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수난사

고종 10년(1906년)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의 정문인 숭례문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일본은 숭례문을 파괴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는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 제거를 추진했다. 심지어 대포로 부숴버리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계획은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1864-1924)의 반대에 부딪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그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다. 조선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숭례문 외에 몇 남지 않았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다"고 설득했고, 이에 하세가와가 받아들여, 숭례문을 전쟁기념물로 남겨놓기로 한다.

 

 

[사진-1] 성벽을 허물기 전 숭례문. 우측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다.(조선고적도보 11권)

 

 

그러나 조선 초대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숭례문을 온전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순종즉위식에 일본 왕세자를 조선으로 초청했다.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된 왕세자는 인천항에서 일본 자본으로 부설된 경인선 철도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이것을 기화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성곽을 헐어버렸고, 헐어버린 성곽 자리에 길을 내어 왕세자가 지나가게 했다.

 

 

  

 

[사진-2] 아치형 문 옆에 ‘일진회’라고 쓰여 있다.(뉴스천지 2015.4.10))

 

 

숭례문 성곽이 헐린 자리에는 도로와 전차길이 생겼다. 다음해인 1908년 남쪽 성벽까지 헐린 숭례문의 위용을 자랑하던, 높이 12미터의 성벽은 이때 사라졌다. 일제는 숭례문 둘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석축을 쌓았으며,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이때부터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사진-3] 봉쇄된 남대문 - 이조건축의 최고령자 (동아일보 1937.12.5) 

 

 

일제시대에 오욕을 겪었던 숭례문은 한국전쟁이후 여당의 게시판으로 사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 자유당 후보였던 이승만과 이기붕은 국보인 숭례문에 대형 초상화를 부착하여 숭례문을 정치도구로 사용했다. 국가의 보물이 손상시킬 수 밖에 없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작태를 당시 신문은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오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의 '남대문'

'남대문'도 마침내 선거바람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숭례문'현판 밑에 '자유당'이란 세글자가 붙어있고

그 좌우편엔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씨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으니...선거때라고 이렇듯 개인의 사진이 고적위에 걸리게 되것도 역사상 처음이려니와...

"서울에 가면 먼저 남산과 남대문을 보게된다"하던 시골사람들도 이젠 "서울에가면 남산과 남대문 그리고 자유당 입후보자들을 보게 된다"고 말하게 되었군...

(동아일보 1956.4.28)

 

 

 

 

 

[사진-4] 선거도 고궁에 한 몫 - 여당 게시판화한 국보 (동아일보 1956.5.3)

 

 

국보 1호 숭례문은 이후 서울 도심이 개발되면서 주변에 고층 빌딩이 세워졌으며, 도로 한가운데에 외로운 섬이 되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사람들에게 격리 된지 98년째 되던 2005년 정부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을 조성하고 단장하여,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근접 개방 허용한지 3년도 되지 않아, 70대 노인의 방화로 인해 숭례문은 석축과 1층 일부만을 남겨놓고 재로 변했다. 우여곡절 끝에 복구된 숭례문은 자신의 일부를 태우는 살신성인을 통해 우리 역사의 어두웠던 시기를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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