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만남이다. 숙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만남, 우연한 만남이 있다.

미사협 청주강연 심백강의 사자후(1)

 

"역사란 무엇인가,

사건과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이 결합한 것이다."

일본은 황국사관, 중국은 중화사관,

그렇다면 우리는?

 

 

“조선(단군)이 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중국 사료에 넘쳐나는 것이 대륙에 존재했던 조선자료다.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북한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이제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중국의 사고전서를 보면 낙랑군은 대륙 하북성지역으로 나오지 결코 북한평양이 아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북한평양이라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자료들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강단주류사학은 조선을 북한 평양에다 그려놓고 그게 우리역사라고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는 대륙 조선(단군)의 증거를 보여주면 ‘아이고 고맙다’고 하며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우리역사를 반도로 축소하는데 더 힘을 쏟고 있다.”

민족문화연구원 심백강 원장이 서기2017.4.7. 충북 충주대학교에서 미래로가는바른역사협의회(미사협)가 개최한 바른 역사 전국순회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미사협 바른 역사 순회강연은 올해 들어 지난 1월 전남광주를 시작으로 벌써 4번째다. 심백강 원장은 지난 3월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개최한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이 참여하는 상고사 토론회에서도 이제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대륙의 역사를 밝힌 바 있다. 당시 토론회에서 심 원장은 우리 상고사의 중요쟁점인 요수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번 미사협 충주강연에서는 이 연장선상에서 강연을 진행했다.

미사협 공동대표이기도 한 심 원장은 본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만남과 역사 그리고 식민사관이 무엇인지 역설함으로써 청중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심원장의 인생관이 깊이 들어가 있는 인생철학 자체였다. 직접 들어본다.

 

인생은 만남...우리는 어떤 만남인가...

“인생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부모형제와의 만남은 숙명적인 만남이다.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을 숙명이라고 한다. 숙명의 숙宿자는 ‘같이 잔다’ , ‘하룻밤 묵는다’는 숙자이다. 여기에 숙명의 명命자는 ‘목숨’, ‘운수’, ‘명령’을 내린다는 명자다. 같이 자도록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 의지가 작용할 수 없기 때문에 숙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모형제의 만남은 숙명이다. 사람이 성장해서는 부부가 되어 만난다. 우리는 이것을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한다. ‘움직인다’, ‘돌린다’는 운運자에 명령한다는 명자이다. 이는 의지에 따라서 절반은 바뀔 수 있는 만남을 뜻한다. 부모는 싫다고 안할 수도 없고 물릴 수도 없다. 그러나 부부의 만남은 나의 의지가 절반은 작용된다. 어떤 배우자를 만날 운명인가를 따져 볼 때 내 의지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를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한다.

또한 사제 간의 만남도 있고 친구간의 만남도 있다. 또한 좋은 만남도 있고 좋지 않은 불우한 만남도 있다. 이를 통해 인생이 만들어져 간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만남은 숙명도 아니고 운명도 아니다. 단지 우연한 만남일 뿐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만남이 바른 역사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좋은 만남이 될 수 있다. 역사를 통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다면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 이와 같이 역사를 통해서 바른 역사관을 나눈다면 우리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으로 승화될 것이다.

▲ 민족문화연구원 심백강 원장은 이날 미사협 충주 강연에서 강단식민사학계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 몇개만 울궈먹으면서 70년 이상 우리역사를 왜곡해 오고 있다고 질타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돈, 권력, 황금일까, 아니다. 시간이다. 시간은 곧 생명이다. 스티브 잡스가 암에 걸려 아무리 살려고 모든 재산을 쏟아 부어도 살수가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돈을 아무리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있었어도 결국 죽음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시간이 중요하다. 그러면 역사란 무엇인가? 어떤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역사다. 아무리 대단한 사건이 터져도 기록하지 않으면 그것은 흘러갈 뿐이지 역사가 되지 않는다. 기록을 하려면 문자라는 도구를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문자로 기록된 것이 역사다. 그렇다면 문자가 스스로 사건을 기록할까? 아니다. 사람이 문자를 통해서 사건을 기록한다. 그래서 역사는 사람과 시간 그리고 사건이 결합된 것이다.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 박근혜탄핵정국에서 촛불봉기와 태극기로 대표되는 탄핵반대세력이 다투었다. 이 대사건도 춧불봉기의 입장에서 보느냐, 탄핵반대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역사는 완전히 다르게 기록된다. 사관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또한 사건과 사관의 결합물이다. 이처럼 역사는 스스로 역사가 되지 못하고 사람의 손으로 기록되어야 역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그 역사가 달라진다. 결국 역사는 사건과 이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의 사관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에게 사관은 있는가...

그렇다면 식민사관은 무엇인가, 일본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고 기록한 것이 식민사관이다. 사대사관은 중국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며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의 역사관은 중화사관이고 일본의 역사관은 황국사관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사관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71년이 넘어가는데도 식민사관을 청산 했는가 못했는가를 가지고 싸우기만 하고 있지 사관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가 천손이라면 천손사관을 정립하던가, 홍익민족이라면 홍익사관을 정립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그러면 식민사관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역사의 뿌리를 잘라버리고 위만조선부터 우리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군을 신화라고 하고 실제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일본사람들이 주장한 식민사관이다. 또한 공간적으로도 대륙의 우리 역사를 잘라버리고 압록강 이남의 대동강 유역으로 조선을 아주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 식민사관이다. 구체적으로는 대동강 낙랑설이다. 위조와 날조의심이 많은 낙랑 유물을 가지고 정해 놓은 것이다. 이는 단절과 축소를 의미한다. 식민사관은 우리민족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가르친다.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백날 자기들 끼리 싸우다 끝난 역사’라고 가르친다. 밖으로 나가서 중국과 대등하게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단절, 축소, 왜곡이 식민사관이다.”

심 원장은 이렇게 역설을 한 뒤 우리역사를 오늘날과 같이 왜곡한 한 축으로써 이성계 조선을 지목했다. 소중화 사대주의를 국시로 하면서 대륙의 역사를 왜곡해서 반도의 역사로 기록해 놨다는 것이다. 그 간접적인 증거로 세조와 예종 때의 민족주체사서의 수거령을 들었다. 이미 이 같은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대상은 극히 한정적이다.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다. ‘안함로 삼성기’ ‘고조선 비사’ ‘표훈천사’ 등이 수거령의 이름에 들어가 있다. 이외에 우리 사료에는 ‘북부여기’, ‘단군세기’가 있다. 이러한 사료들을 심원장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쓴 ‘정식사료’라고 했다. 특히 ‘한단고기’를 강조하며 이 사료가 우리역사의 정통사료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병도와 같은 식민사학자들이 우리역사학계를 장악하지 못하고 우리민족사학이 사학계의 주류가 되어 있다면 ‘한단고기’ 같은 민족주체사료가 정사의 위치로 올라와 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역사학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삼국사기’, ‘고려사’, ‘삼국유사’ 등은 사대주의 사관에 물든 왜곡된 사료라는 얘기다.

 

명.청, 우리가 못나서 역사왜곡하게 하다...

우리역사를 우리가 이렇게 왜곡 했지만, 명나라와 청나라도 자신들의 사료를 왜곡해서 자국 우월주의에 맞게 고쳤다고 했다. 심백강 원장에 의하면 정식사료도 고쳤다고 한다. 민족이나 나라에 흥망성쇠가 있듯이 역사에도 흥망성쇠가 있다고 하면서 조선이 2천년이 넘게 역사가 진행되다가 쇠하자 한나라 유방이 들어서면서 중국 한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처음에는 있었어도 미미했다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 청나라시대에 와서는 우리가 명. 청의 신하국가, 속국이 되어 볼품없는 반도국가로 전락하자 심하게 왜곡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대의 역사로 가보니까, 자기 속국이 대륙을 지배한 것으로 나와서 왜곡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 이름이 중국 정사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원래 중국 정사류에도 단군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유사’의 고조선기에 나온다. 일연은 고조선기를 쓰면서 단군의 조선을 당시에 존재한 중국 사료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중국의 ‘위서’에 나오는 단군기사를 끌어다 쓰고 있다. ‘위서에 이르길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수도를 아사달로 정하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이때는 중국 요임금 원년과 같다(魏書云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立都阿斯達開國號朝鮮與高同時).’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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