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의심해서 섬으로 들어가면 처벌하고 심지어 역적으로 논의되다...

 

독도야 정말 미안해2

정태만의 독도는 우리땅(2)

백성을 소유물로 여긴 소중화 조선왕조,

백성이 섬에 들어가는 것은 소중화 조선왕조의 지배, 통제를 벗어난 것...

독도문제의 뿌리는 소중화 조선의 섬 포기정책에 있다.

對중국 사대노예의 성리학적 유교질서가 빚은 참극...

 

또 어제 일본 외상,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가 독도는 국제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일본 땅이라고 망언을 했다. 경기도에서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하겠다는 보도가 나오자 이 같은 망언을 또 한 것이다. 일제침략범죄에 대한 시효를 부정하고 잔악한 일제의 전쟁범죄를 상징적으로 고발하는 것이 소녀상 설치다. 일본은 한국 민간단체가 한국주재 일본 공관 앞에 소녀상을 계속 설치해 나가자 나라를 대표하는 자들의 입을 빌어 발작 증세에 가까운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자,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들였다. 외국에 주재하는 본국 대사까지 불러들인다는 것은 일본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트집 잡아 한일간 통화교환협정까지 파기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친일파 정권 독도 사실상 일본에 넘겨...

이에 대한 우리정부의 대응은 어떨까? 예상대로 일본의 독도망언에는 ‘개탄한다’는 정도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대응이다. ‘외국공관에는 소녀상 같은 조형물을 설치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독도에도 소녀상을 설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파 정권들어서 나라의 모든 분야가 급속도로 허물어져가고 있다. 윤병세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을 통해서 이 정권의 실체가 또 다시 확인된다. 올바른 국가관과 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수많은 인재가 이 땅에 널려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자만 골라서 일국을 대표하는 자로 앉히는지 이 정권의 능력도 참 비상하다는 자조가 나올 지경이다. 그런데 이 같은 외교부장관의 망언을 김관용 경북지사가 거들고 나섰다.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독도는 청정지역이고 문화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발언을 해석하면 소녀상을 설치하면 독도가 더러워지고 독도를 훼손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일본 같으면 우익의 총탄 세례를 받고도 남을 망언들이다.

▲ 왼쪽부터 김관용 경북지사, 윤병세 외교부장관. 윤 장관은 서기2017.1.17. 공관앞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고, 김 지사는 서기2017.1.18. 그의 발언을 반대로 해석하면 독도에 소녀상을 설치하면 '독도가 더러워지고 훼손된다'고 했다.

 

독도, 소중화 조선의 海禁정책이 빚은 비극...

우리 국토의 막내, 독도는 이런 친일파 정권의 매국행위선상에서 보면 독도의 운명이 보인다. 사재를 털어 고군분투하며 독도수호를 하는 민간인들의 피나는 노력을 제외하면 지금 독도는 일본에 넘어간 것과 다름없다. 이명박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한 발언이 독도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독도를 일본인들에게 자국 것으로 욕심내게 만든 근본원인은 누가 제공했을까? 친일파정권의 조상, 소중화 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중화 조선정권은 고려의 해양 정책을 버리고 對중국 사대주의를 국시로 삼아 중국 명나라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정신적 부모나라인 명나라가 바다를 막아 버리는 해금海禁정책을 실시하자, 이 정책을 그대로 도입하여 바다는 물론 섬도 모두 폐쇄해 버렸다. 독도는 말할 것도 없고 울릉도까지 무주공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고립으로는 살 수 없는 일본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져 왜구가 창궐하게 만들었고 왜구 창궐의 확장인 임진왜란까지 불러왔다. 독도문제도 이런 소중화 조선의 폐쇄정책에서 시작되었다. 이하에서는 지난번에 이어 소중화 조선정권의 섬을 비우는 정책에 따른 독도의 위상을 짚어 본다(이상 편집자 주).

 

정태만의 독도는 우리땅(2)

소중화 조선정권이 아무리 막아도 백성은 먹고살아야 하기에 ...

조선 초기의 울릉도 거민쇄출 정책으로 울릉도 거주는 금지되어 있었으나, 울릉도 부근의 어로작업까지 엄격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을 통해 조선정부의 공권력이 무너지고, 17세기의 소빙기(小氷期)가 닥치자 농업이 막대한 타격을 받아 유리도산(流離逃散)하는 농민이 많아졌다. 그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범월(犯越) 문제가 생기고, 울릉도에는 동남해 연안어민들이 숙종조 이전부터 많이 들어갔다. 울릉도에서 조선과 일본 양국어민들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어서 조선 숙종18년(1692) 울릉도에서 대규모로 조업중이던 조선어부들이 돗토리번(鳥取藩) 호키주(伯耆州)의 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693년 다시 울릉도에서 충돌하게 되고 조선어부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호키주 어부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울릉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과 외교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를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라 하며, 일본에서는 다케시마잇켄(竹島一件)이라 한다.

안용복사건 이전부터 조선어부들이 울릉도와 부근의 섬에서 조업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비변사등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처벌을 감수하고 생존을 위해 바다로 나가는 백성들...

좌의정 목래선(睦來善)이 아뢰기를 "방금 동래부사의 장계를 보니 사명을 봉행하는 차왜(差倭)의 말씨가 꽤 온순하여 별로 난처한 사단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경상도 연해의 어민들은 비록 풍파 때문에 무릉도(武陵島)에 표류하였다고 칭하고 있으나 일찍이 연해의 수령을 지낸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바닷가 어민들이 자주 무릉도와 다른 섬에 왕래하면서 대나무도 베어오고 전복도 따오고 있다 하였습니다. 비록 표류가 아니라 하더라도 더러 이익을 취하려 왕래하면서 어채(漁採)로 생업을 삼는 백성을 일체 금단하기는 어렵다고 하겠으나 저들이 기왕 엄히 조항을 작성하여 금단하라고 하니 우리 도리로는 금령을 발하여 신칙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민암(閔黯)은 아뢰기를 "접위관(接慰官)이 돌아와봐야 자세히 알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 해변의 주민들은 어채로 업을 삼고 있으니 아무리 엄금하려 해도 어쩌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오직 적발되는 대로 금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바닷가 어민들은 날마다 이익을 따라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야 하니 일체 금단하여 살아갈 길을 끊을 수는 없는 형편이나 이 뒤로는 특별히 신칙하여 경솔하게 나가지 못하게 하고 접위관도 이런 뜻으로 조사하여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밑줄은 필자 주)

 

위의 <비변사등록>에서 ‘무릉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며, ‘다른 섬’은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안용복사건 이전부터 자주 울릉도와 독도에 까지 출어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우리 국토의 최 동단, 독도에 갈매기떼가 날아들어 '독도는 내가 지킨다'를 웅변하듯이 독도를 감싸고 있다.

섬을 폐쇄시키자 왜구가 와서 들끓어...

<죽도고>(竹島考) 등 일본문헌에서는 1692년부터 울릉도(竹島)에서 조선인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고 하나, 위 기록을 통해 조선인들이 그 이전부터 울릉도와 다른 섬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울릉도와 독도에 드나든 사람들은 관에 알리지 않고 몰래 들어갔고, 적발이 되면 풍파 때문에 무릉도에 표류했다고 둘러대었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서에 울릉도와 독도에 내륙인이 드나들었다는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안용복과 박어둔이 울릉도에 갔다가 일본 어부들에 의해 납치되면서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부근의 다른 섬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이 안용복사건 이전에도 많았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조선과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 사이에 ‘울릉도쟁계’가 발생하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1692년 조선어부들이 일본 호키주 어부와 조우했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일본 측 문서에서도 독도로 볼 수 있는 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692년 호키주 어선의 선두(船頭)가 돗토리번에 제출한 「삼가 아뢰는 구상서」(乍恐口上之覺)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배에 태우고 말하길,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조선 가와텐 가와지(國村)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섬은 장군에게 배령하고 매년 도해하는 섬인데 어찌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 섬보다 북쪽에 섬이 있어, 3년에 한 번씩 국주(國主)의 명으로 전복을 채취하러 온다. 우리나라에서 2월 21일에 배 11척으로 나왔는데, 난풍을 만나 반이 돌아가고, 결국 5척의 53명이 타고 이 섬에 3월 23일에 표착했다 한다.

 

오히려 일본자료를 통해서 독도의 실체를 파악해야는 기가막힌 현실...

1692년 당시 조선어부들은 일본 호키주어부에게 “울릉도보다 북쪽에 섬이 있어서 3년에 한 번씩 국주의 명으로 전복을 채취하러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울릉도에서 일본어부와 충돌한 상황에서 울릉도보다 일본에 더 가까운 동쪽방향 독도에 조업하러 간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방향을 실제보다 다르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북쪽에 있는 섬은 독도로 추정할 수 있다.

1693년 납치된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에서 한 진술은 섬의 명칭까지 ‘우산도’라고 언급하고 있다. 󰡔죽도기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나간 섬의 이름은 모릅니다. 이번에 나간 섬의 동북에 큰 섬이 있었습니다. 그 섬에 머물던 중에 두 번 보았습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말하기를 우산도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대체로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로 보였습니다.

 

왜구의 안용복 납치로 파악되는 독도...

인질은 납치된 안용복과 박어둔을 말한다. 인질이 가본 적이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안용복은 우산도라고 하는 섬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는 이 기록에 나오는 섬,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댓섬이라고 주장하나, 울릉도 동쪽 2km에 있는 댓섬은 하루 거리가 아니다. 다만 우산도의 방향은 독도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울릉도로 부터 ‘동북방향’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의 독도방향인 울릉도 ‘동동남 방향’과는 다르다.

안용복 납치사건 이후 대마번(對馬藩)에서는 양국간에 분쟁대상이 된 섬에 대한 자체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당시의 내부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우루친도’(울릉도) 이외에 ‘부룬세미’라는 섬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부룬세미의 일은 다른 섬입니다. 듣자하니 우루친토라고 하는 섬입니다. 부룬세미는 우루친토보다 동북에 있어, 희미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죽도기사>의 이 기록 역시 울릉도 동북에 울릉도와 다른 섬 ‘부룬세미’가 있는데 희미하게 보인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4개 자료에는 모두 울릉도와 다른 섬, 울릉도 동북 또는 북쪽 방향에 있고 희미하게 보이거나 하루거리에 있는 섬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이 우산도라는 섬에 대해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정확한 지식을 근거로 기록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섬이 <세종실록>지리지와 마찬가지로 독도로 추정되지만, 자료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다(3부에서 계속).

글: 정태만(인하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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