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국경선은 어디까지인가...

 

우리역사지리는 일제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만든 것...

'맑은' 압록강이냐, '푸른' 압록강이냐...

요동지역은 고려시대까지 우리의 역사 강역이었다.

 

서기2017.5.26.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고려국경선 문제를 다루는 학술발표회가 있었다. 이 학술발표회는 단순히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국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정당을 대표해서 각 당의 국회의원들이 함께 했다. 특히 이날 학술발표회를 개최한 주체가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컸다. 단순한 학술회의가 아니라 국가적인 관심사라는 것이다. 지난번 기사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이날 학술주제 발표를 한 5명의 학자들의 발표 내용을 싣는다.

윤한택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는 첫 발제자로 나서 고려 서북의 국경에 대하여 발표했다. 요나라와 금나라 시기의 압록강을 고증했다. 윤 교수는 압록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한글로는 ‘압록’이라고 하지만 한자로는 압록鴨淥과 압록鴨綠으로 구분해서 사료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편의상 윤 교수는 물수변의 압록강을 ‘맑은(淥) 압록강’이라고 하고 실사변의 압록강을 ‘푸른(綠) 압록강’이라고 구분해서 부르면서, 맑은 압록강은 현재의 중국 요하를 가리킨다고 했다. 그리고 푸른 압록강은 현재 북한 신의주 옆으로 흐는 압록강이라고 했다. 그런데 <고려사> <요사> <금사> <신당서> <무경총요> <동문선> 및 기타 사료에서 이 두강을 혼동해서 쓰면서 역사의 왜곡이 일어났다고 했다.

▲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의 윤학태 연구교수는 자신이 한문에 대해서는 전문가라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1차사료를 분석해 본 결과, 고려의 국경선은 요동이라고 했다.

결국 <요사>나 <금사> 등 동이족 계열의 민족이 쓴 사료에서는 이들 나라와 고려의 국경선은 현재의 요하로 나타나는 맑은 압록강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푸른 압록강은 고려의 후방 방어선 역할을 하는 강이었다고 했다. 따라서 서희가 거란 장군, 소손녕과 영토담판을 해서 가져온 강동6주는 요하지역의 동쪽이라고 밝혔다. 윤 교수는 이러한 실적은 불과 몇 년 동안 집중 연구함으로써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강당주류사학계에서는 해방 후 71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같은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일제 조선총독부가 남겨 놓은 자료만 되풀이 해온 것이 이해 할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인철 경복대학교 교수는 ‘고려중기 동북국경’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특히 고려 예종시기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9개성을 쌓은 곳을 밝혀냄으로써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해 나갔다.

먼저 <고려사> ‘지리지’ 서문을 인용하여 고려 국경선의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고려의 북방 영토는 서북은 당나라 이후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서북은 고구려 지역에 못 미쳤으나 동북은 고구려 영토보다 더 북상했다.”

이 서문을 보면 우리가 알고 이는 고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북의 고려 강역이 고구려 보다 더 넓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관이 개척했다는 9개성이 어디에 있었나이다. 이 교수는 여기에는 세 가지 학설이 있다면서 차례로 소개했다. 함경도 길주 이남설이 그 중 하나인데 이는 소중화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의 견해라고 했다. 특히 서기17세기의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를 내 면서 못을 박았다고 했다. 한백겸은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을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지도까지 그려 붙여 놓아 중화사대주의 사관의 핵심 인물로 손꼽힌다. 이 교수는 이 학설보다 더 축소된 학설이 함흥평야설이라고 했다. 이 학설은 조선총독부에서 내놓은 것이라고 했다. 일제가 우리나라와 만주 식민지 정책에 맞게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와 만주를 영구히 식민 지배를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을 함흥평야일대로 비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지명까지 달아 놨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 경복대학교 이인철 교수는 고려의 동북강역은 두만강에서 8백여리 떨어진 길림성의 대수분하 지역이라고 했다. 문헌과 현지답사를 통해서 확인이 가능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두만강 이북설이다. 이 학설은 이인철 교수 등 이 주장하는 최근에 대두 된 학설이다. 다른 학설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거의 추정으로 만들어진 학설인데, 두만강 이북설은 철저히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사료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교수는 윤관이 개척한 9성이 선춘령과 공험진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이 문헌들의 구체적인 기록을 따라 현지답사를 수차례 했다고 했다. 특히 <용비어천가>에는 선춘령과 공험진에 대하여 거리와 걸린 날수까지 기록해 놓고 있어 현장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현재의 두만강 북쪽의 대수분하 지역을 따라 분포되어 있는 오배촌 그리고 홍석립자촌 지역이라고 결론지었다.

강원대학교 윤은숙 교수는 ‘서기13-14세기 고려의 요동인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특히 요심지역, 즉 요양과 심양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역사 변천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논증했다. 윤 교수는 요심지역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지역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평지가 많아 옛날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유목민족과 정주민들이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 살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써 일종의 국제도시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임을 말해주는 것은 고려인 홍복원의 활동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고려의 관리로 있었던 홍복원은 몽골제국이 쳐들어오자 서경, 안주, 귀주 등 이 지역의 40여개 성을 들어서 항복했다고 했다. 그리고 몽골은 홍복원에게 이 지역의 고려군민만호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했다. 몽골의 원나라가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이 지역이 대대로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고려의 충선왕이 제왕의 신분으로 심양로를 분봉지로 받은 것과 이 지역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 사는 고려인을 고려정부에서 돌려달라고 원나라에게 요청하는 사건도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해다. 더구나 서기1370년 고려 공민왕이 지용수 등과 함께 요양의 요성을 차지하고 이곳은 고려의 땅이며 백성도 고려의 백성이라고 선언한 것은 명백히 이 지역이 고려의 강역이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 강원대학교 윤은숙 교수는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고려 관련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요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고려의 강역임을 논증해 나갔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이 지역이 고려강역임을 밝힌 것은 윤 교수가 처음으로 보인다.

남의현 강원대학교 교수는 ‘명대 한중 국경선은 어디였는가’로 주제 발표에 나섰다. 남 교수는 소중화 조선과 명나라와의 국경선을 서기148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파악했다. 서기1480년 이전에는 남만주의 연산관까지가 우리와 명나라와의 국경선이라고 했다. 이 시기는 고려시대인데 원나라와 고려가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원나라가 명나라한테 망하자, 명나라가 고려와 원의 국경선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기1480년대 이후 소중화 조선이 들어서고부터는 조금 후퇴한 봉황성이 국경선이 되었다고 논증했다. 남 교수는 <원사>를 통해서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했고, 소중화 조선의 최부가 남긴 <표해록>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이어 서기1860년 청나라에서 편찬한 <성경전제비고>의 ‘동변외개간승과설관사의’ 라는 문헌으로 상세하게 고증해 나갔다. 그러면서 서기19세기 초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의 사행기록을 제시하여 소중화 조선 후기까지도 역사의식이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패수가 요동의 서쪽에 있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 요양에 있었다는 것을 밝혔다. 이를 통해서 소중화 조선까지 남만주 일부분까지 우리역사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강원대학교 남의현 교수는 명나라와 소중화 조선의 국경선을 파악함으로써 고려의 국경선을 밝혀냈다.

이날 학술발표회를 인도하며 사회를 맡은 인하대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는 각 발제가 발표를 끝내면 다시 한 번 핵심쟁점을 정리해서 설명했다. 이를 통해서 참석한 시민들이 이해를 쉽게 하도록 도왔다. 복 교수는 지금과 같이 우리의 역사지리강역이 정해진 것은 소중화 조선도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특히 일제의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주도하여 펴낸 <조선역사지리지>, <만주역사지리지>를 보면 이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현행 우리 국사책의 역사지리에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우리 국사책은 일본인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것이다. 복기대 교수는 드러내놓고 강단주류사학계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을 추종한다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 교수가 이날 한 말을 종합해 보면 강단주류사학이 모든 문제의 뿌리임을 지적한 것으로 나온다.

▲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복기대 교수가 일제의 우리나라 역사 왜곡과 날조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날 학술 발표회에서 복 교수는 특히 우리역사지리는 일제 관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주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복 교수는 국경사 문제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님을 강조했다. 고려의 국경사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큰 과제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중국 정부의 동향을 소개하면서 통일이후 중국과의 국경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측에서 최근에 내놓은 국경관련 서적을 하나 소개했다. <說주변역사 話강역변천>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현재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수십 개의 나라와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맨 앞장에서 우리나라와의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중도 상당히 높다고 했다. 그 만큼 중국에서 우리나라와의 국경문제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복 교수는 국경사는 학자들만이 나서서는 안 되고 국가차원에서 철저한 대응을 해야 향후 역사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는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한다고 비판 받은 강단주류사학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식민사학의 한 축으로 비판받은 동북아역사재단의 한 연구위원도 참석해 있었다. 교육부의 학술진흥과에서도 학술진흥과장 등 3명의 공무원이 참석해서 학술 발표가 끝날 때 까지 함께 했다. 주최 측에서는 계속해서 바른 역사를 회복하는 학문성과를 쌓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잘 못 된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로 세우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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