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우세력의 끝없는 침략야욕, 어떻게 분쇄할 것인가...

 

독도야 미안해...

정태만의 독도는 우리 땅(1)

일본은 우리를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일거수 일투족을 다 감시하고있다...

반면에 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른다...

일본의 독도침략에 동조하는 국내 한국인 일본 간첩들...

 

“한국인들은 불처럼 확 일어났다가 금방 꺼진다. 체계적인 전략이 없다. 그러니 늘 일본에게 당한다...” 한국으로 시집와서 50대 중반을 살아가는 강남의 일본여인이 하는 말이다. 나카무네 료코씨의 이 말은 일본의 독도 침략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에도 적용된다. 정부는 일본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외치면 한국주재 일본대사를 불러 ‘초치’하는 정도다. 민간차원에서 1회성 행사로 끝나는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독도를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국력을 기울여 일본영토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일본의 독토침략에 동조하는 국내 세력이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밥벌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하대 연구교수, 정태만 박사에 의하면 국내 대학의 독도 관련연구소에서 일하는 수많은 인력들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도문제 전문가인 정태만 박사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독도관련 학회에 논문게재 신청을 하면 퇴자를 맏는 다고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독도문제는 단순히 독도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독도침략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자민당세력과 이를 밀고 있는 극우파의 오래된 제국주의 침략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황국사관이다. 자민당 세력은 우리를 식민지배한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후예들이다. 우리나라를 맨 처음 침략하여 일본을 부국강병케하라고 한 명치유신의 정신적 지주 요시다 쇼인을 숭배하는 세력이다. 얼마 전에 일제침략의 피해를 본 국가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방위상, 이나다도모미(稻田朋美)가 일본제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 일본 방위상, 이나다도모미(稻田朋美)가 지난해 12월19일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들이 들어가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참배를 하고 나오고 있다. 사진 오른쪽 하단은 전범을 기리는 참배를 하고 나서 아베 총리와 함께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공격으로 죽은 미군을 참배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 진주만으로 향하고 있다. 이들의 얼굴상을 보면 오늘날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모두 일제침략의 본거지인 '조슈(長州)'번=야마구치현의 후예들이다.

그런데 이 야스쿠니 신사에 한국침략의 교사범, 요시다 쇼인이 제1순위로 ‘모셔져’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고이즈미 전 수상과 현 수상 아베가 요시다 쇼인의 어록을 숭배하는 자들이라는 사실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독도 침탈이 우리나라 재침략의 발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일본은 우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한말처럼 본격적인 침략에 앞서 빌미를 만들기 위함이다. 얼마 전에 한일군사정보협정을 기필코 성사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일본에는 수많은 연구소가 있다. 그러나 말이 연구소지 실체는 정보수집기관이다. 대표적인 것이 ‘아시아경제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우리나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탐사와 서적 수집 등 직접 수집하기도 하지만 한국인을 포섭하여 고정간첩 식으로 수십 년 동안 관리하며 직접 이들로부터 관련 정보를 빼 내가고 있다. 이것을 저들은 ‘인맥구축’이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인 학자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이다.

 

일본의 한국내 간첩활동의 실태...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로 있는 호사카유지(保坂祐二)씨가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에 대한 연구를, 적어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연구정도는 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호사카 교수는 특히 일본에 대한 정보력을 강조했다. 현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보력과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정보력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일본이 월등하게 높다고 한다. 그는 일본은 한국내의 모든 분야를 사진을 찍어 놓은 듯이 훤히 알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재침략을 앞두고 있는 피해자로서 섬뜩한 경고다.

일본의 정보수집은 구한말에도 그랬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기전 정보수집을 통해서 침략의 발판을 다졌다. 정한론征韓論의 두목, 사이코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보수집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역사인식으로 일본의 독도침략을 바라 볼 때 근본적인 대책이 나올 수 있다. 본지는 일본의 독도침략을 일본의 對한국 재침략의 전초전으로 보고 독도가 분명히 우리 땅임을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일본침략을 원천적으로 분쇄하고자 한다. 독도가 명명백백히 우리 땅임을 알리는데 고분부투하고 있는 독도전문가, 인하대 정태만교수의 기사를 연재한다. 그 첫 번째로 우리 사료에 나타나는 독도를 밝힌다(이상 편집자 주).

 

울릉도와 독도와의 관계는?

울릉도의 영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신라 하슬라주(강릉)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우산국이 귀복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강릉)의 정동 쪽의 해도에 있어 혹은 울릉도라고도 하는데, 땅이 사방 100리로, 천험을 믿고 신라에 귀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되,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 위세로써 내복하게 하기는 어려우나 계교를 써서 항복받을 수는 있다.’하고,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三國史記> 卷 4, 「新羅本紀 4」, 智證王 13年 夏6月條.)

신라의 우산국정벌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이외에도 <삼국유사>,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성호사설> 등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많은 기록 들은 신라의 우산국 정벌이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우산국에 울릉도 뿐 만 아니라 독도도 포함되는가?

우산국인이 독도까지 지배했는가?’이다. 이는 우선 지리적 접근성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수학적 분석 결과를 인용해 보면 <그림 1>과 같이 독도는 울릉도 해발 90m정도에서 부터 볼 수 있고, 해발 500m정도에서 독도 전부를 볼 수 있다.

▲ <그림 1> 울릉도에서 독도를 볼 수 있는 고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해발 200~300m이다. 즉, 울릉도 주민의 일상 생활권에서 독도를 볼 수 있다. 그 반면에 일본 오키도(隠岐)에서는 정상에서도 독도를 전혀 볼 수 없다. 독도를 보려면 망망대해를 거쳐 100km이상 배를 타고 나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독도 주변은 작은 암초가 많아 얕은 바다에 좋은 어장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산국인이 오래전부터 독도를 인지하고 그 부속섬 독도에서 어로작업을 했을 거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우산국정벌 이래 우산국은 해마다 공물을 바쳤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울릉도와 본토의 교류는 계속되어 왔다. 고려시대 울릉도와 본토의 교류 내용은 <고려사>지리지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가 있다.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 우산국이라 칭하고 무릉 또는 우릉이라고도 하였다. 지방이 1백 리이며 지증왕 12년에 항복하여 왔다. 태조 13년에 그 섬 사람 백길토두로 하여금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의종 11년에 왕이 울릉도는 땅이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옛적에 주현을 두었으며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 김유립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김유립이 돌아와 아뢰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어 산정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가면 바다에까지 10,000여 보가 되고 서쪽으로 향해 가면 13,000여 보가 되고 남쪽으로 향해 가면 15,000여 보가 되며 북쪽으로 향해 가면 8,000여 보가 되며 촌락의 기지가 7개소 있으며 석불, 철종, 석탑이 있으며 시호, 호본, 석남초가 많이 나 있으나 바위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니 드디어 그 의론을 중지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우산도와 무릉도는 본래 두 섬으로 서로 거리가 멀지 않고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소중화 조선의 울릉도 독도 정책은...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대부터 왜구의 침입을 경계하여 울릉도 거주민을 본토로 쇄출하는 정책을 쓰게 되었다. 강릉도(江陵道)의 무릉도(武陵島) 거민(居民)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하였으니, 감사(監司)의 아룀에 따른 것이었다. 태종·세종대의 거민쇄출 정책과 그 결과에 대해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조 태종(太宗) 때에 유민(流民)들이 이 섬으로 많이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삼척의 김인우(金獜雨)를 안무사(按撫使)로 임명하여 두 번이나 데려왔다. 세종(世宗) 20년 현인(縣人)인 만호(萬戶) 남호(南顥)가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도망자를 수색하여 김 환(金丸) 등 70여 인을 잡아 모조리 데려온 뒤엔 이 땅은 텅 비게 되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자 그에 대한 정보도 점차 한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정보는 오히려 울릉도에 사람이 거주하던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비해 더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다. 태종 16년에는 중앙정부에서 동해상에 울릉도와 또 하나의 섬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고, 이듬해에는 김인우를 안무사(安撫使)로 삼아 우산(于山), 무릉(武陵) 등지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종·세종대의 울릉도와 ‘우산도’ 인지를 통해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우산, 무릉 두 섬이 동해 가운데에 있고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태종·세종대의 김인우, 남회 등의 안무사(安撫使), 순심경차관(巡審敬差官) 등의 활동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독도의 옛 이름은 무릉...

우산, 무릉 두 섬이 동해 가운데에 있고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다.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 혹은 울릉도라 불렀다.

명칭과 위치관계는 분명하지 않으나, 동해의 2개 섬이라면 울릉도와 독도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울릉도 동쪽 2km에 댓섬(죽도)이, 100여m 떨어진 곳에 관음도가 있으나, 이들 섬들은 크기나 위치로 보아 울릉도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고, 울릉도와 대등한 지위에서 울릉도와 별도의 섬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흐린 날이거나 태풍이 부는 날에도 보이므로 지리지에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필요 없다. 따라서,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우산, 무릉은 울릉도와 독도이다.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초기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울릉도 거민쇄출 정책의 엄격한 시행으로 점차 본토로부터의 인적이 끊어진 섬이 되었다. 조선초기 태종, 세종, 성종대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숙종대 1693년에 이르기까지 우산과 무릉에 관련된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세종 20년 순심경차관(巡審敬差官) 파견 이후 단순한 거민의 ‘쇄출’에서 ‘처벌’로 강화된 것이 보다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울릉도에 몰래 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자 울릉도와 우산도에 관한 혼란이 발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속지도인 「팔도총도」에는 동해에 울릉도와 우산도의 2개 섬이 그려져 있지만, 우산도와 울릉도는 대등한 크기로, 또한 우산도는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안용복과 장한상이 울릉도로 다녀온 이후 고지도의 경우 우산도는 울릉도의 동쪽, 혹은 동남쪽에 실제 위치에 가깝게 그려졌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팔도총도」를 모사하여 울릉도 서쪽에 우산도가 그려진 지도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2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