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만 교수가 고발하는 국내 친일간첩들, 이대론 안돼....

독도야 미안해11

지난 서기2017.2.25. 삼태극(국사광복단) 정기역사강의모임에서 정태만 박사(인하대 교수)는 독도문제에 대하여 독도를 침탈하는 일본보다 더 무서운 세력이 국내에 포진해 있다고 했다. 일본이야 자기네의 국익을 위해서 독도를 근거없이 침탈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일본편을 들고 있는 세력이 독도를 일본에 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국방부 안에도 학자의 가죽을 쓰고 교묘하게 일본편을 드는 인물이 있다고 했다. 정태만 박사의 '독도는 우리땅 11'을 계속해서 싣는다(편집자 주).  

 

 

일본 명치정부(서기1868명치유신)에서 발행한 <태정관 지령>에 나오는 ‘외일도’,

일본은 독도가 아니라고 우기지만,

독도라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외일도'의 명칭 ‘마쓰시마(松島)’

시마네현(島根縣)질의서의 부속문서, ‘유래의 대략’(原由ノ大畧)에서는 울릉도에 대한 설명에 이어 “다음으로(次ニ) 일도가 있다(一島アリ). 松島라 부른다(松島ト呼フ)”라고 기술하고 있다. ‘외일도의 명칭=松島’라고 하는 문장 하나 만으로도 '외일도'가 독도라는 근거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일본 에도(江戸)시대 17세기부터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 또는 ‘이소다케시마(磯竹島)’로, 독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태정관지령>의 일부를 구성하는 시마네현(島根縣) 질의서에서는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家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유래의 대략’과 「기죽도약도」를 작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다음은 ‘유래의 대략’(原由ノ大畧)의 맨 끝부분이다.

 

"금번 오야(大谷)가에서 전하는 향보(享保)년간(1716~1735년)에 만든 지도를 축사(縮寫)하여 이를 첨부한다. 또한 양가(兩家)가 소장하는 고문서 등은 나중에 등사(謄寫)가 되는 것을 기다려 완비하기로 한다."

 

오야․무라카와 양가의 기록은 바로 17세기에 울릉도를 ‘죽도’로, 독도를 ‘송도’로 부르던 당시의 기록이다. 과거에는 일본에서도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인식하여, 송죽(松竹)의 한 쌍을 의미하는 송도와 죽도로 이름 붙였다.

독도를 송도로 표기한 일본 고문서는 <隠州視聴合紀>(1667),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1696), <竹島之書附>(1724), <竹嶋紀事>(1726), <因幡志>(1795), <竹島考>(1828), <磯竹島事略>(에도시대), <伯耆志>(1868년경), <竹嶋渡海由來記拔書>(1868), <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1870) 등이 있으며, 독도를 松島로 표기한 고지도로는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1696), 「竹嶋之図」(1724), 「竹島考圖說 竹島松島之圖」(1828년) 등이 있다. 일본 에도시대 울릉도, 독도에 관한 기록은 전부가 다 울릉도를 ‘竹島’로, 독도를 ‘松島’로 표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태정관지령>의 ‘松島’는 기록상 1667년의 <은주시청합기>부터 메이지(明治) 초기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독도를 가리키는 명칭이며, 또한 민간인인 오야가(大谷家)부터 시작하여 지방정부인 시마네현, 중앙정부 소관부처인 내무성과 중앙부처 최고기관인 태정관이 공통적으로 인식한 명칭이다.

<태정관지령>의 ‘松島’가 독도라는 것은 조선의 기록에 의하여도 입증된다. <숙종실록>에서는 ‘송도는 자산도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松島卽子山島, 此亦我國地)’이라 하여 당시 일본 어민들에 대한 안용복의 주장을 인용하여 일본의 松島는 子山島, 즉 독도임을 밝히고 있으며,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등에서는 ‘鬱陵ㆍ于山은 모두 于山國 땅이며, 이 于山을 왜인들은 ’松島‘라고 부른다(欝陵于山皆于山國地于山則倭所謂松島也)’라고 하여 일본에서 말하는 松島는 조선의 우산도, 즉 독도에 해당함을 밝히고 있다. 요컨대, <태정관지령>의 ‘외일도’는, ‘松島’라고 하는 명칭만으로도 독도라는 것이 입증된다.

 

▲ <그림 5> 松島 부분을 확대한 「磯竹島略圖」. 송도부분을 확대한 것을 보면 지금의 독도임이 분명히 파악된다. 기죽도는 당연히 현재의 울릉도다.

 ‘외일도’의 위치

시마네현질의서의 부속문서, ‘유래의 대략’(原由ノ大畧)에서는 오키도-竹島간 거리는 120里, 오키도-松島간 거리는 80里, 松島는 竹島와 같은 항로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부속지도인 「기죽도약도」에서는 松島의 위치와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것 외에도 오키도-松島간 거리 80里, 竹島-松島간 거리는 40里라고 거리를 보다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태정관지령>에서 오키도-竹島간의 거리 120里의 里를 해리(1.852km)로 하여 계산하면 222km로서 오키도와 울릉도간의 실제거리 244.9km와 대략 일치한다. 또한 오키도와 松島 간의 거리 80里의 里를 해리로 하여 계산하면 148.2km로서, 오키도와 독도간의 실제거리 157.5km와 대략 일치한다. 따라서 󰡔태정관지령󰡕의 里는 해리를 의미하고, <태정관지령>의 竹島, 松島는 거리에 의하여도 울릉도와 독도라는 것이 증명된다.

뿐만 아니라, <태정관지령>의 里가 해리라는 것은 <태정관지령> 이전과 이후의 문헌에 의하여도 입증된다. <태정관지령> 이전 에도시대의 문헌인 <죽도지서부>(1724)와 <기죽도사략>에는 아래와 같이 호키주(伯耆國) 요나고마을(米子町)으로부터 각 기항지마다, 독도․울릉도를 거쳐서 조선까지의 거리 단위가 里로 표기되어 있다.

 

一 伯耆國米子에서 出雲國雲津까지 10里 정도

一 出雲國雲津에서 隱岐國燒火山까지 23里 정도

一 隱岐國燒火山에서 同國福浦까지 7里 정도

一 福浦에서 松嶋에 80里 정도

一 松嶋에서 竹嶋에 40里 정도

一 松嶋에 伯耆國으로부터 海路 120里 정도

一 松嶋로부터 朝鮮國에 8,90里로 듣고 있다. 已上

1월 23일

 

위의 후쿠우라(福浦)는 오키도의 후쿠우라를 말하므로, <죽도지서부>(1724)와 <기죽도사략>에서도 <태정관지령>과 같이 오키도-松島간 거리 80里, 松島-竹島간 거리 40里로 표기되어 里가 해리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외에 「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1696)에도 오키도와 松島간의 거리가 󰡔태정관지령󰡕과 같이 80里로 표기되어 있으며, 「竹島考圖說 竹島松島之圖」(1828년)에는 70里로 표기되어 있다. 일본은 1872년 바다의 1해리를 里로 표시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태정관지령> 이후의 자료에 의하여도 <태정관지령>의 里는 해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함아마기(天城)의 보고서(1880)에는 오키도에서 울릉도까지 거리가 140里로 기록되어 있다. 해군수로부에서 발행한 1883년, 1886년의 <환영수로지>, 1894년, 1899년의 <조선수로지>에서도 모두 울릉도의 경도, 위도까지 명시하면서 울릉도는 오키도에서 140里 떨어진 섬으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태정관지령>에서의 里는 그 전후 문헌에서의 거리표기 방식을 보아서도 해리를 의미하며, <태정관지령>에서의 里를 해리로 하여 松島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면 松島는 바로 독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태정관지령>에서의 오키도-松島-竹島 거리는 거리의 비율 면에서도 실제 거리비율과 거의 일치한다. 오키도-독도간 거리(157.5km) 對 울릉도-독도간 실제 거리(87.4km)의 비율은 1.8:1, <태정관지령>에서의 거리비율은 80리: 40리=2:1로서,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태정관지령>의 ‘외일도’는, 그 위치에 의해서도 독도라는 것이 입증된다(12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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