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과 본국의 백제는 어떻게 사라져 갔는가...

백제와 명치유신세력의 실체를 밝힌다(3)

 

백제의 정복군주로 알려진 근초고왕은 어디에서 최후를 맞았나... 

수수께끼의 왜 여왕, '히미코'의 정체는?

 

 

지금까지 말한 대륙백제와는 별도로, 백제 근초고왕(13대왕)에 의한 해외경략은 동쪽으로 일본열도까지 이르렀고, 먼저 열도에 진출해 있던 가야의 세력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열도를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일로, 왜국이 처음으로 한·중의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서기 100년경인데 이 무렵 왜지에는 100여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다고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173년부터 야마타이邪馬台 국의 히미코(비미호) 여왕이 신라와 중국의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데, 히미코는 가야 수로왕의 2째딸인 묘견공주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어쨋거나, 히미코의 왜는 앞으로 말하려는 후대의 왜와는 시기상으로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다가, 서기 266년부터 약 130년 동안 히미코가 중심이 된 왜의 존재는 한·중의 역사기록에서 씻은 듯이 사라진다. 히미코의 조카인 여왕 일여壹與가 진晋에 마지막으로 조공한 266년을 기해 야마타이 연합의 역사가 종막을 내린 것이다.

 

가야의 열도개척과 뒤를 이은 백제의 추격...

그후 100여년 동안 공백의 시간이 되어 암흑으로 사라졌던 일본 열도는, 365년경 가야와 백제간에 대대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1987년 윤영식 선생의 연구로 복원된 일본고대사의 윤곽은 다음과 같으며 여기에 따르면 고대 일본은 백제 및 가야와 동일한 국가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65년경 가야의 왕 아리사등阿利斯等 이 바다를 건너가 왜지를 개척하였는데, 바로 일본서기에 일본의 시조로 그려진 스사노노미코토素戔嗚尊 이다. 다음은 왜지가 본격적인 백제·가야의 영토가 된 과정이다.

366~391 (26년간의 백제영토): 곧이어 백제 근초고왕이 왜지에 진출하여 가야계를 동으로 몰아내고 백제 영토로 만들었다.

392~478 (87년간의 가야독립): 중국기록에는 유독 이 기간에만 '찬왕·진왕·제왕·세자 흥·무왕' 의 왜5왕이 등장하여 중국으로부터 관직을 책봉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왜5왕은 일본 고대사 최대의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바로 백제로부터 독립하여 가야계 왕조가 수립되어 왜5왕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479~660 (182년간 다시 백제의 영토): 왜지는 다시 백제 영토로 되어 백제 멸망시(660년) 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역사에서 왜국에 대한 기록이 다시 자취를 감춘다.

위에서 87년간의 가야독립 기간은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의 전반 130년간, 또 이후의 200여년 동안 중국의 기록에서 왜倭 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유독 이 87년 동안에만 왜5왕의 기록이 나타나며, 366~660년간의 중국기록에는 일본의 천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백제 근초고왕을 모신 석상신궁石上神宮: 일본의 고대 왕족 물부가(物部, 모노노베) 의 시조 근초고왕은 가야가 점령하였던 왜지를 경략하여 백제의 영토로 만들었다. 근초고왕은 일본땅에서 가야계 응신(왜왕 찬)의 공격으로 전사하였으며 능이 일본 오사카 부근에 있다. 근초고왕을 모신 석상신궁에는 유명한 칠지도(우측 사진)가 전해온다. 칠지도에 새겨진 왜왕은 백제왕세자 ‘근구수’다. 출처: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 윤영식, 2011

 

근초고왕의 무덤이 일본열도에 있다?

백제는 열도에 먼저 진출한 가야계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근초고왕이 전사하였고 그 무덤은 오사카 근처(河内国 西宮市의 舊市陵)에 있다. 또 근구수왕도 근강 전투에서 가야계의 응신에게 패하여 전사하였고 능이 이세국(伊勢國 琴彈原陵)에 있으며, 침류왕의 능도 같은 이세국(伊勢國 陵褒野陵)에 묻혔는데, 세 릉이 모두 시신을 모시지 못하고 옷만 묻은 습릉褶陵 이라는 것까지 밝혀져 있다.

근초고왕 이래로 해양 대제국을 건설했던 백제는 거의 그 전성기에 제국의 명운이 끝나버렸다. 먼저 대륙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군세가 약해지고 그 다음 한반도 본토에 있던 왕성과 그 주위의 성읍들이 나당의 집중공격에 함락되고 의자왕과 왕족·대신들이 당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거의 같은 무렵 대륙백제도 완전히 소멸되었다.

2년 후(662년) 일본열도에 아직도 잔존해 있던 백제는 군세를 다시 모아 한반도로 진격하여 당과 신라의 점령군으로부터 본토를 수복하려 했다. 그러나 백강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본토수복의 꿈은 사라져 버리고, 이제 해양 대제국 백제의 나머지 운명은 영원히 일본열도 속으로 갇히게 되었다.

백제 후예들의 활동이 열도의 바깥으로 나오려고 한 적이 역사적으로 두 번 있었는데, 그 두 번 모두 우리에게는 커다란 재앙으로 나타났다. 임진왜란과 명치유신 후의 조선합병이 바로 그 두 번의 재앙이다.

 

본토백제는 어떻게 사라져 갔나...

서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의자왕과 태자는 웅진성으로 들어가서 농성했다. 그러나 웅진성으로 들어간 지 닷새 만에, 웅진 성주가 의자왕을 배신하여 당에 항복해 버렸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은 뒤, 태자와 왕자, 대신과 장군, 그리고 백성 12,00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의자왕은 망국의 왕이 되었고 700년 역사의 백제는 이렇게 무너졌다.

의자왕의 일행은 포로로 잡혀가서 낙양으로 가서 살다가 거기에서 운명했다. 또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의 무덤에 들어있던 묘지명이 1920년 중국 낙양의 북망北邙 에서 출토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음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의자왕 등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압송되었고 의자왕이 죽은 뒤, 아들 부여융에게 사농경司農卿을 제수하였다.

677년 2월: 부여융을 '광록대부 웅진도독 대방군왕帶方郡王' 으로 임명하여, 백제 옛 땅에 돌아가 유민을 안무하도록 하였으나 신라가 이미 차지하고 있어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682년: 68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고 낙양의 북망北邙 에 장례지냈다(4부에서 계속).

글: 곽경, <오사카의 여인>의 저자, 역사저술가.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