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19세기말, 조선민들의 독도 어류채취역사가 독도는 한국땅임을 말한다.

 

독도야 미안해 16

서기19세기말 독도는 어떻게 관리 되었을까...

태종, 세종때 울릉도 금지령 이후 4백년이 훌쩍 지나서야 해금정책해제되다...

 

 

고종의 울릉도 개척령과 독도 관할을 칙령으로 공포

안용복사건 이후 조선에서는 여전히 울릉도 거주를 금지했지만, 정부에서 관리를 보내어 울릉도 일대를 순찰하고 점검하는 수토(搜討)정책이 시행되었다. 울릉도의 수토는 매 2~3년마다 삼척영장(三陟營將)과 월송만호(越松萬戶)가 교대로 하였는데 실제 현지 바다사정 등으로 수토가 지연되기도 하고 형식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울릉도 수토에도 불구하고 동해안 및 남해안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근해로의 출어와 벌목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1881년 5월 울릉도 수토관의 보고를 근거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고종에게 올린 보고는 울릉도에 대한 수토정책의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박해철이 통리기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 임한수(林翰洙)의 장계를 보니, 울릉도 수토관(搜討官)의 보고를 일일이 들면서 말하기를, ‘순찰할 때에 어떤 사람이 나무를 베어 해안에 쌓고 있었는데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 7명이 그 곁에 앉아 있기에 글을 써서 물어보니, 「일본 사람인데 나무를 베어 원산과 부산으로 보내려 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일본 선박이 요사이 대중없이 오가며 이 섬을 눈독 들였으니, 그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통리기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봉산(封山)은 원래 중요한 땅이고 조사하는 것도 정해진 규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남몰래 나무를 베어서 가만히 실어가는 것은 변방의 금법에 관계되므로 엄격하게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서계(書契)를 지어 동래부의 왜관에 내려 보내서 외무성에 전달하게 하소서.

다만 생각건대, 이 섬은 망망대해 가운데 있는데 그대로 텅 비워 두는 것은 대단히 허술한 일입니다. 그 형세가 요충지가 될 만한가, 방어를 빈틈없이 할 수 있는가를 응당 두루 돌아보고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본 아문에서 천거한 사람인 부호군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檢察使)로 차하하여 정관(政官)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어 하비하여 가까운 시일 내로 달려가서 철저히 헤아려 보고 의견서를 작성하여 보고하게 하여 품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강원감사 임한수는 일본인이 울릉도의 삼림을 함부로 벌목하고 일본선박이 울릉도를 왕래하고 있다는 수토관의 보고를 받고 통리기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도록 건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리기무아문은 이러한 실태를 국경침범으로 간주하고 동래부의 왜관을 통해 일본 외무성에 항의 문서를 보내고, 망망대해 가운데 있는 울릉도를 비워두는 것은 대단히 허술한 일이니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하여 그 형세를 살펴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고종이 승인함으로써 오랜 기간 계속되어 온 울릉도 거민 쇄출과 수토정책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울릉도검찰사로 임명된 이규원은 일행 102명과 함께 1882년 4월 30일부터 5월 10일까지 11일 동안 울릉도에 체류하면서 세밀하게 조사한 결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소중화 조선정권의 울릉도 입도금지에도 불구하고 체류민 140명 존재...

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에 의하면 그동안 정기적인 수토정책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에 체류자는 조선인이 140명, 일본인도 78명이나 되었다. 울릉도 체류민 140명 가운데에는 전라도 출신이 115명으로서 82%이었다. 울릉도에 전라도인이 많았다는 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거문도인들이 오래전부터 울릉도와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했다는 기록과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석도石島’,‘독도獨島’라는 명칭이 ‘돌섬’의 전라도 방언인 ‘독섬’에서 유래한다는 주장도 뒷받침한다.

고종은 울릉도를 검찰하고 돌아온 이규원이 1882년 6월 5일 국왕에게 복명하는 자리에서 일본 측에 항의서계를 보냄은 물론이고, 울릉도 개척을 속히 서두를 것을 명하였다. 이른 바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것이다.

내륙인의 울릉도 이주는 울릉도 개척령 이듬해인 1883년부터 이루어졌다. 조선 태종・세종대 울릉도 거주를 금지한 거민 쇄출 정책이 실시된 후 처음이었다. 울릉도 개척령과 이에 따른 내륙인의 울릉도 이주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 일대를 지속적으로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1883년 4월 약 30명이 이주하고, 뒤이어 약 20명이 이주했다. 이와 같이 해서 두 차례 이주한 인원은 16호 54명이었다.

울릉도 개척령 이후 조선인이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한 사실은 울릉도에 이주한지 60년 된 홍재현의 증언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당시(1947년) 85세의 홍재현은 울릉도 개척 당시(1883년)에 울릉도민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미역채취와 바다사자 포획을 위해 독도에 여러 번 출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라는 것은 본도 개척당시부터 도민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 나도 당시 김양윤(金量潤)과 배수검(裵秀檢) 동지들을 작반(作伴)하여 거금(距今) 45년전(묘년)부터 사오차(四五次) 감곽(甘藿)채취 엽호포획차(獵虎捕獲次)로 왕복한 예가 있음

- 최후에 갈시는 일본인의 본선을 차임(借賃)하여 선주인 촌상(村上)이란 사람과 대상(大上)이란 선원을 고용하여 가치 포획을 한 예도 있습니다.

 

▲ 전남 여수시 남단에 있는 거문도, 전라도 주민들은 서기17세기 경부터 이 거문도에서 동해의 울릉도까지 왕래하며 어로활동을 하였다. 또한 울릉도를 거점삼아 독도를 뗏목타고 가서 전복과 바다사자 등을 잡았다(사진: http://dilbelau.hamazo.tv/c576416.html).

울릉도와 독도는 정권이 아니라, 민초들이 지킨역사...

홍재현의 증언에서 묘년(卯年)은 계묘년(1903)을 말한다. 즉, 홍재현은 1903년부터 4~5차례 미역채취와 바다사자 포획을 위해 김양곤, 배수검 등과 독도를 왕래했으며, 마지막에는 일본인 배를 빌려 선주 무라카미(村上)와 선원 오가미(大上)를 동반하고 바다사자 잡이를 했다고 증언했다.

최근에는, 거문도인이 오래전부터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서 바다사자 잡이와 미역, 전복 등을 채취한 내용의 신문기사가 발견․공개되었다. 1962년 3월 20일자 <민국일보>에 게재된 당시 87세 김윤삼의 증언에 의하면 김윤삼 일행은 1895년부터 1904년까지 천석짜리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서 다시 땟목으로 갈아타고 독도에 가서 바다사자 잡이를 하고 미역, 전복 등을 채취했다. 또한 김윤삼의 할아버지 때인 1822년부터 거문도 주민들은 독도에서 바다사자 잡이를 한 사실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전라도 주민들이 어떻게 울릉도와 독도를 지켰을까...

金노인이 20세(1895년)되던 여름철에 「천석짜리」 무역선 5․6척이 원산을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여 그 울창한 나무들을 찍어 뗏목을 지었다. 날이 맑은 때면 동쪽바다 가운데 어렴풋이 보이는 섬이 보였다.  나이 많은 뱃사공에게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저 섬은 돌섬(石島=獨島의 별칭)인데 우리 三島(巨文島)에 사는 金致善(지금부터 1백40년전) 할아버지 때부터 꼭 저 섬에서 많은 「가제」를 잡아간다고 가르쳐주었다 -지금 그 金致善씨의 증손 金哲修(57세)씨가 長村부락에 살고 있다- 일행 수10명은 원산등지에서 명태등을 실은 배를 울릉도에 두고 뗏목을 저어 이틀 만에 약2백리 되는 「돌섬」에 도착했다. 섬이 온통 돌바위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한다.

돌섬은 큰 섬 두 개 그리고 작은 섬이 많이 있었는데 큰 두 섬 사이에 뗏목을 놔두고 열흘 남짓 있으면서 「가제(海狗=옷도세이)」도 잡고 미역, 전복 등을 바위에서 땄다. 그리고 울릉도에 다시 돌아와 釜山이나 대마도로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팔았는데 「가제」를 퍽 좋아했다한다. 「가제」의 살은 먹고 가죽을 가지고 신발등도 해 신었다한다.  그가 마지막 다녀온 것이 28세 (1904) 때라 하는데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 후에는 「돌섬」에는 못 갔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現在 西島里 金允植(35세)씨집 재목은 옛날 울릉도에서 가져온 松木이라한다. “우리가 잡은 가제를 일본 사람들이 돈과 물건을 주고 사갔는데 그 때 일본사람들은 돌섬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으며 돌섬에서 일본 배조차 본 일이 없는데 그 섬이 일본 섬이라니 고약한 일이라고 김노인은 흥분하는 것이었다.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교수, 독도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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