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합리주의와 이성이 발달해도 무당이 늘어나는 것은 왜 일까?

 

서구학자들은 종교의 원형을 무당과 굿에서 찾는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에는 무당이 있고 굿이 있다...

굿과 무당을 전파론적 관점에서 볼 수는 없을까...

그 기원은 어디일까...

 

왜 우리는 무당을 만신이라고 할까? 만신萬神은 말 그대로 만 가지 신이 무당에게 내린다는 뜻이다. 또는 만 가지 신을 무당이 부린다고도 할 수 있다. 무당만신은 아득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중국인의 조상에 황제헌원이 있다. 중화삼조당에 황제헌원은 염제신농과 치우와 함께 중국인의 원시조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홍산문화와 관련하여 이를 황제가 만든 문화라고 하며 우리를 이 황제의 후손으로 만들어 중국인에게 가르치고 있다. 탐원공정과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역사공정으로 그렇게 정리를 해 놓은 것이다.

 

중국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헌원, 우리민족에게서 배워가...

그런데 중국의 시조라고 알려진 이 황제헌원에 관한 기록을 보면 황제가 도를 닦은 후 만신을 부르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만신을 부른다는 것은 그가 곧 무당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는 중국의 <포박자>라는 문헌에 나오는 기록이다. <포박자>는 신선神仙에 관한 문헌이다. 이 문헌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가서 일정한 목적을 이룬다. 그런데 동방의 청구에 와서는 풍산을 지나서 자부선생을 친견한 후 ‘삼황내문’을 받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도를 닦는 수행을 하여 마침내 만신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昔黃帝東到青丘過風山見紫府先生受三皇內文以劾召萬神/ 抱朴子內篇卷之十八地真). 동방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말한다. 특히 청구는 우리를 특정 하는 용어다. 황제가 동방의 청구에 와서 자부선생을 알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부선생에게서 <삼황내문>이라는 신비한 책을 받는다.

 

중국의 시조, 황제헌원 알고보니, 우리에게서 내림굿을 한 무당...

이를 통해서 만신을 부리는 능력을 가진다. <삼황내문>을 통해서 황제가 무당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삼황내문>은 자부선생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삼황내문>을 준 자부선생도 무당이라는 얘기가 된다. 황제헌원이 활동한 시대를 보통 서기전 3천년이전으로 잡는다. 우리로 말하면 한웅천왕의 신시 배달국시대다. 진서로 밝혀진 <규원사화>를 보면 한웅천왕을 호국백두악 태백선인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나오는 한웅천왕은 천부인3개를 가지고 태백산정 신단수에 내려 신시를 열고 있다. 한웅천왕을 선인이라 부르고 그 시대에 선인의 뜻도 들어 있는 자부선생이라는 사람이 무당이라는 것은 한웅천왕도 무당이었다는 얘기다.

이 시대는 중국의 요임금 시대나 우리의 조선(단군)시대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중국문헌의 기록으로도 우리 무당의 역사는 5천년을 넘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삼국유사> ‘고조선’기를 보면 한웅천왕이 신시를 열기 전에 이미 천부인3개가 존재한다. 천부인 3개는 보통 거울과 방울과 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 무당의 기본 무구가 이 3개의 물건이다. 신시가 열리기 전에 이미 무당을 암시하는 천부인 3개가 존재한다. 이는 우리민족의 역사가 무당의 역사로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 무당의 역사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되었음을 말한다.

 

무당의 기원, 한웅천왕까지 거슬러 올라가...

무당은 아득한 옛날에는 센이仙人으로 통하다...

이렇게 아득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의 무당은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이 장구한 역사를 이어가고 있을까? 새해 닭의 해가 시작되었다. 닭이 우리역사에서 상징하는 바는 고구려의 삼족오이고 백제의 백제대향로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신령한 봉황이다. 신라로 말하면 박혁거세 부인 알영의 입이 닭의 부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역시 신성한 무당을 뜻하는 새다. 예로부터 새는 하늘을 상징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새는 신시배달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만주 평강지역에서 발견된 금제유물을 보면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곰과 범 그리고 이리를 감싸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자손을 뜻하는 한웅천왕의 신시배달국의 상징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유년 닭의 해는 지금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탄핵정국과 맞물려 구체제를 갈아엎고 새로운 시대이자 원시반본의 신시 배달국의 홍익인간 세상을 복원하는 상징성을 담고 있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토대를 우리의 원형으로 다질 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원형질을 간직해서 이어 오고 있는 무당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혼돈의 시대에 중심을 잡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개성굿 보유자인 지간난 만신의 무업인생과정과 그녀가 행하는 굿을 3부작으로 연재한다.

 

지간난 무당만신의 기구한 인생...

서기2017.1.3. 공항동에 있는 ‘성원사’를 이끌고 있는 지간난 만신(72세)을 찾았다. 몇 주 전부터 취재 요청을 했으나 밀려오는 손님들이 많아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다. 계속 미루어지다가 1월 3일 시간이 났다. 성원사 신당은 일반 가정집 지하에 위치해 있는데 소박하면서도 간소했다. 이 신당은 다른 무당들의 신당과 조금 다르게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신당에 올려진 그릇들이 하얀 옥으로 만든 것들이라는 점이다. 옥은 영원함과 홍산문화지의 제사장 무덤에서도 보이듯이 공동체 우두머리의 권위도 상징한다. 신라의 금관, 백제의 금동관에 옥이 붙어 있고 일본 왕가의 신물로 옥이 나오는 것을 보면 공동체의 구성원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범을 타고 앉아 있는 흰 수염의 할아버지상이 신당 중앙에 모셔져 있다. 지간난 만신이 찾아온 손님을 위해 기도를 할 때 단군할아버지를 계속 말하는 것을 보면 이 분이 단군할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기2017.1.3. 서울시 강서구 공항동에 위치한 성원사에서 지간난 만신의 파란만장한 만신(무당)으로서의 삶을 들었다. 신당에서 지간난(72세) 만신이 기자에게 어떻게 무당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지간난 만신은 기자를 위해 복을 빌어 줄 때 지속적으로 '단군할아버지'를  불렀다.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지간난 만신이 단군을 입에 달고 있다는 것은 무당의 역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간난 만신은 해방되던 해인 서기1945년 태어났다고 한다. 2남4녀 중 셋째 딸이었다. 그런데 부친과 두 오빠가 죽임을 당했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한 승려가 지나가다가 지간난 모친께 하는 말이 있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은 것은 당신 셋째딸 때문이다. 이 딸을 버려야 나머지 딸 들을 살릴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두 딸도 죽는다는 것이다. 6.25동란이 끝난 서기1954년경에 지간난 만신의 어머니는 중이 하는 말을 듣고 지간난 만신을 버렸다. 당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여름인 것으로 기억했다. 7살 때였다. 친어머니는 지간난 만신을 기차에 태우고 어디를 잠시 갔다 온다고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버린것이다. 문산행 기차였다. 3일 동안 기차에서 잤다. 석탄가루 움직이는 증기기관차에서 2~3 일간 울면서 지냈다. 어린 지간난을 발견한 기차 기관사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들만 둘 있는 집이었는데 딸로 기르려고 데려간 것이다. 그러나 그 집 엄마가 때리고 구박하고 굶겼다. 기관사 아저씨가 밖에서 작은 마누라를 얻어 낳은 자식으로 오해를 했기 때문이다. 기관사아저씨는 출근해서 이러한 학대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1년여를 살다가 그 집을 나왔다.

 

7살에 버려진 지간난, 이유는 집안의 액을 때우려고...

다시 어느 집을 들어갔다. 식모를 둔다고 했다. 새로 들어간 집인데 부잣집이었다. 부잣집에서는 어린 지간난이 들어오면 재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걱정마라 네가 있을 곳이 있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이 할머니는 죽은 영혼이었다. 분홍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은 할머니였다. 앞에서 서 있었다. 딴 사람은 안 보인다. 지간난의 눈에만 보였다.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할머니는 ‘걱정마라 얼른 나 따라와, 왜 구박받고 있어 어서가자’고 했다. 그 할머니를 춤을 추면서 따라 갔다. 할머니는 자신을 ‘나를 엄마라 그래라 내가 신엄마’라고 했다. 그래서 “신엄마가 뭐에요?”라고 물으니, “나는 무당의 엄마야, 너도 영혼 소리할 줄 아는데 왜 그러고 있어. 병신같이, 이 미친년아.” 그러면서 내 귀둥백이를 팍 갈겼다.

그 엄마가 지간난을 어느 시골 싸리문이 있는 집에 데리고 갔다. 그 엄마 집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인데 그날이 그 엄마 제사를 지내는 날이었다. 그 엄마 집 식구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니 박순이 할머니 남편과 자식들이 있었다. 그 집까지 이끌고 온 그 엄마는 당신을 박순이라고 했다. 그 엄마가 시키는 대로 박수치며 식구들에게 ‘내가 왔다’고 했다. 어린 지간난의 입에서 “제사 지내기 전에 나 먼저 밥한 상 줘라.” 라는 말이 나왔다. 그랬더니 그 집 식구들이 생전의 박순이 할머니임을 알아차리고 지간난 만신이 하라는 대로 했다. 식구들이 ‘엄마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지간난 만신이 “내가 박순이야, 내가, 내가 오늘 첫 제사야, 너희들 지금 제사지내려고 준비하고 있지?” 라며 죽은 박순이 할머니를 말하자, 그 집 사람들이 지간난 앞에서 절을 하며 박순이 할머니가 진짜 왔다고 했다. 이 때 지간난 만신은 9살 정도의 어린애였다. 생전에 숨겨둔 박순이 엄마의 무구가 있는 곳을 가리키고 꺼내 달라고 했다. 창호지로 발라놓은 벽장 속이었다. 손으로 탁 쳐서 열어보니 방울하고 부채하고 신주단지가 나왔다. 박순이 할머니는 경기도 문산 지역에서 큰 무당이었다. 박순이 할머니는 지간난 만신에게 갈 곳이 있으니 ‘옘병’무당이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지간난 만신은 옘병무당이 누군지 몰랐다. 앞이 캄캄했다. 이때는 한 겨울이었다. 눈이 수북하게 온 날이었다. 박순이 할머니에게 옘병무당이 누구냐고 물으니 ‘나만 따라오라’고 했다. 어느 만신 집으로 안내했다.

 

죽은 무당의 신령과 대화하며 무당의 길을 가다...

거기다가 무구를 놓고 다시 박순이 신엄마가 따라오라는 곳으로 갔다. 도착한 곳은 어느 산이었다. 지금 보니 봉수산이었다. 거기에 박순이 신엄마가 생전에 굿을 할 때 쓰던 모든 무구를 묻어 놓았다. 놋쟁반, 놋불기, 촛대 등 다 묻어 놨다. 무구 중에는 칼 명도 부채 방울 등도 다 나왔다. 명두는 6개나 나왔다. 동전도 나왔다. 놋상도 큰 것 나왔다. 이런 무구들을 보면 생전에 박순이 신엄마는 크게 불리던 만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구들을 묻은 것은 신딸이 없어 물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묻힌 곳을 알게 된 것은 박순이 신엄마가 묻힌 곳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9세인 지간난 만신이 봉수산으로 무구를 캐러 가자, 박순이 신엄마 식구들이 따라왔다.

9세의 지간난 만신에게 박순이 신엄마의 신이 내린 것을 알았던 것이다. 봉수산에는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어린 손으로 파고 있으니 박순이 신엄마가 너는 어려서 안 되겠다. 박순이 신엄마가 같이 간 사람들에게 파게 해서 가지고 온 삽과 곡괭이로 파냈다. 이때 한겨울 언 땅을 어린 손으로 파다가 얼음 조각에 손 등이 할퀴었다. 그때 손등 살갗에 줄지어난 흉터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그날 이후 옘병만신이 9세의 어린 지간난에게 방을 하나 차려 주었다. 그때는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다녔다. 그때 옘병만신은 50대정도 되었는데 15살에 신이 내렸다고 했다. 이북에서 나온 개성 만신이었다. 박순이 신엄마도 개성 굿을 하는 개성만신이 이었다.

 

▲ 지간난 만신이 한겨울 얼음이 꽁꽁얼은 산속에서 무구를 캐내다가 손등이 얼음조각에 찢긴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산속에 무구를 묻어 놓은 것을 죽은 신엄마의 귀신이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무당세계의 불가사의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개성만신이 개성 굿을 이으라고 살아있는 옘병개성만신을 찾아서 지간난을 데려다 준 것이었다.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굿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남쪽으로 넘어와서 문산, 파주 지역에 정착을 한 것이다. 개성과 최대한 가까운 곳이 이 지역이었다. 지간난 만신은 옘병만신을 신어머니로 모시면서 17살까지 있었다.

 

죽은 무당을 신엄마로 두고 다시 살아있는 무당을 신엄마로 둔 지간난 만신...

그리고 그 해에 17살에 독립을 했다. 독립을 하게 된 계기는 지간난 만신의 굿을 구경하던 동네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 할머니도 만신이었다. 개성의 공득이라는 동네에서 무당을 했었다고 했다. 그 할머니가 방을 하나 얻어 주어서 독립해서 무업을 시작했다. 옘병만신에게 독립하겠다고 하니 다른 무구는 주지 않고 명두하나 개다리상 하나, 솥 하나, 숟가락 하나와 밥그릇하나를 주었다. 옘병만신은 “내가 지금까지 너를 어떻게 키워 주었는데 이렇게 나를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냐, 나한테 굿을 다 배워서 언제라도 나가서 살 수 있게 되니까 이제 나가겠다는 것이냐, 나중에 다시 나한테 들어오면 그땐 니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리겠다. 내가 너를 길러준 대가는 받지 않고 내보내 주는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렇지만 나중에 내가 너를 길러준 것을 돈으로 갚으라.”라며 자신이 공들인 것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간난 만신이 오히려 돈을 훨씬 많이 벌어 주었다고 한다.

독립해서 신당을 차리고 무업을 시작하면서 손님들이 지간난 만신의 영험함을 알고 끝없이 몰려들었다. 얼마나 손님이 많이 왔는지 3개월 만에 신도할머니가 내준 방에서 집을 사가지고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파주와 문산 지역에서 무업을 불려 생활하다가 현재의 성원사가 있는 공항동으로 오게 되었다. 이사 와서도 3개월이 안되어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정월 초하루 설날부터 15일까지 손님이 밀려든다. 지방에서 온 손님은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가 점사를 받는다(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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