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막부는 독도를 조선 땅으로 알고 있었다.

 

독도야 미안해 6

정태만의 독도는 우리땅(6)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일인들이 울릉도와 독도로 가는 것을 처벌하다...

 

소중화 조선정권의 해금정책,

울릉도 독도를 일인들 소굴로 만들어...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부터 시작하여 한반도에 부속된 섬으로서 울릉도의 역사는 오래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 태종・세종대부터는 울릉도 거주를 금지하고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울릉도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을 색출하여 본토로 이주시키는 거민쇄출 정책을 엄격히 시행한 결과 울릉도가 무인도화 되자, 이는 곧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태종 7년(1407년)에는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울릉도에 옮겨 살기를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으며, 그 후 광해군 6년(1614년)에도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어 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근거로 불가함을 통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를 둘러싼 양국간의 외교마찰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울릉도를 둘러싼 이러한 외교마찰은 울릉도의 잠상(潜商)을 일본이 처벌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매듭지어졌다. 즉, 1620년 조선 측의 항의로 야자에몬(㢱左衛門)과 진우위문(仁右衛門)이 조선국 속도인 울릉도(竹島)를 무대로 하여 잠상을 했다하여, 에도막부의 명에 따라 대마번에 의해 체포되어 경도(京都)로 보내져 처벌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측 자료인 <통항일람(通航一覽)> 권129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겐나(元和) 6 경신년(1620년), 종 대마수 의성(宗對馬守義成), 명에 의해 竹島[조선국 屬島]에서 잠상 두 명을 붙잡아 경도로 보내다[그 죄과 소견 없음]"

 

또한, 1637년 왜관의 대마번사는 울릉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조선에 표착했던 무라카와(村川)가의 선원 일행을 인수하면서 “울릉도에 도해하는 것은 장군님의 금령(法度)이라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잠상을 처벌한 1620년을 기점으로 하여 에도막부와 조선․일본 외교교섭 창구 역할을 한 대마번에는 ‘울릉도는 조선 땅’이라는 인식이 정착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일본문헌에는 독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7세기 초 호키주(伯耆州) 어민의 울릉도 도해이전 일본에서 독도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호키주 어민의 울릉도 도해 이후 울릉도, 독도 인식...

울릉도(竹島)에 도해(渡海)한 것은 대마도뿐만 아니었다. 1625년부터는 호키주(伯耆州) 어민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양가가 에도막부로부터 도해면허를 받고 매년 정기적으로 울릉도에 도해하여 어렵(漁獵)을 했다. 도해면허 연도는 <태정관지령> 부속문서 등에는 1618년으로 되어있으나 1625년설이 유력하다. 도해면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今度]’의 도해에 대한 면허이고, ‘이후[今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야(大谷)․무라카와(村川) 양가는 1회용 도해면허 사본을 가지고 그 이후에도 1690년대 안용복납치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울릉도(竹島)도해를 계속해 왔다. 매년 봄 양가가 윤번제로 울릉도에 도해했으나 거주하지는 않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1620년 에도막부는 대마번에 명하여 울릉도에 있던 잠상을 처벌하도록 명했다. 그런 에도막부가 1625년에는 호키주 어부들에게 울릉도 도해를 허가했다. 오야(大谷)家의 기록인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에 의하면 호키주 어부들은 새로운 섬을 발견한 것으로 에도막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장군님에게 공물을 상납한 일은 없습니다만, 공허의 섬을 진키치(甚吉)가 실제로 발견하여, 일본의 토지를 넓힐 수가 있었던 것은 목록을 받는 것과 같은 영예이고, 발군의 공적이라고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에도막부가 울릉도 도해를 허가한 것은 새로운 섬 발견으로 인식했기 때문...

에도막부는 조선 땅 울릉도가 아닌 새로운 섬을 발견한 것으로 보고 울릉도(竹島) 도해를 허가한 것이었다. 이는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죽도문담>(竹島文談)에는 대마번의 유학자 스야마 쇼에몬(陶山庄右衛門)은 안용복사건 초기, 대마번에서 에도막부에 울릉도(竹島)의 사정을 충분히 보고하지 않고 교섭에 임한 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막부는 그 섬의 내력을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재작년(1693년)에 대마번에 이 교섭을 명하시어 다시는 조선인이 건너오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 취지를 확실히 저쪽에 전하라고 엄중히 명령하셨습니다.

에도막부가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리는 섬, 울릉도의 내력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1877년 <태정관지령> 부속문서 ‘제1호 구정부 평의의 지의(旨意)’라는 제목으로 첨부되어 있는 1696년 1월 28일자 문서에서 가장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동 문서에는 에도막부의 로쥬(老中)가 대마도주에게 울릉도(竹島) 도해(渡海)금지를 시달한 내용 및 그 도해를 금지하는 이유에 대해 실무자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조선에 전달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태정관지령>1호 병자년 1696년(元禄九年) 1월 28일

"다케시마(竹島)는 원래 확실히 모른다. 호키주(伯耆)에서 도해해 고기잡이 해왔던 까닭에 대해 마쓰다이라(松平) 호키주 태수에게 물어보니 이나바주(因幡)․호키주(伯耆)에 부속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중략) 위와 같은 경위로 도해하여 고기잡이를 해왔을 뿐이고 조선의 섬을 일본에 취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일본인은 거주하지 않는다. 거리를 물어보니 호키주에서 160里(해리, 필자 주) 정도라고 한다. 조선에서는 40里 정도라고 한다. 그러면 조선의 울릉도가 아닌가? 그리고 원래 일본인이 거주하든가 이쪽에서 취한 섬이라면 지금에 와서 (조선에) 넘겨주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같은 증거도 없으니까 이쪽에서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어떤가? (중략) 원래 취한 섬이 아니기 때문에 돌려준다고 하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에도막부, 독도가 호키주의 어민들이 새로 발견한 것으로 착각...

에도막부는 그 섬 ‘다케시마(竹島)’에 대해 잘 모르고 도해면허를 내 주었고, 나중에 안용복사건 이후에 알고 보니 조선 땅 울릉도이므로, 원래부터 다케시마(竹島)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용복사건 발생이전 에도막부는, 다케시마(竹島)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조선땅 울릉도인 줄 모르고 호키주 어부들이 새로 발견한 섬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일본 문헌에 독도가 등장하는 것은 1660년대 무렵이다. 마쓰에번사(松江藩士)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울릉도 도해에 참여하고 있던 오키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초로 썼다고 하는 1667년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북방향으로 2일 1야를 가면 마쓰시마(松島)가 있다. 또 하루거리에 다케시마(竹島)가 있다. 속언에 이소다케시마(磯竹島)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바다사자가 많다. 이 두 섬은 무인도인데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오키도(隱岐)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 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此州)까지로 한다."

 

이 주(此州)는 오키도(隱岐)를 말한다. 따라서, 일본에서 독도를 인지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서북한계는 이주(此州)를 한계로 한다는 구절은 독도를 일본영토로는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근거가 된다.

이때부터 메이지(明治) 초기까지 일본에서 독도는 ‘마쓰시마(松島)’라고 불렀다. 울릉도에는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다케시마(竹島)’로 명명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독도는 ‘다케시마 근처에 있는 섬’으로 인식하여 송(松)․죽(竹) 한 쌍을 이루는 의미에서 ‘마쓰시마(松島)’로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독도(松島) 도해와 관련하여 막부의 관리 아베 시로고로(阿部四郞五郞)의 가신 가메야마 쇼자에몬(亀山庄左衛門)이 오야가(大谷家)에 보낸 문서에는 ‘죽도도해근송도(竹島渡海筋松島)’, ‘죽도근소지소도(竹島近所之小島)’, ‘죽도지내송도(竹島之內松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 가는 길목에 있는 섬’, ‘울릉도 부근에 있는 섬’, ‘울릉도 영역 내에 있는 섬’이 그 당시 독도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독도를 울릉도와 한 덩어리를 이루는 섬 또는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다케시마(竹島)를 조선의 울릉도인 줄 모르고 도해면허를 내주고 도해를 묵인한 것으로 보아, 그 부속섬 마쓰시마(松島) 즉, 독도에 대해서도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영유권 의식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림3>독도는 울릉도와 일본의 오키섬 중 어느 곳에 더 가까울까? 울릉도에서는 36km를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오키섬에서는 106km를 나와야 독도를 볼 수 있다.

<그림 3>은 해수면에서 울릉도와 독도 및 오키도를 볼 수 있는 해역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수학적인 계산 결과이므로 그날의 날씨에 따라 결과는 다를 수 있지만, 울릉도와 독도간 전 해역에서 항상 울릉도를 볼 수 있다. 독도를 중심으로 반경 51km 이내에서는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으며, 상당히 넓은 해역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같이 볼 수 있다. 또한 울릉도의 평지(해수면)에서는 독도를 볼 수 없지만 36km 나가면 바로 독도를 볼 수 있다.

그 반면에 일본 오키도에서는 평지에서는 물론이고 오키도 정상에서도 독도를 전혀 볼 수 없고 독도를 보려면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거쳐 106km나 나와야 한다. 망망대해 가운데 보이는 울릉도와 독도를 가상해 보면 과거에 일본어부들 조차도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인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독도의 지리적 위치는 과거 역사적으로 독도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자연스럽게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 또는 울릉도와 한 쌍을 이루는 섬으로 인식되게 했다. 일본에는 독도에 관해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더 자세하고 많은 고문헌․지도가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전부가 독도를 조선 땅으로 기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7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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