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로마제국에 뒤지지 않았던 백제, 황해는 지중해와 같았다...

백제와 명치유신세력의 실체를 밝힌다(2)

 

대륙에 뻗어 있던 백제는 로마제국과 같았다.

백제22담로가 전해주는 대륙백제...

황해를 중심으로 하는 환백제문화권을 형성하여,

중원에도 선진문물이 전해졌다...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열도로 온 백제의 왕녀가 들려주는

대륙백제의 실체가 계속 드러나다...

 

이보다 300년전, 백제는 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 대에 이르러 해외 팽창의 길에 나섰다. 북으로는 고구려를 침공하여(369년)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일시적이지만 평양을 점령한 적이 있다. 또 바다를 건너 중국 대륙에 진출하여 고구려 서쪽인 요서지역에 영토를 확보하여 요서와 진평의 2군을 두었다. 이러한 백제의 대륙진출은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병이 백만으로 남으로 오·월을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우환(巨蠹) 이 되었다(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三國史記 崔致遠傳/삼국사기 최치원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있다고 배워 온 고구려,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다고 배워 온 백제가 지금의 중국의 북경 유역에서부터 양자강 유역까지 중국 동해안 대부분의 지역을 백만 군사로 침입하여 중국의 큰 우환이 되었다는 말이니 혼란스럽지 않은가?

<지도> 근구수왕 때의 백제의 영향권: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는 바다를 건너 요서ㆍ산동ㆍ강소ㆍ절강 등지를 경략하고 왜에까지 이르렀다는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주장하였는데, 근구수왕에 이르러 백제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최대판도는 인구가 고도로 집중한 동북아 지역을 포함한 해양국가라는 성격에서 로마제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고구려는 하북성과 산서성, 백제는 강소성과 절강성을 차지...

유주와 연은 현 중국의 하북성과 산서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제·노의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오·월은 장강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강소성과 절강성 지역을 말하는 것이니 어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그곳엔 백제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때 백제의 항해술, 조선술, 해군력은 백제가 3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대륙에 백제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제국의 최대판도: 백제의 최대판도를 로마제국과 비교해 보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전 그리스의 지중해 제패를 이어,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양국가의 형태를 이루었다. 위는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불과 300년 정도 지난 뒤의 대학자 최치원이 남긴 말로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식민사학자들과 그를 따르는 한국의 사학자들은 이를 근거 없는 낭설이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실수한 것이라는 등으로 지금까지 방해해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김부식 혼자만의 저술이 아니며 11명이나 되는 당대 유능한 편사관들의 공동 저작임을 생각해 볼 때 실수라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요즘 학자들의 저급한 실력과 수준미달의 의식으로 시비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밖에 중국 측의 여러 문헌에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아래의 기록들이 300년에 걸쳐 분명히 일관성 있는 맥락을 이루고 있는데, 모두 백제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한 대륙국가 북위를 물리친 기록으로서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동성왕 10년, 북위가 침공했으나 백제가 이를 격퇴하였다.

東城王 十年(488)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삼국사기 백제본기

永明六年(488)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자치통감 帝紀 三

이 해(490)에, 북위는 기병 수십만을 내어 백제를 침입하였고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 침입군을 쳐서 크게 이겼다(是年庚午年(490) 魏虜又發騎兵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 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虜軍 大破之/南齊書 百濟傳)

같은 양제서에서, 동성왕은 이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자신의 장군들에게 관직을 내려줄 것을 청하고 있다. 건무建武2년(495, 동성왕 17년), 모대(동성왕)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봉작封爵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더욱이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중략>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이들의 꾀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假行征虜將軍邁羅王)으로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假行安國將軍辟中王)으로

해례곤을 무위장군 불중후(假行武威將軍弗中侯)로

목간나는...광위장군 면중후(行廣威將軍面中侯)로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은天恩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제수하여 주십시오"(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중략> 今邦宇謐靜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賛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南齊書, 列傳39 百濟傳)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던 대제국 백제, 중국 사료가 증명...

여기에서 말하는 매라왕·벽중왕·불중후·면중후 등의 관작은 단순한 계급의 승급이 아니고 제후를 분봉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이 봉해진 지역은 모두 오늘날 대륙의 산동과 강서, 절강과 복건 등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이라는 연구가 있다.

만약 매라왕·벽중왕·불중후·면중후 등의 관작이 작은 고을의 수령에 봉하는 정도라면 굳이 남제의 황제에게까지 표表를 올릴 것 없이 동성왕 자신이 바로 임명하면 되는 것으로, 이들 관작은 대륙의 넓은 영토에 봉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전에 실린 유명한 장수 흑치상지는 선조 때부터 흑치라는 곳에 봉해졌다고 하는데, 이 흑치국은 장강(양자강) 남쪽에서 광동성에 걸쳐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 오늘날의 백제향이란 지역이 있는 것이 바로 그 중심이라는 것이다.

대륙백제의 소멸과정도 중국사서에 나와...

그리고 대륙의 백제가 소멸한 시기와 그 상황을 묘사한 기록이 역시 중국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대륙백제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중국의 기록인 통전에는 백제 멸망 후(660년)에 발생한 백제군의 소멸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옛 땅은 신라에게 편입되었으며, 성 주변의 잔류민들은 점점 수가 적어지고 기력도 다하여 돌궐이나 말갈족에 흩어져 투항했으며, 백제의 주인인 부여숭夫餘崇 은 멸망해버린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토지는 신라와 말갈에 뺏겨 부여씨의 군장郡長 은 마침내 소멸했다(其舊地沒於新羅 城傍餘衆後漸寡弱 散投突厥及靺鞨 其主夫餘崇 竟不敢還舊國 土地盡沒於新羅靺鞨 夫餘氏郡長遂滅/通典 百濟傳)

위의 구절은 백제 멸망 후 그 지역에 세운 당唐의 도독부가 나중에 신라에 흡수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부여夫餘 씨는 백제의 왕성王姓 이다. 원래 백제 땅이었던 지역에 돌궐이나 말갈이 등장하는 점으로 보아 이 기록 역시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3부에서 계속).

글: 곽경, 저서 <오사카의 여인>, 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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