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을 벗어 던질 때, 우리역사의 진실이 보인다...
신라는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였다(2)
진한사람들이 사는 곳의 땅 이름을 탁수에서 따오다...
탁수는 오늘날 대륙에 있어...
4. 진한인들은 연나라 탁수유역에서 왔다.
『삼국유사』는 아래의 사료 C-1과 같은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어쩌면 한민족 상고사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다.
C-1
진한辰韓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 망명자들이 한국으로 오매 마한이 동쪽 지역 땅을 떼어 주었다.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고 하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으므로 혹은 진한秦韓으로 이름 했다 하며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써 나라를 일컬었다.”고 하였다.
또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온 사람들이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점탁 등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
辰韓, 亦作秦韓.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来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 以與之相呼爲徒, 有似秦語故, 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户稱國. 又崔致逺云, 辰韓夲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稱, 所居之邑里云沙涿漸涿等. 羅人方言讀涿音爲道. 今或作沙梁梁亦讀道. 『三國遺事』卷第一, 紀異第一, 辰韓
C-2
신라인이 또한 스스로 낙랑이라 일컬었으므로 오늘날 본조[고려]도 이로 인하여 낙랑군부인이라고 일컫고, 또 태조가 딸을 김부에게 주고 낙랑공주라 하였다.
新羅人亦以稱樂浪故今本朝亦因之而稱樂浪郡夫人, 又太祖降女於金傅亦曰樂浪公主. 『三國遺事』卷第一, 紀異第一, 樂浪國
C-3
거마하는 대군 광창현 래산에서 나오는데, 즉 래수이다...(중략)...또 동쪽으로 탁현 역정 누상리의 남쪽을 지나는데, 즉 유비의 고향이다...(중략)...『지리지』는 말하기를 “래수가 동남쪽으로 용성에 이르러 하河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하河는 즉 유수濡水로 아마 서로 분명히 만나는 듯하다. 거마수는 평서성 북쪽에서 남쪽으로 호타하에 들어가서, 함께 바다로 돌아간다.
巨馬河出代郡廣昌縣淶山, 即淶水也...(中略)...又東逕涿縣酈亭樓桑里南, 即劉備之舊里也...(中略)...《地理志》曰:淶水東南至容城入于河. 河, 即濡水也, 蓋互以明會矣. 巨馬水于平舒城北, 南入于滹沱, 而同歸于海也. 『水經注』卷十二, 巨馬河
『삼국유사』(사료 C-1)는 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온 사람들이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점탁 등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고운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의 대학자로 자신들의 조상인 진한 유민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최치원의 증언은 상당한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다. 탁수의 이름을 따서 고을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진한의 유민들은 연나라의 탁수유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연나라 지역을 흘렀던 탁수는 어떤 강을 말하는 것일까?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설에 따르면 탁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를 흐르는 거마하拒馬河라 하였다. 『수경주』(사료 C-3)에 의하면 거마하는 래수淶水로도 불렸으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의 고향인 탁현 누상촌을 감싸고 흐르던 강물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초기 신라를 구성하였던 진한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옛날 연나라의 탁수가 흐르는 지역에서 왔는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의 거마하가 흐르는 지역이었다.(<그림 1> 참조)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사기』(사료 A-1)는 ‘진한인들은 조선의 유민’이라 하였고, 『삼국지』(사료 B-1)는 ‘진한인들이 낙랑 땅에서 왔다’고 하였다. 거마하가 흐르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유역이 ‘조선 땅’ 또는 ‘낙랑 땅’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연나라 탁수유역에서 온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 또는 ‘낙랑의 유민’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연나라 탁수유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
아래의 『사기』「조선열전」(사료 D-1)과 『삼국지』「한전」(사료 D-2)에 의하면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의 전성기 때,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진번과 조선지역을 점령한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진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대략 80여 년 동안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D-1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D-2
위략 :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韓
조선을 침공했다는 연나라의 실체...
그런데 연나라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80여 년 동안 지배하였다고는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을 고조선의 백성으로 살아온 진번과 조선지역의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연나라는 진번과 조선지역을 차지한지 불과 20여년 만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연 소왕(재위: BC 311~BC 279)이 죽은 후에는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기원전 226년에는 이미 진나라에게 연나라의 수도인 계성이 함락당하는 처지였다.
실제로 연나라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점령한 기간은 80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전국칠웅 가운데서 가장 허약했던 연나라의 국력으로 보아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장악하였을지도 의문이다.
『후한서』‧『삼국지』‧『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서 진한의 유민들을 ‘진나라의 망명인’ 또는 ‘연나라의 망명인’ 등으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유민’ 또는 ‘낙랑의 유민’으로 기록한 것은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진한의 유민들이 연나라의 전성기 때 점령당한 조선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이들을 ‘진나라의 망명인’ 이나 ‘연나라의 망명인’으로 부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조선의 유민’ 또는 ‘낙랑의 유민’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진한 유민들이 떠나 온 곳은 연나라의 탁수가 흐르는 곳으로, 연나라가 전성기 때 점령했던 고조선의 중심지인 조선지역 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조선의 왕검성은 어디였을까...
필자는 지금까지 고조선의 강과 산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고조선을 흘렀던 습수․열수․산수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영정하․호타하․조백하이며, 고조선의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임을 밝힌바 있다.(<그림 1> 참조)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일대로 보는 강단사학계의 통설은 말할 것도 없고,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 일대로 보고 있는 다수 재야사학계의 주장보다도 왕검성의 위치가 훨씬 더 서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감이 잘 나지도 않았다. 도대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현 중국 하북성 북경보다 더 서쪽에 있었다면 고조선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진한의 유민들은 한반도로만 난리를 피해 온 것이 아냐...
이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하여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진한의 유민들은 기원전 3세기경인 진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지역을 떠나서 머나먼 한반도의 경주지역으로 이주하여 신라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중원의 옛 고향 땅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한반도에만 안주하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앞에서 『삼국지』(사료 B-1)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낙랑 사람들을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잔’이라 부르며 각별한 정을 표시하였다. 또 『삼국유사』(사료 C-2)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낙랑이라 부르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했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에서 대륙을 경영했던 자부심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자부심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며,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신라를 건설한 조선 유민들이 현 한반도 평양부근에서 경상도 경주 일대로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이라는 선입견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후한서』‧『삼국지』‧『삼국사기』․『삼국유사』등 관련사서 그 어디에도 진한의 유민들이 한반도 평양부근에서 왔다는 기록은 없다.
하나같이 진한의 유민들이 ‘중국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최치원의 말에 의하면 진한의 유민들은 연나라의 탁수가 흐르는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나라의 탁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이다.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이며,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3부에서 계속).
글: 김봉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