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치밀한 유물날조에 경악할 수 밖에 없다.

 

제1회 ‘미사협’ 학술원 학술대회

 

일제의 대방군=황해도 날조의 진상...

중국사료가 증명하는 후한의 행정기관, 대방군의 위치는?

고구려 안악3호고분 벽화까지 손을 댄 조선총독부?

보이는 쇠말뚝 보다 보이지 않는 쇠말뚝이 더 무서워...

 

 

대방군帶方郡이라는 중국 한나라 행정기관이 있다. 중국 한나라 행정기관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련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방군이라는 이름 자체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고대사나 중국사를 전공한 전문 학자들 외에는 대방군이 우리역사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런데 대방군은 우리와 상관없이 일제에 의해서 우리역사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우리역사의 머리부터 파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소리다. 지금 우리는 일제가 대일항쟁기에 행했던 침략행위를 성토하고 있다. 지금도 일제 침략의 상처로 남은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한 배상문제를 가지고 일본은 다시 한 번 위안부할머니들에게 비수를 꽂고 있다. 사과는 고사하고 돈 몇 푼 쥐어 주고 그것으로 먹고 떨어지라고 한다. 이에 정부가 못하는 것을 민간이 자발적으로 국내외에 소녀상을 세우는 것으로 반격에 나서는 형국이다. 정부는 오히려 적절하지 않다는 등 궤변을 늘어놓으며 방해하고 있다. 세계2차 대전의 전범국 중에서 가해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을 것이다. 피해자인 우리는 오히려 어떤 때는 죄인처럼 느껴질 정도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으로

우리 의식을 여전히 식민통치 중...

이렇게 지금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일제침략의 만행에 대방군이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기에 앞서 침략을 정당화, 합리화시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서기19세기 중후반부터 정한론征韓論을 시작으로 수십 년 동안 침략정당화 이론을 만드는데 국력을 쏟아 부었다. 일본입장에서 보면 황국사관이고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일제식민사관이다. 식민사관의 골자는 이렇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만든 적이 없다. 나라가 섰더라도 자기들 끼리 치고받고 싸우느라 지리멸렬했다. 따라서 외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외세의 식민 지배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서 나라다운 나라가 섰고 문명개화할 수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침략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역사와 우리문헌사료를 철저히 연구했다. 또한 중국역사와 사료도 마찬가지로 파헤쳤다. 이를 통해서 한강 이북은 중국의 식민기관 한사군의 지배를 받았고, 한강 이남의 남부지방은 일본의 식민기관 임나일본부의 통치를 받았다는 한국고대사체계를 완성했다.

▲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기1949년에 발굴된 안악3호분 고구려 벽화. 이 벽화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심하다. 먹으로 써져 있는 이른바 묵서명이 벽에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보면, 중국인 동수라는 관리다. 그러나 묘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앙의  인물 그림을 보면 상황은 정 반대로 바뀐다. 이 고분도 발굴당시 이미 도굴된 흔적이 나왔다(사진출처: 나무위키).

일제의 식민사관 만들기에 기여한

소중화 조선의 중화사대주의 사관...

문헌사료로 이렇게 식민사관을 만들어 낸 일제는 이에 쇄기를 박기위해 고고유물조작에 나선다. 전라, 경상도 지역의 유물들은 워낙 일본과 똑 같아서 그런지 날조, 조작하는 대신에 유물의 선후를 가지고 일본이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지배했다는 이론을 만든다. 이른바 ‘전방후원분’이니, 가야계의 판갑류 철제 옷, 파형동기 등을 통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선후로 따져보아도 모두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북한지역이다. 일제는 중화사대주의 소중화 조선이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을 십이분 활용한다.

소중화 조선이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개국초기부터 국시로 못을 박아 놓은 것을 찾아냈다. 관찬 사서인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한 것이다. 이를 기초로 해서 중국 사료를 끌어다가 꿰어 맞췄다. 그 중심에 중국의 행정기관이자 식민통치기구인 낙랑군과 문제의 대방군이 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제는 유물조작과 위조를 서슴지 않았다. 대방군도 마찬가지다. 대방군을 황해도로 정해 놓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기 위해 유물조작에 나섰다. 이른바 장무이묘다. 그 무덤에서 나왔다는 전돌을 통해서 황해도가 중국 후한의 식민기관, 대방군이라고 했다.

그동안 이 전돌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한 연구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국내 식민고대사학계와 식민고고학계는 두말 하면 잔소리다. 이들은 일제가 내놓은 이 유물을 전혀 의심치 않고 대방군이 황해도라는 증거로 활용해 왔을 뿐이다. 분석, 비판하는 척 하지만 황해도가 대방군이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다.

 

식민사관의 중축,

대방군=황해도 구도, 한방에 날리다...

그런데 이러한 철옹성 같은 대방군=황해도라는 도식을 한방에 깨버리는 연구결과가 나와서 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대방군의 증거로 제시된 전돌이 일제가 날조한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서기2017.5.19.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에 위치한 순국선열유족회 강당에서 미사협(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의 한국바른역사 학술원이 개최한 학술발표에서 이 같은 주장이 나왔다. 문성재 박사가 그 주인공이다.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를 이미 낸 바 있는 우리역사연구재단의 책임연구원인 문 박사는 이날 주제발표에서 문헌학적인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일제가 날조한 것임을 증명했다. 중국 측 원사료인 <한서>, <삼국지>, <후한서>, <통전> 등을 동원해 낙랑군과 위아래로 붙어 다니는 대방군이 한반도 황해도가 아니라, 중국의 요서지역에 있었음을 밝혀냈다.

▲우리역사연구재단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문성재 박사가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미사협 한국바른역사 학술원이 주최한 학술발표회에서 문 박사는 후한의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강단식민사학계의 주장을 뒤 엎는 증거를 제시했다. 대방군은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증명했다.

특히 대방군 남쪽에 있었다는 한韓의 면적이 사방4천이라는 것과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의 거리가 7천리라는 기록에 주목했다. 사방4천리는 아무리 따져보아도 삼한이 우리나라 충청, 전라, 경상도라고 하는 국내 식민사학계의 주장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민사학계는 삼한이 충청, 전라, 경상도라고 하는데 사방4천리는커녕 사방 2천리도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대방군과 구야한국까지 거리가 7천리라는 기록을 더하여 분석해 보면 대방군은 결코 황해도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얼마나 우습게 보았으면

유물날조를 이토록 표시나게 할 수 있을까...

문성재 박사는 이어 일제가 대방군이 황해도라고 증거로 내놓은 이른바 전돌을 분석, 비판했다. 이른바 후한의 대방태수, 장무이묘가 황해도에서 발굴되었는데 여기에서 출토되었다는 여러 전돌에 묘의 주인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문헌사료나 일본 측 연구를 보면 묘 주인의 이름이 장무이묘에서처럼 많이 내온 예가 없다고 했다. 이어 ‘장무이’라는 이름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장무이는 성이 하나고 이름이 두자다. 그런데 당시에 중국에서는 99%가 이름을 하나로 쓰는 외자가 통용되었다고 한다. 장‘무이’처럼 이름이 두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전돌에 새겨진 이름들이 중구난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년도 표기도 엉터리라는 것이다. 년도 표기를 당시에는 ‘천간지지天干地支’로 했는데 천간만 표시하고 간지는 빼버린 년대 표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 후한의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 묘에서 나왔다는 전돌이다.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에 위치했다고 한다. 일제는 한나라가 북한지역을 식민지배했다는 식민사관을 만들기 위해서 이와 같이 유물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문성재 박사에 의하면 모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사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고적도보에서 발췌).

또한 한 개의 묘에서 너무 많은 전돌이 나왔다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한 개의 묘에서 아무리 많이 나와 봤자 서너 개라고 한다. 그런데 장무이묘에서는 수십 점이 나왔다고 했다.

 

안악3호분 주인의 신분 논란,

묵서명 날조증명으로 잠재운 문성재 박사...

문성재 박사는 이외에 고구려 묘인 황해도에서 발굴된 안악3호분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것으로 알려진 안악3호분에는 묘의 주인과 시종들 그리고 당시 생활상을 담은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 먹으로 쓴 문구들이 적혀 있다. 묘 주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먹글씨가 논란의 대상이다. 이 글씨에 의하면 묘주는 고구려인이 아니다. 중국 동진시대 사람인 동수冬壽로 적혀 있다. 문 박사는 이 묵서명도 당시 상황과 어느 것 하나 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일제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진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에는 첫 번째 문구에서 어느 시대 것인지를 알려주는 연호가 나오는데 확실치 않게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이 묵서명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보통 연호는 두 글자로 되어 있는데 이 묵서명에는 앞 글자가 없고 뒷글자인 화和만 보인다고 했다. 이 글자를 ‘영화永和’ 연호로 보아 서기4세기 중반의 동진시대 목제, 사마담의 연호라고 식민사학계에서 본다고 했다. 그런데 이 묵서명에는 사마담이 영화라는 연호를 쓴 시기보다 1년 더한 13년으로 써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일이 증거를 제시하여 누군가 묵서명을 뒤에 일부러 써 넣은 결정적인 증거로 보았다. 또한 묵서명에는 묘주인 동수의 출신지가 유주 도향이라고 나오는데 당시에 평주로 바뀌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묵서명에는 도향이 고유명사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보통명사였다고 한다.

▲ 문성재 박사는 대방군과 왜의 거리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 1차사료를 바탕으로 실제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대방군의 위치는 강단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것 처럼 황해도가 아니라, 중국의 요서에 있었다고 결론내렸다. 이날 학술발표회가 진행된 순국선열유족회 지하강당에는 위 사진 우측 상단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서기19세기 후반 부터 8.15광복때 까지 일제와 투쟁하다 순국한 독립투사들의 영정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묵서명에 나오는 동수의 경력사항도 도마 위에 올랐다. 동수에 대해서 묵서명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야할 당시의 사료에는 동수가 ‘사마司馬’라는 벼슬만 했다는 기록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묵서명에는 창려, 현토, 대방 등의 태수는 물론이고 평동장군, 사지절도독제군사 등 무수한 관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나온다. 묵서명이 사실이라면 중국 사서에 동수라는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이 상식인데 그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사지절도독제군사’라는 관직명도 당시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제군사 앞에는 반드시 형주, 병주, 유주 등 지역명이 붙는다고 했다. 그런데 묵서명에는 이런 형식을 전혀 갖추지 않고 있다.

이외에 문장구조상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관직명을 지적했다. 묵서에는 ‘호무이교위’라고 나온다. 그런데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관직명이라고 했다. 동수가 살았던 당대는 물론이고 그 전인 진한대에서부터 위진남북조시대를 통틀어 이런 식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호이**’ 또는 ‘무이**’ 식의 이름을 쓴다고 했다. 호와 무가 같이 붙어 ‘호무이’라는 식의 이름은 결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누군가 후대에 조작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안악3호분 고구려 고분 벽화의 행렬도. 행렬도의 규모, 군대편제와 무기체계를 보면 전형적인 고구려의 모습이다(사진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문 박사는 그러면서 조금만 눈여겨보면 의심과 모순투성이의 유물들인데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말로 심정을 토로했다. 따라서 대방군이 황해도라는 기존의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며 이와 한덩리인 한사군 재북한설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 했다.

 

안악3호분의 주인은

백라관을 쓴 고구려 태왕이다...

안악3호분의 묵서명이 누군가에 의해 식민사관을 나타내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묘주인의 벽화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글씨는 위조할 수 있으나 그림은 쉽지 않다. 당시 풍습을 세세하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벽화에 쓰인 재료 등에서 위조여부가 쉽게 판명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주가 쓰고 있는 모자를 보면 임금이 쓰는 소재로 되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려전을 보면 고구려의 태왕들은 머리에 백라관白羅冠이라는 모자를 썼다고 분명히 나온다(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 안악3호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관에 정확하게 흰 비단으로 된 관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고구려의 태왕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림이 다른 쪽 벽면에 그려진 군대 행렬 도다. 제왕이 아니고서는 그런 대규모의 군대행렬을 거느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모든 첨단 무기체계를 다 동원해 놓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와 같이 식민사관의 설자리는 이제 없어졌다. 그러나 일제침략의 원천을 제공한 이 식민사관은 해방 이후 오히려 고도로 더 진화하는 양상이다. 평생을 식민사학으로 밥벌이해 온 제도권 강단식민학계가 이렇게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해서 결코 물러날 세력이 아니다. 민족사학계에서 비판을 가하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갖은 수법을 동원해서 생존 술을 발휘한다. 궤변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유명대학 교수, 연구원 그리고 박사학위라는 권위와 기득권을 이용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반격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식민사관이야 말로 일제가 우리의 정수리에 박아 놓고 간 이 시대의 가장 지독한 쇠말뚝이 아닐까. 보이는 쇠말뚝도 뽑아야 하지만, 이제는 이 보이지 않는 쇠말뚝에 더 관심을 갖고 뽑아야 하지 않을까(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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