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열도 백제세력의 사무친 원한의 역사, 어느 때야 그칠 것인가!

백제와 명치유신세력의 실체를 밝힌다(1)

명백하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도,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우기고,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일본이 식민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의 극우파의 뿌리를 파헤친다...

 

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다.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나라다. 그런데 가까이는 일제침략으로 우리나라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원한을 남겼다. 그럼에도 침략범죄를 사죄하고 배상하기는커녕 거꾸로 우리의 영토, 독도를 침탈하고 있다. 일본은 일제침략에 앞서 서기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 백성과 국토를 유린했다. 현재 일본의 지배층은 이 침략자들의 후예다. 일제가 서기1910년 우리나라를 삼켜버리고 한 말은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 왔다’이다. 옛 영토를 수복했다는 말로 읽혀진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못 이룬 일을 이제야 이루었다고 했다. 일제침략이 제국주의 국가의 약소국에 대한 단순한 침략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수백 년 동안 재정복의 꿈을 꾸다가 드디어 이루었다는 것이다. 수백 년의 수명을 가진 한 인간이 초지일관 다시 준비해서 꿈을 이루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일본이 이토록 국력을 기울여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를 돌이켜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현재 일본을 지배하는 세력을 보면 백제계다. 일본의 고대사는 곧 한국의 역사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일본이라는 것이 우리가 이주해서 개척한 나라라는 것이다. 부여,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이 때를 달리하며 일본열도로 이주해서 개척한 나라라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증명된 지 오래다. 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다. 그 때 열도에 있던 왜 백제가 본국,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다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때 본국백제의 왕족과 지배층과 백성이 대대적으로 열도로 이주한다. 이때의 원한과 슬픔을 <일본서기>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주류성이 항복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이르러 끊어졌다. 조상의 묘를 어떻게 다시 갈 수 있을까(州流降矣 事无奈何 百濟之名 絶于今日 丘墓之所 豈能復往)<일본서기>天智天皇 2年(663年).”

 

이날 이후로 왜백제는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일본서기>, <고사기>를 써서 우리나라와의 인연을 끊고 '만세일계'(萬世一系: 일왕의 혈통이 단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다는 주장)의 역사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쌓인 원한이 임진왜란과 일제침략으로 이어졌고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일본지배세력의 1500년을 이은 원한이다. 일제침략기 조선총독부에서 키워놓은 국내의 식민사학계가 이를 역사이론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것을 식민사관, 식민사학이라고 한다. 역사학, 일본학 등 인문학과 관련하여 일본에 유학 가서 학위를 따고 온 사람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일본 극우파의 첩자가 되어 전국 대학교 교수 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지에서는 한국과 일본 간의 이와 같은 쓰라린 역사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 특히 구한말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병합해 버린 세력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일본의 한국에 대한 기나긴 원한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한국침략의 역사에 깊은 안목을 갖고 있는 역사연구가, 곽경 선생을 통해서 추적해 본다. 아울러 대륙백제의 실체도 확인한다. 곽경선생은 명치유신의 세력을 탐사하면서 현지 안내를 해준 '이츠코'와 동행한다(편집부).

 

‘명치유신’의 발상지, 하기에서 본 백제왕녀의 환상...

그날 밤 내가 피의 도시 하기의 호텔에서 꿈에 있었던 신비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날은 하루 종일 걸었던 관계로 이츠코와 헤어져 방에 오자마자 곧 침대에 쓰러졌다.

잠시 후 목이 말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직도 창으로 환하게 쏟아지는 저녁 햇살을 보고는 바깥바람을 쐴 겸 간단하게 옷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호텔 문을 열자마자 지금까지 있었던 주차장의 아스팔트 포장 대신 바로 모래벌판이 시작되어 선착장까지 이어졌고 그 모래를 밟으며 걸어가는데, 마침 저 멀리 두 척의 큰 배가 접안하는 것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포구에 모여 구경하였는데 백제 왕족이 탄 배가 납치되어 여기에 온 것이라며 웅성거렸다.

▲ 일본 본주 야마구찌현의 하기의 주택가.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왜 열도로 피신하는 백제왕족...

배는 두 척 모두 어두운 갈색으로 칠해져 다부진 군선의 모습을 하였으며 배의 갑판 바로 아랫단의 측벽에는 활이나 쇠뇌를 쏠 수 있도록 수십 개의 작은 현창舷窓 이 뚫려 있었고 갑판에는 군기가 날리고 창을 든 병사들이 정열하고 있었다.

원래 시모노세키가 목적지였으나 도중에 적국인 신라의 편에 돌아선 일부 불만세력들이 선상반란으로 배를 탈취하여 시모노세키를 향하지 않고 이곳 하기의 포구로 들어온 것이다. 하기와 시모노세키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시모노세키와는 달리 가야계의 불온한 세력들이 자주 준동하였는데 하기의 일부 구역은 이들 세력이 이미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에 갑주를 두른 무사들이 줄줄이 배에서 내린 다음 무사들의 감시와 호송을 받으며 한 무리의 화려한 의상을 걸친 일행이 내려왔다. 그들의 옷차림으로 보아 첫 눈에도 비범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내려오면서 잡고 있는 밧줄로 얽은 사다리가 흔들려 군사들의 도움을 받는 등으로 호송 군사들이 오히려 그들을 부축하거나 시중드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구경 온 사람들은 부채로 더운 날씨를 쫓아냈으며 먼저 내려온 무리 중에는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 뛰어노는 애들도 있었다.

어수선한 가운데서 어느새 한 여인이 느슨한 군인들의 호송 사이를 비집고 도망치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넓은 소매와 여러 겹의 얇고 긴 비단치마를 날리며 달아나는 여인은 빠른 걸음이었고, 이를 뒤늦게 알아챈 군사들이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걸친 갑주와 투구 외에 창과 활, 전통 등의 무장은 매우 무거워 보였다.

군사를 피해 달리던 여인은 곧장 나를 향해 뛰어왔고 그 다음 순간 눈앞에 다가온 얼굴은 바로 머리에 화려한 금장식을 한 이츠코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고 어느새 우리 둘은 추격하는 군사들을 피하여 같이 달리고 있었다.

▲ <지도1> 근구수왕 때의 백제의 판도.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는 바다를 건너 요서ㆍ산동ㆍ강소ㆍ절강 등지를 경략하고 왜에까지 이르렀다는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주장하였는데, 근구수왕에 이르러 백제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최대판도는 인구가 고도로 집중한 동북아 지역을 포함한 해양국가라는 성격에서 로마제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

대륙백제의 흔적...

강안의 길을 가로질러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상점이 들이찬 골목을 몇 구비 돌아서야 추격 군사들을 겨우 피하였고, 항구에서 반대 방향으로 백제계 세력들이 지배하는 지역에 이르러 조용한 방으로 안내되어 한숨을 돌린 후 그제 서야 차를 마시며 그녀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저는 백제 의자왕의 다섯째 왕녀 ‘하슬라’ 공주이며, 지금 본국 왕성인 사비성에서 오던 중 배가 납치되어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원래 여기 일본에서 태어났답니다. 저의 남편은 백제가 해외에 설치한 22담로의 한사람으로 대대로 대륙 절강성 방면의 태수에 봉해졌는데, 2년 전 돌궐과의 싸움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당의 행군총관 소정방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후부터 저는 부왕이 계신 사비성에 머물러 왔습니다.”

 

그녀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본토인 한반도 왕성의 위급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지금은 대륙의 백제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백제 영토까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간 대륙방면에 있는 백제의 담로 대부분은 수년간 이어진 당의 공격으로 그 군세가 극도로 약해져 싸움에서 계속 밀려왔습니다. 올해 3월에 들어, 새로 당군 13만 명과 신라군 5만 명의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소정방은 직접 한반도로 출격하여 왕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반도 전역에서 백제 성읍들이 거의 함락되었고, 왕성인 사비성마저 아침 아니면 저녁에 떨어질 운명에 처하여 많은 왕족과 권문의 귀족 자제들은 백제의 마지막 남은 영토인 이곳 일본열도로 대대적인 피난길에 오르고 있습니다.

일본열도는 근초고왕의 개척 이래 300년 동안 가야와 공동으로 통치하여 왔는데, 한반도와 대륙에 있는 백제가 망하더라도 이곳은 바다를 격하여 적의 침입이 쉽지 않으므로 여기에서 백제의 사직과 제사를 이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으로 곧 적의 수중으로 떨어질 운명에 있는 한반도의 사비성을 빠져나와 피난길에 올랐으나, 최근 나당연합군의 수군이 봉쇄를 강화하고 있는 금강 하류의 수로를 피해 육로를 택하여 변산반도 아래에 있는 곰소 항까지 숨어 들어갔다. 다시 거기서 군선을 타고 남해안을 돌아 대마도와 이키 섬을 지나 지금 이곳 하기에 들어온 중이었다.

도중에 서해안이나 남해안 어디에도 신라와 당이 점령한 상태여서 잠시도 배를 뭍에 대지 못한 채 근 보름 연속으로 항해하여 여기에 닿은 것이다.

원래 시모노세키에 입항할 예정이었으나 적국인 신라와 내통하고 있었던 일부 불만세력들은 배가 대마도를 지나 이키 섬에 들어설 무렵 선상반란을 일으켜 배를 탈취하였고, 삼엄한 경계 하에 있는 시모노세키의 군항을 피하여 이곳 하기의 포구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 시기는 백제와 나당연합군 사이의 건곤일척의 대전쟁 막바지로 300년간 백제와 가야의 영토인 이곳 일본열도에서도 불안한 정세에 휩쓸려 대대로 쌓여온 내부의 분열과 반란의 조짐이 자주 있었다. 하기와 시모노세키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시모노세키와는 달리 이곳 하기는 가야계의 일부 세력이 신라와 내통하였고 비록 일시적이지만 그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다.

여기에서 백제 왕녀의 이야기는 조금 더 부연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때의 백제는 그 강역이 한반도 외에 중국대륙 및 일본열도에까지 이르렀는데, 백제의 멸망은 백제의 영토가 거의 최대로 확장되었던 이 시기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서기 612년에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는데 을지문덕이 활약한 이 싸움은 세계사에서 가장 큰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645년, 당의 태종은 고구려와의 운명을 건 일전에서 연개소문에게 대패한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얼마 안 된 660년에 이르러 당은 신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대제국 백제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8년 후인 668년에는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이는 역사서에 남은 기록일 뿐으로, 660년의 전쟁이 있기 3년 전 당은 대륙에 있는 백제와의 전쟁에 이미 돌입하였다. 짐작하건데 그 시기는 당과 서돌궐 간의 전쟁이 끝난 657년 직후가 아닌가 추측된다(제2부에서 계속).

글: 곽경 <오사카의 여인>의 저자,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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