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에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실컷 두드려 팼다. 그의 신분을 말해줄 단서는 아무것도 없다. 거의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이 피투성이가 된 그는 쓰레기처럼 길가에 버려졌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조금 있다가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가까이 다가가 보살펴 주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다. 등장인물은 모두 5명. 강도와 강도 만난 자, 그리고 강도 만난 자를 보게 된 세 명의 여행자가 전부다. 아니 강도도 처음부터 강도짓을 할 생각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저 여행 중에 돈이 떨어져 우발적으로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강도 만난 자 역시 처음에는 단순 여행자였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의 정체는 모두 여행자라고 해야 맞겠다.

 

여행자와 선한 사마리아인

어차피 모든 인간이 지구별에 온 여행자라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일 것이다. 험한 인생길을 걷다 보면 더러는 강도가 되기도 하고, 또 더러는 강도 만난 자가 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다. 저마다 바라기는, 자본의 힘을 빌리든 신의 은총에 기대든, 아무쪼록 고난을 요리조리 피하고 싶어 할 테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렇게 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관장하는 거룩한 일을 한다는 핑계로 고난의 현장에 눈을 감았다. 그들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간 것은 얼마든지 율법으로 정당화될 만한 일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피를 만지거나 시신을 만지는 행위는 사람을 부정(不淨) 타게 만드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 금기를 어기고 부정의 멍에를 뒤집어썼다. 무슨 영웅심 때문이 아니다. 단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 홀려, 강도 만난 자가 동족인지 아닌지조차 따지지 않은 채 무조건 자비를 베풀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예수에게서 ‘선함’의 표본으로 칭송받은 데 반해, 예수의 청중인 유대인들에게는 분노를 자아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뒤를 잇는 제3의 인물은 당연히 유대인 평신도여야 할 텐데, 뜬금없이 사마리아인이 웬 말인가.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한라에서 백두까지 만큼이나 멀다. 한데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의 구원자로 등장하고 있으니, 듣는 유대인의 심사가 얼마나 뒤틀렸겠는가 말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자는 선동에 유대인들이 우르르 몰린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다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을 생각한다. 세 사람 모두 강도 만난 자를 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돌본 사람은 사마리아인밖에 없다. 나머지는 ‘거의’ 죽은 사람을 ‘이미’ 죽었다고 판정한 반면, 사마리아인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판정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난민들이 산송장처럼 지구촌을 헤맨다.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이미’ 죽었다는 사형선고가 속속 내려지고 있다. 그러한 판결에는 나름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쩔 텐가. 선(善)의 언어는 명백히 ‘아직’인 것을!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사랑해야지. 아직 살아있을 때, 행동해야지. 내 눈은 무엇을 보는가. 제대로 보기는 하는가. 행동하지 않는 ‘봄’은 봄이 아니다.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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