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 조선정권이 못한 것을 민간인 안용복이 하다...

 

 

 

독도야 정말 미안해(3)...

정태만의 독도는 우리 땅(3)

울릉도와 독도에 우글대는 왜구,

격노한 안용복에 고양이 앞의 쥐꼴로 달아나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도쿠카와 막부정권의 장군(관백)의 서면 약속까지 받아낸 안용복...

안용복 일본에서 푸른 철릭입고 검은 포자 쓰고 가죽신 신고 교자타고 독도 우리 땅 찾다.

 

숙종실록의 ‘자산도’ 는 무엇인가...

1693년 울릉도에서 일본으로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안용복은 3년 후인 1696년에는 자진해서 도일하였는데 2차도일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숙종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초의 󰡔세종실록󰡕지리지에 비해, 󰡔숙종실록󰡕에는 독도에 관해 보다 분명한 지리적 인식과 그에 바탕을 둔 영유권 의식이 기록되어 있다. 편년체(編年體) 기록인 실록의 성격상 안용복의 진술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독도와 그 영유권에 대해 안용복 2차 도일시의 진술을 바탕으로 한 1696년 9월 25일자 <숙종실록>의 기록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도(독도)도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

"왜선(倭船)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 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松島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 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松島卽子山島, 此亦我國地, 汝敢住此耶?)’ 하였습니다."

 

▲부산 수영사적공원에 있는 안용복 동상. 안용복은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조선정부의 관리로 가장하여 당당하게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밝혔다.

독도에서 음식하는 왜구 가마솥 뒤엎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도(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자산도 등을 조선(朝鮮)의 지계(地界)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書契)까지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정식(定式)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伯耆州)에 전보(轉報)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완(憤惋)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伯耆州)로 가서 울릉 자산 양도 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 가칭(假稱)하고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철릭[帖裏]를 입고 검은 포립(布笠)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轎子)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밑줄은 필자 주)

 

이와 같이 조선정부는 1696년 안용복 일행이 울릉도에서 왜인을 만나 자산도(子山島, 일본명 松島)가 조선땅임을 주장하고, 왜인을 쫓아 자산도에 가서 왜인의 솥을 부수고, 다시 일본 옥기도(玉岐島)를 거쳐 호키주(伯耆州)에 가서 ‘울릉자산양도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을 가칭한 것으로 <숙종실록>에 기록해 두고 있다.

<숙종실록>에서 독도의 인식이 정확했다는 것은 <원록각서>, <인번지>因幡志) 등 일본의 고문헌과 연계시킴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숙종실록>에는 ‘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고 안용복이 가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의<인번지>에는 그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번지>에는 <그림 2>와 같이 1696년 안용복 일행이 타고 간 배에 달고 간 깃발이 그려져 있고 11명의 이름과 신분이 기록되어 있다.

▲ <그림 2> 1696년 안용복 일행 11명이 달고간 ‘朝鬱兩島監稅將’ 깃발과 명단.

깃발에 쓰여진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중 ‘조울양도’(朝鬱兩島)의 의미에 대해 <인번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右는, 靑屋村 茶屋九良右衛門이라는 자가 소지하고 있다. (중략) 다음에 그린 선험(船驗)은, 元祿 9년 6월 5일 조선인 11인 기(騎)의 배가 靑屋의 나루(津)에 도착했을 때의 선험(船驗)의 사본이다. 조울량도는 울릉도[일본에서는 이를 竹島라 칭한다] 우산도[우사무수무, 일본에서는 松島라 부른다]이다(두꺼운 줄은 필자 주)."

 

안용복의 독도는 우리 땅 주장을 담고 있는 일본의 문서...

<인번지>의 원본에는 우산도의 ‘于’인지 자산도의 ‘子’인지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漢字가 애매하게 쓰여 있지만, 그 발음은 ‘우사무수무’(ウサムスム)로 한자와 병기되어 있다. ‘우사무수무’는 ‘우산섬’의 일본식 발음이다. 당시 ‘子山島’라는 글자와 상관없이 ‘우산도’로 불리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후의 기록인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등에는 안용복이야기의 우산도는 ‘芋’자를 쓰고 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풀초변(艹)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子山’이라는 명칭에 대해 송병기는 母島인 울릉도에 대응하는 子島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김화경은 <원록각서>의 ‘소우산(ソウサン)’을 근거로 작은 우산이라는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일본어 소통이 불완전하나 독도는 우리 땅 확인되...

당시 조선에서 독도를 어떻게 불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본 측 고문헌은 2005년 시마네현 오키도의 민가에서 발견된 <원록각서>이다. 1696년 안용복 2차도일시의 조사기록인 <원록각서>에 의하면, ‘子山’의 발음은 ‘소우산’(ソウサ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一 안용복이 말하기를 竹嶋를 대나무섬이라고 하며, 조선국 江原道[강온타우] 東萊[토우나이]부내의 鬱陵嶋[운롱타우]라는 섬이 있는데, 이것을 대나무섬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팔도의 지도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一 松嶋는 같은 강원도 내의 子山[소우산]이라는 섬입니다. 이것을 松嶋라고 한다는데 이것도 팔도의 지도에 쓰여 있습니다.

 

이 기록은 일본어가 가능했던 조선인 안용복이 말한 것을 오키도의 일본관리가 듣고 적은 것이다. 당시 일본어 소통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소우산’은 ‘그렇다’라는 뜻의 ‘소우데스’(そうです)의 줄임말 ‘소우’(そう)와 ‘우산’이 잘못 연결되어 일본 오키도의 관리가 듣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소우(そう)+우산’에서 ‘소우’를 지우면 ‘子山’의 발음은 ‘우산’이 된다.

<인번지>와 <원록각서>에서 ‘子山’의 발음에 관한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 조선에서는 ‘于山’을 ‘子山’으로 잘못 적은 기록이 있었지만, 부르는 것은 ‘우산’으로 불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숙종실록>과 일부 고지도에 ‘子山島’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독도를 ‘자산도’라고 불렀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본다(4부에서 계속).

 

*독도가 우리 땅임을 일본 국가 문서가 증언: http://m.cafe.naver.com/dokdostudy/142

 

글: 정태만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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