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생문

경복궁 동북쪽 궁담 (조선고적도보)

경복궁 동북쪽 궁담이다.
담 왼쪽은 경복궁의 녹산이고, 담장 정상부 쯤에 춘생문이 있었다.
춘생문은 경복궁의 후원으로 들어가는 동북쪽 출입구로 우측의 또다른 궁담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언덕길을 깎아내어 완만한 도로가 되었고 일본식 축대로 마감되어 있다. 우측에는 청와대 춘추관이 자리하고 있다.
 
위와 같이 한가해 보이는 궁궐의 담장에도 큰 사건과 사연이 얽혀있었으니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하고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은 청나라를 누르고 승리를 거둔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청의 간섭을 원천 봉쇄하였다. 또한 청나라와의 전쟁 대가로 요동을 할양 받았다.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모색하던 열강들은 일본의 팽창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이에 독일 프랑스 러시아가 공조하여 일본은 요동을 청에 반납하고 만주에서 물러날것을 요구하였다. 일명 삼국간섭(1895년 4월23일)이다.


당시 일본은 삼국의 열강들과 겨룰만한 전력이 없었던 까닭에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였고, 그 댓가로 4,500만원의 보상금을 챙겼다. 이에 힘입어 러시아 세력이 조선에서 힘을 얻게 되었고, 조정에서 세력을 넓혀 갈 수 있었다. 일본은 일대 국면 전환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1895년 일본은 재기를 위해 절치부심하던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반일 친러정책을 구사하던 명성왕후 민씨를 살해하고 고종을 건청궁에 감금하다시피 하며 친일 정권을 세웠다. 일본은 다시 정권을 장악했지만 일국의 왕후를 살해했다는 도덕적, 인격적 지탄을 받는 입장이 되었다.

 

북궐도형. 우측 상단이 춘생문이다.

건청궁에 유폐되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당하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고종은 일본의 살해 위협에 노출되며 하루하루를 불안속에 살아가야 했다. 고종의 이러한 상황을 눈치 챈 친러파와 친미파 대신들은 국왕을 왕궁으로 부터 탈출 시키고자 하였다. 고종의 밀명을 받았을것으로 예상되는 친러파 이완용, 이범진 등은 왕을 외국 공사관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1895년 11월 17일 수십명의 군사가 건춘문을 통해 경복궁으로 진입하고자 하였으나 경비가 삼엄하여 실패하고 춘생문 쪽으로 진입을 시도 하였다. 내부에서 문을 열어 주기로 약속했던 중추원 의관 안경수가 변절하여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밀고하였고, 친위대 대장 이진호도 서리 군부대신 어윤중에게 밀고하여 궁은 숙위병에게 더 철저히 호위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춘생문 진입에도 실패한 친러파 주동자들은 대부분 사형에 처해졌고 이완용등은 가까스로 몸을 피해야 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외국공관에 홍보하였는데 이를 '국왕 탈취 사건'이라 하였다. 국왕 보호라는 명분을 얻은 일본은 고종을 더욱 압박하였고 고종의 입지는 더욱 약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있은지 석달후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결국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된다. 일본의 보호아래  김홍집 친일 내각은 일세일원 연호사용과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과 단발령을 실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국민 감정을 자극하여 전국적인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 이완용등 친러파는 친위대가 의병을 진압하기위해 지방으로 이동한 틈을 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을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 것이었다.
아관파천은 김홍집 내각의 반대파가 주동하고, 을미사변 때 외국공관으로 피신한 인사들, 그리고 언더우드, 헐버트 등 미국선교사, 또 미국 공사 알렌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파 김홍집,유길준, 정병하, 조희영, 정박 등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 하였다.
 
이로써 친일파는 몰락하고 박정양, 이완용, 조병직, 이윤용, 윤용구 이재정등 친러. 친미파로 내각을 구성 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된 러시아는 산림채벌권, 광산채굴권, 전신 전선 가설권등 경제적 이권을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고 미국은 경인선 경부선 철도부설권등 주요 이권을 싼값에 할양받기에 이르렀다.
 

글 홍철의(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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