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의 지침에 따라 해석되는 고고유물...

 

고고유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사관에 맞춰 만들어진 해석으로 일관...

목간문木簡文은 문헌사료보다 사실성 높이는 원사료에 해당...

그런데도 문헌사료도 아닌, 일제식민사관이론에 따라 난도질 해석...

 

성산산성 발굴 목간은 언제 것 인가...

지난 서기2017.1.4. 경복궁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일단의 목간이 공개됐다. 경남 함안의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것이었다. 목간에는 신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지방의 ‘촌주村主’가 중앙의 관직인 ‘대사 大舍’에게 일정한 행정사항을 보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도한 언론매체들은 목간을 발굴하고 해석한 관련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편집해서 내보냈다. 목간은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 공무원이 중앙 공무원에게 지방행정 사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잘못을 아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목간의 연대를 서기 6세기 법흥왕때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흥왕때 율령이 반포되었으니 이 목간들은 법흥왕때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신라가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중앙이 완전하게 지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강단식민사학계는 이렇게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게 되었을 때 오늘날과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신라는 서기6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대표하는 한국고대사학회의 주장이다. 지난 서기2016.11.2. 한성백제박물관에서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하반기 고대사시민강좌를 맡은 홍익대 김태식 교수가 이와 같이 주장했다. 서기6세기 법흥왕때 와서야 고대국가가 완성되었다고 했다. 이것을 이른바 ‘성숙한 고대국가’라고 한다. 한국고대사학회는 동북아역사재단이 발주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하면서 독도를 제거하고 4세기까지 북한은 중국 땅이었다고 그린 집단이다. 매국역사지도집이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었고 결국 국회로 까지 비화되어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자리에서 3백점이 넘는 목간이 발굴되었다. 함안군청은 목간자료집을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사진: 함안군청).

우리의 현재 국사책은 일제의 조선총독부에 복무한 식민사학자들에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역사해석의 주요 자료인, 고고유물이 발견되어도 순수하게 유물 자체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식민사관의 지침에 따라 해석을 하고 있다.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사례에서도 증명된다. 처음에는 서기1세기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연대측정을 한다는 미명하에 연대를 대폭 낮추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라는 식민사관이론에 꿰어 맞추었다. 이번 함안의 성산산성 목간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고고유물인, 목간해석권까지  장악한 식민사학...

연합뉴스의 보도에서는 동국대학교 윤선태 교수와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의 주장을 실었다. 윤 교수는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은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 효력이 크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번에 출토된 목간으로 신라가 법치국가이자 문자가 일상화된 사회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라고 한다. 이 발언은 식민사관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 국민이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식민사관을 알면 이 주장은 식민사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 교수의 발언은 이번에 발굴된 목간이 법흥왕때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6세기에 율령이 반포되고 비로소 법치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신라가 6세기 이전까지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개한 국가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윤선태 교수는 지난2016하반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 시민강좌의 강사로 나와 식민사관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하야시다이스케(林泰輔)를 적극 띄운 인물이다.

 

경북대 주보돈 교수도 이 시민강좌에 나와서 식민사관을 전파했다. 중국 동북공정지도를 베꼈다고 비판받는 동북아역사지도집제작에도 참여했다. 주교수는 이번 목간도 서기6세기 것이라고 한다. "(목간) 두 면의 문구 마지막에 갈 지(之) 자가 있는데, 이는 이두식 표현일 수 있다"며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두는 8세기가 아니라 6세기부터 쓰였다고 봐야 한다." 라고 한다.

 

▲이번에 발굴된 성산산성 목간에는 당시 신라의 지방행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목간은 지금으로 말하면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에 지방사무를 보고하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목간에는 '大舍'라는 관직명이 나오는데 이 관등명은 서기1세기 유리이사금때 처음 시행된 것으로 나온다. 이번에 발굴된 목간을 서기1세기 유리이사금 때의 것으로 볼 근거가 더 많다.(사진: 함안군청).

그런데 이들이 목간이 서기6세기 것이라고 하는 근거는 있을까? 없다. 목간 하면 대략 서기6세기 것이라고 의견통일을 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근거라고 내놓은 것을 보면 목간에 대사大舍라는 관직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신라 관등 17계급에서 12관등 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율령을 법흥왕이 서기6세기에 반포했으니 이때 국가체계가 잡혔을 것이고 관등도 이때 정비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

그렇다면 고대 국가인 중앙집권국가의 증거로 내세우는 大舍대사라는 관직은 언제 등장할까? 무려 서기1세기 초반에 등장한다. 유리이사금때(서기24-57년)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이은 남해차차웅 다음의 3대왕인 유리이사금 때에 이미 대사라는 관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신라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조선(단군)의 유민들로 세운나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삼국사기-신라본기). 신라는 6부로 시작하였는데 이 6부가 모두 조선의 유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 땅이었던 신라지역에 조선이 망하자 그 자리에서 있던 사람들이 6부를 구성했고 이것이 신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빈터에 사람들을 어디서 끌어다가 모아서 만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그 백성들이 그대로 소중화 조선백성들이 된 것과 같은 이치다. 정치 체나 제도 등 국가를 이루는 요소들도 마찬가지다. 신라가 서면서 신라에 맞는 체제와 제도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강단식민사학계는 무주공산에다 사람을 하나둘씩 모아다가 부락연맹체 수준에서 출발하여 결국 서기6세기 때 와서 비로소 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서기610년 이전에 종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성산산성 목간이 서기6세기 것이 아닐 가능성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료도 있다. <일본서기>다. 이 사료에 의하면 고구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를 전해 준 것이 서기 610년이다(日本書紀-卷二二推古天皇十八年(六一〇)三月十八年春三月。高麗王貢上僧曇徵。法定。曇徵知五經。且能作彩色及紙墨。幷造碾磑。盖造碾磑始于是時歟). 목간은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던 문서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기610년에 일본에 종이를 전해 주었다면 이미 우리나라는 종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비록 고구려지만 신라에서도 사용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서기610년이면 서기7세기 초다. 서기6세기에도 종이가 상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데도 식민사학은  서기6세기에도 아직 종이가 없어 목간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국사관련 국가기관은 일본과 중국을 위해 복무...

이것은 일제의 조선총독부 사관인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터 잡은 주장이다. 광복71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식민사관은 하나도 청산되지 않고 서기21세기 지금까지 우리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세력들이 우리나라 모든 대학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키워낸 자들이 전국 모든 박물관과 고고유물발굴 각종 문화재연구소등을 장악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국학을 연구하라고 세운, 한국학중앙연구원과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라고 세운 동북아역사재단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역사관이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동북아역사재단이 오히려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짓을 하고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라는 지도를 제작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이번에 발표된 목간을 고고학조차도 장악한 식민사학계는 일률적으로 서기6세기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목간에 대한 연대측정결과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충분히 탄소연대 측정이 가능할 텐데 이러한 시도를 했는지도 의문이다(사진: 함안군청). 일본서기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이미 서기610년에 고도의 제지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목간에는 촌주村主라는 용어도 나온다. 이 용어는 문무왕(서기661-681)때 처음 등장한다. 서기7세기 말이다. 이번 목간을 식민사관에 따라 해석한 식민사학자들에 의하면 이 촌주라는 기록과도 안 맞는다. 촌주라는 용어를 기준으로 따질 때 오히려 이 목간들은 서기7세기 때 것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식민사학자들이 목간을 해석하면서 중앙의 ‘京位’ 지방의 ‘外位’ 운운하며 이 목간이 서기6세기 것이라는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정작 경위니 외위니 하는 것은 서기7세기 후반의 문무왕 때가 되어서야 등장하는 말이다.

결국 역사는 선택과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따라 우리역사를 외소하고 축소 지향적으로 해석한다. 이번 목간과 관련한 해석을 보더라도 식민사학자들이 얼마나 우리역사를 과학적 합리적 기준 없이 자기들 멋대로 식민사관에 따라 난도질하는지 알 수 있다.

 

국가개조의 제1 과제는 식민사관 청산...

족보는 개인과 가문의 정체성이다. 역사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정체성이다. 사람은 정체성을 먹고 산다.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이 없다는 것은 정신 나갔다는 말이다. 정신병자라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배우고 있는 우리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하지 않는다. 일본의 정체성, 중국의 정체성을 주입시키고 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얘기다. 그래서 오늘날 까지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부패와 타락 그리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행세하고, 몰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나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대선 유력 후보들이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혁명적 개혁과 국가개조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식민사학(친일식민사관)을 학자들 간의 학설 다툼으로 치부하는 한 아무리 혁명적 개혁을 해도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다시는 오지 않을 지도 모를 광화문 촛불민중봉기를 또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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