로 진행시킬 것...

재단설립으로 친일매국세력에 체계적 대응, 역사바로세우기 매진하자...

해방 후 독립투사와 후손들 생존권까지 박탈한 이승만 정권...

다른 독립투사도 암살 시도 할 것 분명해 지방에서 숨어살아...

 

서기2017.07.26. 저녁7시, 서울 홍대앞 전철역 근처 카톨릭청소년회관 바실리 관에서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가 주최한 독립투사후손 재산찾아주기 후원금 모집성공 강연회다. 그동안 연구소 측에서는 종합누리망 다음(daum)이 개설한 ‘이야기후원금(story funding)’란에 3회에 걸쳐서 독립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고 후원금을 모집했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모두 바친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현장감 있게 소개했다. 먹고살기에 바쁜 요즘 세태들에게 독립투쟁 이야기는 먼나라 이야기일 수 있다. 당장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장 가질 수 있는 비법을 담은 이야기라면 많은 호응이 있을 것이고 투자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예상 가능하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독립투쟁 이야기 한 이야기당 단기간에 3천만 원 이상이 모집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이례적인데 미국에서 건너온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요즘에 보기 드문 현상이라는 것이다. 주최 측에서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사회가 건강하고 아직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면서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 날 행사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유명한 이준열사의 외손이 먼저 독립투사들의 삶을 들려주어 자리를 숙연케 했다. 소외받고 어려운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 손윤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공동대표(사진 왼쪽)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사진 오른쪽)의 소개를 받은 가운데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어 3.1혁명의 지도자이자, 독립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 받는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 사업회 이사장인 손윤대표가 인사말을 이었다. 손 대표는 역사를 모르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바른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6월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투사후손들을 특별히 챙기겠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며 국가도 이제 제대로 대우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손 대표 자신도 적극 동참하겠다며 독립투사들의 재산을 제대로 찾아주자고 역설했다. 이어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도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

미사협 상임대표인 허성관 전 행자부 장관도 이날 행사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인사말을 통해 허 대표는 ‘다음’에 독립투쟁관련 이야기 3건을 실었는데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임시정부 기념관 설립 추진위원장, 순국선열유족회 김시명 회장 등이 주체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후원금이 예상외로 성공적으로 들어왔는데, 역사를 주제로 한 독립투쟁사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돈이 모인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며 1백프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했다. 보통 5백만 원도 모이기 힘든데 3천만 원이 모였다는 것은 대성공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작게나마 독립투사들과 그 후손들의 명예를 훼복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날 행사장 120석이 넘는 공간을 다 채우고 따로 의자까지 가져와야 할 만큼 성황을 이룬 것도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 허성관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 상임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허 상임대표는 이날 인사말을 통해서 독립투사집안의 피탈재산을 찾아주어 진정한 독립, 광복을 이루자고 역설했다.

이어 국회 입법 활동을 통해서도 진행하겠다고 하면서 국회의원들이 의원입법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또한 정부입법도 추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어 이것도 아울러 추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서 위원회도 만들어 전담시키겠다고 했다. 이렇게 피탈재산을 찾아서 돈이 모이면 보다 체계적으로 독립투쟁사와 후손들을 위한 사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피탈재산환수 가능성의 예도 들었다. 우당 이회영 손자인 이종찬 원장이 빼앗긴 재산이 명동 로얄호텔 근처 8천 평이 있는데 공시지가로만 대략 계산해도 1조 2천억이라는 것이다. 이 돈이면 대한민국을 개조 할 수 있다며 참석한 시민들을 고무시켰다. 그러면서 의암 손병희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나라를 찾는 방법으로 공부해서 도를 닦는 방법, 돈 많이 벌어서 모두를 잘되게 하는 방법, 언론을 만들어 계몽시키고 자기의 훌륭한 뜻을 선전해서 모두가 공유하는 방법을 손병희 선생이 펼쳤다면서 이 중에 돈으로 하는 방법이 생기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결국 우리사회는 돈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피탈재산을 찾으면 아주 효과적으로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회에서는 독립투사후손인 김병기 선생이 3대에 걸친 집안독립투쟁사와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어 참석한 시민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 김병기 선생은 희산 김승학 독립투사의 직계 후손이다. 그래서 모친과 부친 그리고 할아버지인 희산 선생이 살아있을 때 직접 독립투쟁사를 들은 증인기도 하다. 그의 생생한 육성을 직접 소개한다.

“독립투쟁한 직접적인 기록증거는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에 기록을 공연히 남기면 일제의 추적 첩보망에 걸려 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할아버지(희산 김승학 선생)께서 투숙을 할 때도 일부러 일본사람들 거주 지역에서 2층에 묵었습니다. 그래야 덜 의심을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런 곳도 일경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하루는 투숙한 집 문을 두들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분명히 같이 잣는데 할아버지가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문 두드리는 낌새가 보이자, 세집 건너 지붕위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퇴로를 준비하고 투숙하는 것이 몸에 밴 행동이었다는 것이죠.

할아버지께서 군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우당 이회영 이복형제가 당시 40만원, 현재 금액으로 6백억인데 이것으로 신흥무관학교 10년 동안 운영해서 3천5백여 명의 학생 키웠죠. 할아버지는 평안도가 고향인데 거기서 군자금 모집했습니다. 직접 남겨놓은 것은 없고 일본 첩보기록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당시 기록에 ‘김승학이 5만원을 마련했다’고 나옵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60~ 70억 원이 됩니다. 상해로 가서 독립신문 발행했는데 서기1919년에 나옵니다. 원래 독립신문 시작은 나중에 변절한 춘원 이광수가 했는데 따라온 애인 허영숙을 따라 일제에 귀순해 버립니다. 국내로 들어간 것이죠. 독립신문 인쇄소도 영업국장하던 이영렬이라는 사람이 밀고를 하는 바람에 잃게 됩니다. 그는 이 밀고를 통해서 일제로부터 신분보장을 받고 국내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독립신문이 와해되어 버렸죠.

▲ 김병기 선생이 3대에 걸친 독립투쟁사와 해방 이후 친일파 정권의 탄압으로 숨죽이고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다시 상해에서 살려냅니다. 이 독립신문을 통해서 독립투쟁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장소가 중국이다 보니 한문판도 찍어 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약 6년 동안 독립신문을 발행합니다. 여기에 들어간 자금에는 교직생활을 해서 번 돈과 땅을 판 돈이 있습니다. 해방 후에는 국내에 들어와서 복간했습니다. 1947-1949년까지 발행했는데 김구선생 암살 사설을 썼다가 중단되고 맙니다. 이승만 정권의 눈 밖에 난 것이죠. 이렇게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폐간 되다 시피 하다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사라지자 복간할 수 있는 환경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 복간하려고 했으나 할아버지가 이미 연세가 80이 넘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의지를 받들어 후손들이 발행해야 하는데 잇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6.25 때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란 갔는데 그 후 할아버지, 희산 선생은 서울로 다시 올라가서 활동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인들이 주변에서 올라오지 말라고 만류했죠. 만약에 올라오면 백범 선생 같이 똑같이 암살당한다는 것입니다. 암살 지목 1호였기 때문이죠. 백범 김구 선생은 이승만하고 그 전부터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 희산은 이승만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상해 시절부터 독립신문을 통해서 이승만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었기에 올라오면 반드시 암살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안은 서울로 못 올라오고 부산에서 살게 되었죠. 부산시절에 1주일 마다 경찰들이 와서 동향조사를 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선거 때만 되면 가족들 간에 왕래를 차단하고 출입을 금지시켰죠. 폐쇄시켰습니다.

독립투사 후손들 고사시키고자 직업도 갖지 못하게 한 이승만 정권...

당시 부산에 해운공사가 있어 부두 노동자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은 이것 마저도 못하게 했어요. 남자들이 밖에서 벌어와서 집안을 꾸려나가야 하는데 원천 봉쇄해 버린 것입니다. 굶어 죽으라는 것입니다. 독립투사 집안은 남자들에게 일도 못하게 말려 죽이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녀자들이 나가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주리장사를 하고 돼지나 오리를 쳐서 연명해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구두닦이, 껌팔이 시키는 것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생존 어르신들이 살아있어서 이렇게라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고 없는 후손들은 해방은 지옥이었습니다.

해방이 되었으면 나라를 찾겠다고 싸운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주축이 되어야 하는데 정 반대현상이 벌어진 것이죠.

우리 할아버지, 희산 선생은 독립투쟁에서 많이 알려진 분이라서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알고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대접할 것이 없었습니다. 며느리인 어머니께 손님 대접하려고 술상을 봐 오라고 합니다. 사랑채에서 안채를 향해 ‘애야 술상 봐와라’ 하면 그 때부터 어머니는 발 동동 구르며 뛰셨습니다. 여름에는 오이라도 썰어오고 소주라도 가져와야 하는데 돈을 주고서 받아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안채에다 소리만 지르는 것이죠. ‘애야 술상 내와라’, 그런데 돈이 있을 리 없죠. 양식도 없어서 굶다 시피 하는데 술상 볼 돈이 더욱 있을 리가 없죠. 할아버지가 돈을 주지 않고 술상 봐오라고 해서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굴렀고 결국 동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정해서 겨우 구해다가 술상을 봐 오셨습니다. 돌아 나오는 어머니는 당신의 뒤 꼭지가 너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제대로 차려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이회영 부인 이을숙 여사도 밥상을 차리는데 반찬이 너무 없어 상당히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닌데도 그 분들은 그렇게 부끄러워했습니다. 독립투쟁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하는데 저희 집안도 삼대가 독립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희산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 독립투쟁에 대한 상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때 할아버지는 ‘우리가 무슨 상을 받으려고 독립 투쟁했나, 일체 받지 마라’ 해서 결국 희산 할아버지만 겨우 받고 나머지는 포상하나 받은 것이 없습니다. 다른 독립투사집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포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정비되어 객관적으로 증명되면 포상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집안들 독립투사들이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증언이나 독립투쟁 증거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포상 받기가 어렵게 되었죠.

독립투사 후손들의 울분...

지금 독립투사 후손들이 모임을 갖습니다.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나라가 망하더라도 후손들에게 절대로 독립투쟁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우스갯소리지만 말입니다.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그런 얘길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일에서는 늘 독립투사 후손들이 맨 앞에 서 있더군요. 독립투쟁하면, 직접 뛰어든 당사자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 뒤에는 가족들이 있었고 독립투쟁에 전념하도록 뒷받침 해 주었습니다. 이런 점도 기억해 주십시오.”

▲ 이날 후원모금 성공 강연회에서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소장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책 판매도 있었다. 이 책은 아직 독립투사들의 구체적인 역사가 알려지지 않은 때에 나왔는데, 이 책을 통해서 독립투쟁사의 숨겨진 한면이 적나라하게 밝혀졌다는 평가다. 주최 측에서는 자발적인 현장 후원도 받았다.

지금은 일제식민통치 제2기...

이날 김병기 선생의 증언은 채 10분이 안되었다. 그런데도 그 분량은 몇 시간을 얘기한 느낌이다. 김병기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게 소위 광복된 조국의 모습일까 싶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역사는 이런 실상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현대사라고 배우고 있지만 이런 역사의 실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통상 좌우익으로 나누어져 싸우고 이승만이 독재정치를 했다는 식이다. 반민족 친일적폐세력은 ‘빨갱이 좌파냐, 자유민주주의 세력이냐’로 나누고, 몰 민족 얼뜨기 깡통 진보는 ‘군사독재냐, 민주화세력이냐’ 등 이분법적 진영논리로 갈라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사회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친일부역세력은 얘기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우리가 낸 세금으로 71년 이상을 주입시켜온 한국고대사학회와 같은 강단주류 식민사학은 성역으로 남아 있다. 독립투쟁의 근간인 단군과 민족을 금기시하며 척살되어야 할 마귀로 취급하는 집단이 한국고대사학회 같은 친일사학세력이다. 단군과 민족을 얘기한다고 도종환 장관임명저지에 성명서까지 발표해도 처벌받기는커녕 그것이 정상적인 진보집단의 바른 소리라고, ‘한겨레’, ‘경향’, ‘한국’, ‘조선’, ‘중앙’ 등 진보, 수구 언론 할 것 없이 나팔을 불어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우리는 현대사의 근본적인 문제에는 근처도 못가고 있다. 이래놓고 우리가 해방, 광복되었다고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것이 우리가 배우고 있는 현대사의 실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광복, 해방된 적이 없다. 조선총독부가 물러간 자리를 그 밑에서 개, 돼지 노릇하던 세력이 대신 차지하고 서기1945.8.15. 이후 식민통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분단도 실상은 식민지배 연장에 불과하다. 해방 후 외세가 갈라놓았다기 보다는 조선총독부 식민통치의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 실상에 보다 정확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솔직해 지자. 왜곡해서는 안 된다. 현대사를 왜곡해서 가르친 결과 이명박근혜라는 어처구니없는 친일매국정권이 들어섰고 9년 만에 나라가 멸망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시 시작할 때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

인정하기 싫겠으나 지금은 모든 영역에서 조선총독부 개, 돼지들에 의한 식민통치 제2기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광복전쟁중이다. 결코 역사광복전쟁만이 아니다. ‘청산’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친일매국세력과 힘겨루기하다 날 샐 것이다. ‘광복전쟁’차원으로 접근해야 피아가 분명히 구별되어 근본적이고도 빠르게 정상적인 나라를 세우는 진정한 광복이 다가 올 것이다. 우리사회 모든 문제의 뿌리에 친일매국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새끼 일본인인 친일세력을 전쟁차원에서 대처해야 오늘날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모든 부조리가 근본적으로 뿌리 뽑힐 것이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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