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한국을 식민지로 여기고 있는 일본의 극우정권...

일제,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하기 수년전부터 간첩 보내 정보활동...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로 보고하다...

 

식민사학자들,

하나 같이 식민지 노예근성으로 간도와 독도를 바라봄...

백두산정계비 담판으로 간도가 우리 땅임에도 국제법이 없던 때라 효력 없다고...

 

일본의 모두 국가문서가 독도는 일본 땅 아니라는데도,

내부문서에 불과하다며 효력 부정...

 

일제 명치정부의 외무성이 독도는 일본 땅 아니라고 하다...

내무성과 해군성에 이어 외무성에서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외무성에서는 외국과의 국제관계에 관한 많은 보고서와 통상관계 책자 등을 발간하였다. 이중 울릉도, 독도와 관련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国交際始末内探書>, 1902년 발간된 <통상휘찬通商彙纂>제234호 등이 있다.

▲ 일제는 하급사무라이들의 반란으로 수립된 명치정부가 선지 1년 후인 서기1869년 우리나라에 간첩들을 보내 정보탐지활동을 한다. 침략에 앞서, 임진왜란 때에 그랬던 것 처럼 적정을 탐지하여 침략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약 6개월동안 활동한 간첩들의 보고서가 명치정부의 외무성에 책자로 만들어 보고되었다. 이름이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다. 위 책이다. 위 책 오른쪽에 두번째줄의 문장 맨 위쪽부터 보면, '죽도, 송도 조선부속2' 라고 하여 분명히 독도(죽도)가 당시 조선영토임을 시인하고 있다. 위 문서 왼쪽 하단에는 당시 '외무성' 담당자들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는 메이지정부 초기 외무성의 내부보고서이다. 메이지정부는 1869년 교착상태에 빠진 조․일 외교관계를 타개하고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외무성 관료를 내밀히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실상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당시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의 결재를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사다 하쿠보(佐田白茅) 등 외무성 관리들이 약 6개월간 조선에 체류하면서 각 분야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가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이다.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다케시마․마쓰시마(竹島․松島) 조선 부속이 된 시말

이 건에 대해서, 마쓰시마(松島)는 다케시마(竹島)의 인도(隣島)로, 마쓰시마의 건은 지금까지 게재된 서류도 없다. 다케시마의 건에 대해서는, 겐로쿠 무렵 이후(元禄度後) 얼마동안 조선으로부터 거류를 위해 사람을 보내고 있었는데, 당시 이전과 같이 무인(無人)이 되어, 죽목 또는 큰대나무[葭]를 산출하고, 인삼 등도 자연 그대로 나고 물고기도 상응하게 있는 것으로 듣고 있다.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에서 ‘다케시마(竹島)’는 울릉도이고 ‘마쓰시마(松島)’는 독도를 말한다. 동 내탐서에 의하면 ‘다케시마․마쓰시마 조선 부속이 된 시말’(竹島松島朝鮮附属ニ相成候始末)이라는 제목을 붙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만 독도에 대한 내용에서는 ‘마쓰시마(松島)는 다케시마(竹島)의 인도(隣島)로서 자료가 없다’(松島ハ竹島ノ隣島ニシテ松島ノ儀ニ付 是迄掲載セシ書留モ無之)라고 하여, 독도가 조선영토가 된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울릉도에 대해서는 “겐로쿠(元祿) 이후 얼마동안 조선에서 거류를 위해 사람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전과 같이 무인이 되었다”라고 되어있다. ‘겐로쿠’(元祿)는 1688~1704년간 일본의 연호로서 이 시기에 울릉도에서 조업 중이던 양국어민 충돌과 울릉도․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인 안용복사건이 있었다. 동 내탐서에서의 다케시마(竹島)와 마쓰시마(松島)에 대한 인식은 1690년대 안용복사건 당시의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쓰시마(松島)는 안용복사건 당시 독도를 가리켰음은 물론이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마쓰시마(松島) 즉 독도를 울릉도의 인도(隣島)로서 조선영토로 보았다.

 

독도에 몰래 들어와 산물 도적질해 가는 일본 어부들...

메이지시대 일본외무성이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한 근거는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이외에, 외무성이 발간한 1902년의 <통상휘찬> 제234호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02년 10월 일본 외무성통상국에서 발간한 <통상휘찬> 제234호에서는 ‘한국울릉도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리양코島’(독도)가 울릉도 동쪽 50해리에 있고, ‘리양코島’를 일본인들은 ‘松島’라고 부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본도(울릉도를 말함)의 정동쪽 약 50해리에 3소도 있다. 이를 리양코島이라 하며 본방인은 松島라 칭한다. 그곳에 다소의 전복을 산출하므로 본도에서 출어 하는 사람 있다. 그러나 동 섬에 음료수 없으므로, 오랫동안 출어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4~일간 지나 본도에 귀항한다.

독도를 울릉도편에 기록한 것은 울릉도의 부속섬으로서 한국령으로 인식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902년 외무성 <통상휘찬>제234호의 마쓰시마(松島)는 1870년 외무성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의 마쓰시마(松島)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외무성 내탐서의 마쓰시마(松島)가 독도라는 것은 이를 통해서도 입증된다.

심지어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1905. 2. 22)한 후에도 독도를 조선 땅으로 보는 외무성의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1905년 7월 외무성 통상국 편찬 <통상휘찬> 제50호에서도 1902년의 <통상휘찬> 제234호와 마찬가지로 <울릉도현황鬱陵島現況>편에 독도에서의 바다사자 잡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바다사자」라고 칭하는 해수(海獸)는, 울릉도에서 동남 약 25리 위치에 있는 랑코島(독도, 필자 주)에 서식해, 작년 무렵부터 울릉도민이 그것을 포획하기 시작했다.

<통상휘찬>제50호에서는 1904년경부터 울릉도민이 바다사자 포획을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통상휘찬> 제234호와 함께 독도를 시마네현에 불법편입하기 전에 울릉도민이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하고,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해왔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1905년 일본 시마네현에 불법편입한 후에도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보는 외무성의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농상무성 등 기타기관도 독도는 일본 땅 아니야...

1903년 5월 일본 농상무성 수산국에서는 <수산무역요람>을 발간했다. <한국울릉도어업의 상황>이라는 제목의 글에 기록된 독도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도(울릉도, 필자 주)의 정동쪽 약 50해리에 3소도 있다. 이를 리양코島(독도, 필자 주)이라 하며 본방인은 松島라 칭한다. 그곳에 다소의 전복을 산출하므로 본도에서 출어 하는 사람 있다. 그러나 동 섬에 음료수 없으므로, 오랫동안 출어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4~일간 지나 본도에 귀항한다.

내용은 외무성에서 발간한 <통상휘찬>제234호(1902. 10)와 같다. 농상무성에서도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한 것이다.

또한, 농상무성 수산국장이 서문을 쓴 1903년의 <한해통어지침>은 비록 흑룡회가 출판한 책이고, 명칭과 거리가 부정확하지만,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또한 ‘韓海’에 있는 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 절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이 <한해통어지침>에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 마키 보쿠신(牧朴眞)이 추천 서문을 썼다는 것은 곧 농상무성에서도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외에 육군성과 문부성 발간 지도를 통해서도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육군 참모국에서 발간한 <대일본전도>(1877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문부성 발간 <일본제국전도>(1875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무채색으로 되어 있다. 문부성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지학잡지> 제200호(1905. 8)에도 기록되어 있다.

일본해군을 비롯한 메이지정부 각 기관의 독도인식에 대해, <태정관지령>을 발견․공개한 호리 가즈오(堀和生)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결국 19세기 말에 일본해군 수로부 당국이 다케시마(竹島)를 조선령으로 인식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상 요컨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정부가 다케시마(竹島)에 독자적인 관심을 표시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인식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일본정부 관계자․기관 전부가 동도(同島)를 울릉도와 같이 조선령이라고 본 것은 명백한 것이다.

위의 글에서 다케시마(竹島)는 현재의 독도를 가리킨다. 호리 가즈오는 19세기말 일본 메이지정부의 관료와 정부기관 전부가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했음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술하는 바와 같이, 일본어부와 학계에서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1901년부터 점차 왜곡되어 갔다(22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연구교수, 독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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