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저자,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자고?

일본의 모든 공적문서에는 독도가 한국 땅...

그런데도 일본유학 갔다온 자들은 일본과 독도를 공유하자며,

물타기 시도해...

 

일본 해군성은 1889년부터는 <환영수로지>를 더 이상 발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수로지>와 <조선수로지>는 별도의 책으로 구분하여 발간했다. 이 경우 독도를 어느 수로지에 기록하는가 하는 것은 영유권 인식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조선수로지>는 1894년 11월에 발간되었는데, 독도는 <일본수로지>에 기록되지 않고 ‘리앙코르트열암’으로 <조선수로지>에 기록되어 있다. 명칭은 ‘리양’코르트(リヤンコ-ルト)열암에서 ‘리앙’코르트(リアンコールト)열암으로 약간 달라졌다.

리앙코르트 열암
이 열암(列岩)은 서기 1849년 프랑스 선박 「리앙코르트」(Liancourt)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하여 칭호를 그 선박의 이름에서 취했다. 그 후 1854년 러시아 「프레가트」형 함선 「팔라스」는 이 열암을 메나라이 및 오리부차 열암이라고 명명하고, 1855년 영국 함선 「호르넷트」는 이 열암을 탐검하여 호르넷트 열도라고 이름 붙였다. 그 함장 호루시스의 말에 의하면 이 열암은 북위 37도 14분,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하는 두 개의 불모의 바위섬으로서 조분(鳥糞)이 항상 섬 위에 쌓여 있어, 섬의 색이 이 때문에 희다.

북서서(北西彳西)로부터 남동동(南東彳東)에 이르는 길이는 약 1리이고, 두 섬 간의 거리는 1/4리로서 보이는 곳에 암초맥(一礁脉)이 있어 이를 연결한다. 서도(西嶼)는 해면으로부터 높이가 약 410척(呎)으로서 형상은 봉당(棒糖)과 비슷하다. 동도(東嶼)는 비교적 낮고 평평한 정상으로 되어 있다. 이 열암 부근의 수심은 상당히 깊을지라도 그 위치는 하코다테(函館)을 향하여 일본해를 항행하는 선박의 직수도(直水道)에 해당하므로 상당히 위험하다.

 

일본제국주의 정부의 해군성 조선수로지에도 독도는 한국땅...

<조선수로지>(1894)는 ‘해군해도 제95호’를 참고하도록 명시하고 있는데, ‘해군해도 제95호’는 전술한 「일본 혼슈․큐슈․시코쿠 부조선」지도를 말한다. 1886년의 <환영수로지>에 비해 <조선수로지>는 문어체에서 좀 더 구어체로 바뀌었을 뿐 전체적으로 그 내용은 <환영수로지>와 같다. 일본해군성이 <조선수로지>에 독도를 기록했다는 것은 <환영수로지>에서 ‘조선동안’편에 독도를 기록한 것보다 더 한층 분명하게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 <그림 6> 1896년 海軍海圖 제21호 朝鮮全岸지도의 울릉도와 독도 부분. 우측 하단에 리앙쿠르트암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896년에는 다시 해군해도 제21호로 <그림 6>과 같이 「조선전안」(朝鮮全岸)지도를 발간하였다. 발간날짜는 메이지29년(1896년) 4월 15일, 발간자는 수로부장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라고 지도 왼편에 기록되어 있다. 해군해도 제95호와 마찬가지로 울릉도와 독도는 ‘鬱陵島(松島)’, ‘리앙코르트암’(リアンコールト岩)로 각각 표기되어 있고, 그 위치는 현재의 지도와 정확히 일치할 정도로 아주 정밀하다. 해군해도 제95호 「일본 혼슈․큐슈․시코쿠 부조선」지도에는 일본과 조선이 같은 지도에 그려져 있는데 비해, 해군해도 제21호로 간행된 「조선전안」지도는 조선만 따로 지도로 제작한 점에서 다를 뿐이다. 일본해군성은 수로지뿐만 아니라 지도를 통해서도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해군성은 1899년 2월에는 <조선수로지> 제2판을 발간했다. 독도에 관한 내용은 그 전 1894년의 <조선수로지>와 달라진 것이 없다. 독도는 여전히 ‘리앙코르트열암’으로, ‘제4편 조선동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1판에 비해 토씨 정도만 달라졌을 뿐이다. ‘울릉도 일명 松島’편에서는 명칭 옆에 기록되었던 ‘해군해도 제54호, 제95호를 볼 것’은 ‘해군해도 제21호, 제95호를 볼 것’으로 바뀌었다.

리앙코루트列岩
이 열암(列岩)은 서기 1849년 프랑스 선박 「리앙코르트」(Liancourt)가 처음으로 이를 발견하여 칭호를 그 선박의 이름에서 취했다. 그 후 (중략) 울릉도 일명 松島 海軍海圖 제21호, 제95호를 볼 것 (이하 생략)

해군해도 제95호는 전술한 「일본 혼슈․큐슈․시코쿠 부조선」지도를 말하며, 제21호는 「조선전안」지도를 말한다. 1899년 당시 수로지와 해도(海圖) 양면에서 상호 연계시켜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식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1880년대 해군수로부의 <환영수로지>와 1890년대의 <조선수로지>, 해군해도 제95호 「일본 혼슈․큐슈․시코쿠 부조선」지도(1891년), 해군해도 제21호 「조선전안」지도(1896년)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독도의 명칭과 독도의 영유권귀속에 대해 일본정부 해군성의 공식적인 자료는 일관되게 독도의 명칭은 ‘리앙코르트열암’, 독도의 영유권 귀속은 조선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에 강탈해 간 독도,

그 이후에도 <오키도지>에는 독도는 조선 땅...

일제 강점기에 발간된 <오키도지>(隠岐島誌, 1933년)는 메이지 초기 일본 해군수로부의 수로지와 해도(海圖)에 독도를 조선영토로 기재하게 된 경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경위에 대해, 전술한 지리학자는 태정관정원 지지과에서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서(1905. 8 <지학잡지>제200호), <오키도지>는 착오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해군수로부(海軍水路部)의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및 해도(海圖)에 ‘울릉도 일명 다케시마(竹島: 松島를 잘못 기록, 번역자 주)’로 오전(誤傳)된 이래, 마쓰시마․다케시마(松島․竹島)의 명칭의 혼동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2개 섬이 공히 절해의 고도임을 이유로 학자의 것을 답사함이 없이, 무학(無學)인 어부의 말을 듣고, 상상적으로 일본해중에 마쓰시마․다케시마(松島․竹島)의 2도가 있다는 억설(臆說)에 의해, 리앙코르트암은 구기(舊記)의 다케시마(竹島)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인되어, 그래서 다케시마(竹島)는 겐로쿠(元禄) 이래 조선의 소속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리앙코르트암을 조선의 판도(版圖)에 넣어서 해도(海圖)에 표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경위에 대한 사실여부는 논외로 하고, 어쨌든 메이지 초기 해군수로부가 독도를 조선 땅으로 인식한 것은, 지방정부 편찬자료인 <오키도지>에 의하여도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교수, 독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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