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전서, 금석문은 고대요수는 난하 또는 그 서쪽이라고 하다...

미사협 청주강연 심백강의 사자후(2)

 

‘한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강단사학계,

그렇다면 ‘사고전서’를 통해서 바른 역사 보여 주겠다...

 

지난 서기2017.4.7. 충북 청주시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미래로가는 바른역사 협의회(미사협)가 주최한 바른역사 순회강연 청주편이 진행되었다. 이날 강사로 참여한 민족문화연구원 심백강 원장은 사고전서에 나오는 새로운 자료를 선보였다. 특히 조선의 서쪽 강역으로 가늠되는 고대의 요수 위치를 밝혔다.

심백강 원장은 이처럼 사라진 우리의 대륙역사를 ‘사고전서’를 통해서 찾아냈다. ‘사고전서’는 국내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어 관련 연구자들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심원장 처럼 찾아내서 정리하는 학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역사에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조선의 대륙역사를 찾아내는 단체나 인물은 심백강 원장 외에는 현재까지 보이지 않는다. 심백강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중국 정사류는 명. 청대에 정치권력의 입맛에 바꾸었을지는 몰라도, 외전으로 내려오고 있는 시가집, 문집은 손이 덜 탔다고 했다. 심원장이 ‘사고전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사고전서’가 나오기 전에는 사료들이 다 흩어져 있어 관련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다. 역사연구에서 사실상 중국25사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때 중국인 학자 3천여 명을 동원하여 십년이 넘게 연구하여 정리한 사고전서(8만권수록) 덕분에 손가락 몇 번 움직여 필요한 사료를 다 얻게 된 것이다. 강단식민사학계에 의해서 위서, 가짜로 취급받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참역사가 ‘사고전서’에 나오는데 수레로 가득한 분량만큼이나 된다고 했다.

특히 ‘사고전서’에는 시가집, 문집류까지 실려져 있다. 그런데 정치권력이 정사류는 왜곡했을지는 몰라도 당나라 왕들이 직접 쓴 시는 바꾸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당나라 왕이 남긴 시문을 통해서 오히려 대륙에 존재한 조선의 위치를 확인 할 수 있다고 했다. 심원장은 이러한 시 몇 수를 직접 수첩에 적어 와서 칠판에 적으면서 생생한 조선의 역사를 밝혀 나갔다.

먼저 ‘무경총요’를 꺼내 들었다. 북경에서 고북구를 가는데 조선하를 건너간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씨조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의 조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경총요’는 지금으로부터 1천여 년전에 나온 사료다. 조선이 중국 북경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했다. ‘태평환우기’에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는 조선성이 있었다고 나온다고 했다. 북경과 하북성 지역에 조선하가 있었고 조선성이 있었다면 거기 조선 땅이 아니였냐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은의 비석문도 제시하였다. 비문에 ‘조선건국고죽위군朝鮮建國孤竹爲君’이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선비족 모용은의 비문에 조선이 나온다는 것은 선비족 자신의 뿌리가 조선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 백이숙제의 고죽의 임금이라고 표시한 것을 통해서 조선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고죽은 현재 하북성의 난하인근으로 나온다. 조선이 중국하북성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비문은 지금으로부터 1천5백 년 전의 남북조시대 유신이라는 사람이 쓴 비문이다.

 

▲ 심백강 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새롭게 찾아낸 시문헌을 통해서 고대 요수는 현재의 북경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심백강 원장은 산해경을 통해서도 조선이 대륙에 있었음을 밝혔다. 먼저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이름에 주목하여 책에 경이라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산해경이라고 한 것은 최고의 책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산해경山海經은 서기전 6세기경에 차이나China의 산과 바다의 지리를 기록한 최고의 책을 말하는 것이다. 동양에서 최초로 나온 지리서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산해경에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위치상으로 볼 때 오늘날 차이나의 발해 모퉁이로 하북성 동북방향이라고 했다. 심백강 원장은 맹자에도 북해를 발해라고 하고 있다며, ‘산해경’의 북해는 발해라고 고증했다.

심백강 원장은 수양제가 요해에서 전쟁하다 죽은 자의 장례를 치러 줬다(收葬遼海戰亡詔)는 조서를 통해서도 조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조서의 요해가 발해라고 했다. 왜냐하면 차이나에서 볼 때 멀리 있는 바다를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서의 내용을 보면 요서군 에다가 분향소를 차리고 죽은 자를 제사지냈다고 한다. 강단식민사학계의 주장처럼 수양제가 대동강유역의 평양을 치다가 대패해서 수나라 병사들이 죽었다면 압록강 유역 서쪽 지역에서 장사지내고 제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요서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것은 결코 현재의 평양이 당시 고구려의 평양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고 했다.

심백강 원장은 당나라 때까지 요수가 어디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도 제시했다. 당나라 왕, 세민이가 요동성을 침략하고 나서 쓴 시가 전해오는데 그 속에 결정적인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당나라 왕이 직접 쓴 시라 후대에 누가 개작을 하거나 변조했을 수 도 없다고 했다.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요동성에서 달을 바라보다: 검은 달빛이 휘영청 밝다. 맑은 빛이 요수와 갈석을 비춘다. 말을 멈추고 환도를 굽어본다. 우두커니 서서 요망한 기운이 멸하기를 관망한다(遼城望月: 玄免月初明 (맑을)증輝照遼碣 駐蹕佑丸都 竚觀妖氣滅).”

세민이가 요동성을 무너뜨리고 요동성에 올라 쓴 시다. 여기서 요갈遼碣이 나오는데 이는 요수와 갈석산을 말한다. 이는 요수와 갈석산이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갈석산은 아무리 동쪽으로 이동해도 하북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의 난하 하류 동쪽에 표시되어 있다. 이 갈석산을 기준으로 볼 때 당시 요수는 난하이 거나 더 서쪽의 어떤 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다음 구절에는 말을 멈추고 환도성을 굽어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환도성도 이 요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구절에서 요기妖氣가 멸망하기를 관망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요기는 고구려를 가리킨다는 것이 심백강 원장의 설명이다.

심백강 원장은 이러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동안 제도권 강단식민사학계가 주장하는 것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냐며 질타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자료 몇 개만 가지고 70년 동안 되풀이 할 뿐, 이러한 연구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명나라와 청나라 때 사료를 다시 인쇄하고 찍어내면서 글자를 바꾸고 뺏기 때문에 이러한 당왕 세민이의 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심백강 원장은 강연을 마치면서 우리역사가 바뀌려면 우리의 의식과 생각이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역사의 지평을 반도에서 대륙으로 넓히면 우리의 의식과 생각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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