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자기논에 물대기식 우기기 ...

 

정태만의 독도는 우리땅(4)

독도에 소녀상 설치말라는 외교부, 일본극우파가 장악했나....

경기도의회에서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한민국의 외교부는 반대의사를 밝혔다...

 

일본의 '태정관지령'으로 독도문제는 원천적으로 해결되다...

'태정관지령'에는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니 문제삼지 말라고 하다...

'태정관지령'은 현재 독도를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와 자민당세력의 뿌리인 '명치유신정권'에서 나온 것...

 

 

(2) 우산도에 관한 다케시마문제연구회 측의 주장과 그 비판

전술한 바와 같이, <죽도기사>의 기록을 보면 1693년 납치당시에 안용복 등의 이른바 ‘인질’이 독도를 제대로 인식했는지는 의문이다. 안용복도 우산도에 가본 적은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696년 2차 도일시에는 독도를 정확하게 인지했다. 이는 <숙종실록>뿐만 아니라 일본의 <원록각서>, <인번지> 등에 의하여도 입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케시마문제연구회'의 시모조 마사오는 <죽도기사>에 기록된 안용복 등의 납치당시 진술만을 근거로 하여,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 동북 2km에 있는 댓섬이고, 그것이 <동국문헌비고>에 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모조는 사실상 조선 문헌의 독도에 관한 기록을 전부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다케시마문제 연구회'의 시모조 마사오의 주장은... 생억지에 불과

"막부의 명을 받아 조선 측과 교섭한 쓰시마번은 교섭의 경위를 문헌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정리하여 󰡔竹島紀事󰡕로 묶었다. 그 중에는 쓰시마번의 조사를 받은 안용복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산도에 대한 안용복의 인식을 알 수 있다. 그것에 의하면, 안용복은 울릉도보다 「북동쪽에 큰 섬이 있다」, 「그 섬을 아는 이가 말하길 우산도라 한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 증언에서 보아도 안용복이 주장하는 우산도는 지금의 다케시마(竹島)가 아니다. 안용복이 본 것은 지도상에서 「소위우산도」라고 되어 있는 죽도(竹嶼)이다. 죽도는 안용복이 어로활동을 하던 울릉도의 저동(苧洞)에서 동북에 위치하고, 다케시마는 울릉도의 동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산도를 마쓰시마(松島)라고 한 안용복의 증언은 <동국문헌비고>의 分註에 실려 역사적 사실로 되어 버렸다."

 

일본의 주장 그럴듯해 보이지만, 한꺼풀 벗기면 생억지로 드러나...

안용복 납치시의 우산도 인식은 <숙종실록>, <동국문헌비고> 등에서의 ‘우산도는 조선땅’ 기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숙종실록>의 ‘우산도는 왜가 말하는 송도’라는 기록 및 그 영유권이 조선에 있다는 기록은, <죽도기사>에 있는 안용복 납치시의 우산도에 관한 부정확한 지식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안용복의 2차도일 이후, 즉 안용복이 우산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우산도를 거쳐 일본 오키도와 호키주에 갔다 온 후의 진술을 근거로 한 것이다.

시모조 마사오는 안용복 납치시의 <죽도기사>의 우산도 기록을 끌어다가, 안용복 2차 도일 이후의 <숙종실록>의 기록과, 그 후의 <동국문헌비고> 등 기록들의 신빙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숙종실록>과 그 후의 안용복 기록에 나오는 우산도가 댓섬이 아니라 독도라는 것을 증명하는 보다 분명한 근거는 앞에서 살펴 본 <원록각서>이다. 그중 독도 인식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안용복이 말하기를 竹嶋를 대나무섬이라고 하며, 조선국 江原道[강온타우] 東萊[토우나이]부내의 鬱陵嶋[운롱타우]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을 대나무섬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팔도의 지도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一 松嶋는 같은 강원도 내의 子山[소우산]이라는 섬입니다. 이것을 松嶋라고 한다는데 이것도 팔도의 지도에 쓰여 있습니다.

一 당자 3월 18일 조선국에서 아침을 먹은 후에 배를 타고 떠나서, 그날 저녁 죽도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었다고 합니다.

一 배 13척에 사람은 1척에 9인, 10인, 11인, 12~3인, 15인 정도씩 타고 죽도까지 갔는데, 사람 수를 물으니 전혀 답하지 못했습니다.

一 오른편 13척 가운데 12척은 죽도에 미역과 전복을 따고, 대나무를 벌채하러 간 것인데, 올해는 전복도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一 안용복의 말하기를, 자신의 배의 11인은 伯州를 거쳐 島取 伯耆守에게 담판을 지으려고, 순풍을 타고 이곳에 와서 차차 伯州로 도해하려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5월 15일 竹嶋를 출선하여 동일 松嶋에 도착했고, 동 16일 松嶋를 떠나 18일 아침에 隱岐嶋 內의 西村 해안에 도착, 동 20일 大久村 나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西村의 해안은 거친 해안이어서, 동일 中村의 나루로 들어갔는데, 다음날인 19일에 떠나 동일 저녁 大久村안의 가요이浦라는 곳에 배를 묶어두고, 20일에 大久村으로 갔다고 합니다.

一 竹嶋와 조선 사이는 30리,  竹嶋와 松嶋 사이는 50리라고 합니다.

▲ 서기2005년 일본 시마네현의 민가에서 발견된 '원록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 이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가지고 간 팔도지도를 보여 주면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강원도에 속하는 섬'(江原道 此道中 竹嶋松嶋有之)이라고 일본 관리에게 주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가 독도라는 증거...거리로도 증명되...

조선에서 인지한 섬이 댓섬이 아니라 독도라는 것은 <숙종실록>과 위의 <원록각서>에 명시된 울릉도에서 자산도까지의 거리, 방향, 자산도의 모습 등에 의해 입증된다.

첫째 울릉도에서 자산도(松嶋)까지의 거리에 의해 자산도(松嶋)는 독도이다.

<원록각서>에서 안용복은 '울릉도(竹嶋)와 조선 사이는 30리, 울릉도(竹嶋)와 자산도(松嶋) 사이는 50리'(竹嶋ト朝鮮ノ間三十里竹嶋ト松嶋ノ間五十里コレ在ル由申シ候)라고 진술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실제 동해안에서 울릉도까지의 거리는 130.3km, 울릉도 독도간 거리는 87.4km이다. 안용복은 울릉도(竹嶋)와 자산도(松嶋) 사이의 거리는 울릉도(竹嶋)와 조선간 거리보다 더 먼 50리라고 진술했다. 자산도(松嶋)는 울릉도 동쪽 2km에 있는 댓섬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자산도(松嶋)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둘째, <숙종실록> 과 <원록각서>에 명시된 자산도(松嶋)의 방향에 의해서도 자산도(松嶋)는 독도이다.

<원록각서>에는 자산도(松嶋)는 울릉도(竹嶋)에서 일본 오키도 가는 방향에 있다는 것이 기록되어있다. ‘5월 15일 울릉도(竹嶋)를 출선하여 동일 자산도(松嶋)에 도착했고, 동 16일 자산도(松嶋)를 떠나 18일 아침에 오키도(隱岐嶋) 내의 니시무라(西村) 해안에 도착’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숙종실록>에는 안용복이 ‘자산도에 가서 왜인들의 솥을 깨트리고 다시 왜인들을 쫓아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다’ 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즉, <숙종실록>에 기록된 안용복이 일본에 간 경로는 울릉도 → 자산도(일본명 松島) → 옥기도(玉岐島) → 호키주(伯耆州)이다. 옥기도는 그 발음으로 보아 오키도(隱岐島)임이 틀림없다.

<숙종실록>에서의 경로는 <원록각서>에서의 울릉도 → 자산도(松嶋) → 오키도(隱岐嶋)의 경로와 일치한다. <숙종실록>과 <원록각서> 모두 울릉도에서 일본 오키도 가는 방향에 자산도(松島)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시모조 마사오는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댓섬이라고 주장하나 , 울릉도 동북에 있는 댓섬은 오키도 가는 방향과는 다르다. <숙종실록>과 <원록각서>에서의 자산도(松島)는 그 방향으로 보아서도 댓섬이 아니라 독도이다.

셋째, 우산도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숙종실록>의 기록에 의하여도 우산도는 댓섬이 아니라 독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도의 모습에 대하여는 <원록각서>에서는 언급이 없고, <숙종실록>에서만 언급되어있다.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子山島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기름(魚膏)을 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는 진술이 그것이다. 당시 일본 호키주 어부들의 울릉도 2대 특산물은 말린 전복과 바다사자 기름이었다. 호키주 어부들이 자산도에서 고기기름을 끓이고 있었다는 것은 독도에서 바다사자 기름을 끓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독도는 동도와 서도의 2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변에 수많은 암초와 얕은 바다가 있어서 배를 정박하고 고기기름을 끓일 정도의 공간은 충분히 있다. 그 반면에 댓섬은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어 현재도 섬 남쪽의 나선형 계단이 유일한 진입로이다. 배를 정박하거나 솥을 걸고 고기기름을 끓일 공간이 댓섬에는 없다. 자산도의 모습에 대한 󰡔숙종실록󰡕의 간단한 기록만으로도 그 자산도는 댓섬이 아니라 독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증명해...

다만, 안용복이 1696년 일본 호키주 가는 길에 자산도에서 왜인과 충돌하여 솥을 깨트렸다는 <숙종실록> 진술 내용은 일본문헌에 의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병섭은 그 전해에 있었던 일로 추정하고 있다.

독도-오키도간의 거리는 157.5km나 되는 먼 거리이고, 망망대해를 거쳐야 하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안용복일행이 일본 어부를 따라가지 않고는 오키도 가는 방향조차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숙종실록>에서 ‘왜인의 솥은 깨트렸다’는 안용복 진술내용은 그 전해가 아니라 <숙종실록>에 기록된 대로 그해에 있었던 사실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숙종실록>의 자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로서, 그 거리, 방향, 모습은 현재의 독도와 대략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현재와 같이 경위도에 의한 위치표시와 촬영된 사진에 의한 모습과 같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숙종실록>의 자산도가 독도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며, 울릉도 동쪽 2km에 있고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댓섬이 아님은 명백하다. 조선 숙종대 1696년에 이르러 조선은 독도를 정확히 인지하고 실록에 기록한 것이다(5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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