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흥운동도 내분과 항당백제군에게 좌절되다...

백제와 명치유신세력의 실체를 밝힌다(4)

 

서해를 중심으로 동방의 로마제국을 구가하던 백제,

멸망은 갑자기 들이 닥쳤다. 대륙에서 사라져간 백제의 군현들에 이어

열도로 탈출한 백제세력은...?

 

환상 속에서 백제왕녀가 들려주는 백제멸망의 진실...

한편 당의 낙양으로 끌려간 의자왕의 일행과는 별도로, 사비성이 나당의 연합군에게 떨어지기 전에 백제의 지배층은 대대적으로 피신하여 일본으로 건너 왔다. 그 규모는 사비성이 떨어질 때 낙양에 끌려간 숫자를 훨씬 능가한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백제 왕녀의 사비성 탈출도 여기에 해당된다. 공주와 함께 여기까지 도주한 나는 침상에서 자연스럽게 여인의 손을 잡고 근 보름간 왕도인 사비성에서 출발한 험난한 여정에 대해 들었는데, 그녀는 근구수왕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침류왕에 이어지고 의자왕까지 이르는 혈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왕녀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열도백제의 원한, 1300년 지나도 서릿발처럼 차가워...

“우리의 배는 여기 하기의 강에 좌초되었고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강바닥의 퇴적층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저는 선생이 여기에 오실 줄을 알고 오랜 세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쫓겨나게 된 신라와의 원한이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속되어 고려와 조선 그리고 현재의 한국으로 이어져 왔으며, 또 중국대륙과도 원수의 연으로 맺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낮에 도선국사의 영험을 입어 이제야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한반도와 대륙의 백제가 멸망한 후 이곳에 남은 백제가 일본으로 변경된 과정을 짐작하는 몇안되는 분이지만, 이제는 정확히 일본의 실체가 백제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셔야 합니다. 부디 천년전에 일어났던 일이 세상에 드러나 옛날 백제였던 일본과 한반도에 남은 백제 후손들 사이의 악연이 여기에서 멈추었으면 합니다. ”

나는 침상에서 이츠코, 아니 백제 왕녀의 손을 잡은 채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자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고 이내 가까운 곳에서 큰 불이 일어나 창을 통하여 왕녀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왕녀는 분명히 이츠코의 모습이었으나 그녀의 특징적인 표정과 미소가 없었다. 백제의 왕녀는 불이 점차 가까워지는데도 피하려 하지 않고 말을 계속하였다.

 

백제의 원한, 역사왜곡으로 이어져...

“백제가 멸망하자 이상한 힘에 의하여 그 역사가 묻혀버리고 뿌리마저 잘려나갔습니다. 그것은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새로이 생겨난 일본과의 합의에 의하여 서로가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살아가기로 합의한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상한 합의에 의한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어 후세의 악연이 되풀이되는 것도, 오늘 도선국사의 환생으로 종식이 되나 봅니다. 또 저는 이츠코로 환생하여 선생을 만난 것입니다.”

왕녀는 백제멸망 후의 일까지 모두 말하였다. 꿈결에 들은 백제왕녀가 말한 내용이 정확히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 대강은 평소 내가 어렴풋이 짐작해왔던 내용이었으며, 또 내 짐작 이상으로 전혀 몰랐던 일까지 들을 수 있었다.

▲ 열도백제에는 근초고왕을 시조로하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이 한 때 열도백제의 실세로 군림했다. 사진은 모노노베 신사(tripadvisor.com).

 

주류성, 마지막 백제부흥군의 본거지...

그러나 내부분열과 당에 투항한 백제세력에게 진압...

660년 한반도와 대륙에 있던 백제가 망한지 2년 후 일본열도에 남아있던 마지막 병력을 모두 투입하여 대륙과 한반도의 백제를 회복시키려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음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661년 백제 무왕의 일족인 상잠장군 복신福信이 영군장군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을 본거지로 삼아 백제부흥군을 일으켰는데, 이 때 열도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 을 새 백제왕으로 옹립하면서 활기를 띠었고, 주류성이 백제부흥군의 중심지휘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부흥군은 백제의 북서부 일대가 중심이 되어 당 유인원劉仁願 의 부대를 공격하여 곧 성공하는 듯했다. 백제가 일본열도에서 본토 수복군으로 파병한 인원은 세 차례에 걸쳐 총 4만여 명의 대규모였다. 일본서기에는 왜가 구원군을 파견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는 분명히 백제군사를 가리킨다.

한편 663년, 당의 장수 유인궤와 당에 항복한 백제의 태자 부여융扶餘隆 은 당의 수군을 이끌고 주류성으로 향하던 중 백강에서 백제부흥군을 만나 네 차례의 수전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당에 항복한 백제의 태자가 일본에서 출격한 백제군을 상대로 싸워 이긴 것이다.

이때 백제군의 함선 400척이 불탔는데 이들이 침몰하면서 내뿜는 연기와 불기둥은 온통 하늘을 덮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백제부흥군이 처음 출발할 때는 복신과 도침을 중심으로 훌륭한 진용을 갖추었으나, 이들 간에 내홍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면서 부흥운동 전체가 무너진 결과였다. 새 백제왕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주하였고, 지수신遲受信이 임존성에 의거해 계속 저항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평정되었다. 백제의 저항은 사실상 백강구 전투에서 완전히 결정나버린 것이다.

663년 9월 주류성이 당의 군사에게 함락되었는데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때 나라사람國人 들이 서로 말했다. "주류성이 항복했으니 이 일을 어찌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백제란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으니,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내왕할 수 있단 말인가." - 일본서기 천지천황기 2년조

九月辛亥朔丁巳 百濟州柔城始降於唐 是時國人相謂之曰 州柔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絶于今日 丘墓之所豈能復往 - 日本書紀

여기에서 백제의 멸망을 탄식하는 나라사람國人 이란 분명히 백제인을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열도에서의 권력쟁탈전...

왕녀는 백제가 멸망한 전후의 이야기 외에 일본열도에서 지배층의 분열이 일어난 상황을 말해 주었고, 그에 이어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한참 후에 일어난 일까지 덧붙였다.

"백제가 일본열도에 들어온 후 300년이 지나는 동안, 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物部, 모노노베) 씨는 무내계와 침류계로 나뉘었고, 가야국왕 아리사등을 시조로 하는 대반(大伴, 오오토모) 씨는 다시 응신계와 진왕계로 나뉘어졌습니다. 한반도와 대륙의 백제가 망한 후, 불행하게도 일본열도에서는 4대 가문 사이에는 내전이 일어나 30년 동안 계속되었다가, 697년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무내계 출신의 문무천황이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열도를 통일하여 일본이라는 신생국을 세운 것입니다. "

왕녀가 말한 신생국 일본이 수립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로 일본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이 되고 변질이 되었는지를 말하여 주었다.

글: 곽경 <오사카의 여인>의 저자,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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