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톨스토이도 아나키스트였다?

 

서기2016 한국아나키즘 학술대회 ‘국가와 아나키즘2’

폭력적 국가를 거부한 톨스토이,

갱생된 인간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국가 주장

석주 이상룡, 아나키스트가 주인 되는 신세계를 꿈꾸다...

만주의 경학사, 자유. 평등의 개인이 주체가 된 이상국가의 출발점...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동서양의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세상은 아닐까?

 

소설가로만 알려진 톨스토이에게는 흔히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세계명작전집에도 어김없이 끼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톨스토이의 진면목을 가리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구도자이면서 기성의 국가제도를 거부한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스트, 혁명가에 가깝다는 것이다. 한편 대일항쟁기 새로운 국가건설을 주창한 석주 이상룡도 혁명적인 아나키스트라는 주장도 나왔다. 군주제 국가를 거부하고 자주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신세계를 개척한 사람이 석주 이상룡이라는 것이다. 서기2016.12.3. 서울 종로 국민문화연구소에서 열린 서기2016 한국아나키즘 정기학술대회에서 이와 같은 주장이 쏟아졌다.

이날 세 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선 천정근 자유인교회 목사는 톨스토이의 인생을 조명하면서 기성 국가사회를 거부하고 갱생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국가를 희망한 톨스토이의 모습을 찾고자 했다. 천목사는 톨스토이를 아나키스트로 만든 것은 톨스토이가 일생을 두고 투쟁한 죽음과 구원의 문제라고 했다. 세습귀족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로 하여금 죽음과 구원이라는 삶의 근본문제에 천착해 한 것은 무엇일까? 톨스토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과 그가 모계로부터 유전되어 오는 결핵을 앓고 있었고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레프 톨스토이. 그는 어렸을때 부터 기록광이라 불릴 정도로 소소한 일까지 기록했다. 특히 일기를 평생썼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글쓰기가 톨스토이로 하여금 수많은 역작을 남기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사진: 러시아 위키피디아).

 

죽음에 대한 공포, 구원에서 나온 톨스토이 아나키즘...

이러한 개인적 불우함이 톨스토이를 내성적으로 만들어갔고 ‘성경’을 통해서 죽음과 구원의 문제에 치열하게 매달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그의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권력이 국민을 단두대로 처형하는 광경을 보고 크림전쟁에 참여하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와 삶에 대한 절망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이 주는 공포감에 시달리면서 도피처로 여자와 술 도박에 빠졌다고 한다. 극한의 방탕한 생활에 자신을 내던지며 정신적 공황상태로 내몰았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 영적 구원을 체험하면서 인생관이 바뀐다. 허무와 절망 속에서 삶을 낙관하고 긍정한다. 이것을 천목사는 톨스토이의 ‘갱생’이라고 부른다. 천목사는 톨스토이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나키스트로 변모해 갔다고 했다. 갱생된 톨스토이는 세습귀족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지에 학교를 짓고 빈곤층의 아이들에게 교육기회를 주었고 체벌을 일체 금지시키고 자율적인 학업을 실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적소유제도, 반인민적인 국가 재판소, 군국주의,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군비철폐와 자본주의 제도 폐기 등 기성의 제도를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 대안으로 사회주의 제도 도입 등을 주장했다. 이는 기성의 국사사회제도를 부정하고 타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적인 국가제도에 대하여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반대했다고 한다. 폭력적 악에 대하여 무저항의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인 레닌은 이러한 톨스토이를 강하게 비판한다. 톨스토이는 그의 인생자체가 개인구원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적인 국가제도문제는 개인구원에서 부수적으로 나온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결국 톨스토이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의 영적부활(갱생)의 결과라는 것이다.

자유,평등의 자율적 인간상 제시한 석주 이상룡...

한편 네 번째 주제발표에 나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석주 이상룡의 활동과 사상을 조명했다. 이를 통해서 아나키즘적 요소를 찾고자 했다. 석주 이상룡은 경북 안동의 부유한 유학자 집안의 양반계급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삶을 산 것은 왜일까? 일제에게 나라가 망한 원인을 찾다 보니 결국 유학에 가닿았다. 이성계 조선이 유학에 기초하여 중국 사대주의 소중화 정책을 추구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통해서 석주 이상룡은 의식의 대전환을 이루게 된다. 더구나 서구의 사상가, 철학가의 책을 접하면서 그의 사상적 개화는 꽃을 피운다. 베이컨, 데카르트, 칸트, 홉스, 스피노자 등의 서적을 섭렵하면서 개인이 주인 되는 민주국가를 구상하게 된다. 이것을 이덕일 소장은 민주공화제라고 했다.

▲ 민주공화제를 외친 석주 이상룡. 그는 고성이씨 가문의 후손이다. 고려말 대학자이자 역사가인 이암의 후손인 그는 우리의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륙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았다.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은 식민주의 사학자들처럼 북한일대가 아니라 대륙에 있었다고 보았다(사진: 경북일보).

서기1909년 당시 여전히 대한제국이라는 전제군주국가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지배세력은 물론 일반 절대다수 인민들도 상상하기 어려운 민주국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국가는 국민의 공적재산이고 권리는 국민의 목숨’이라는 주장에서 석주 이상룡의 사상이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석주 이상룡은 이러한 민주공화제를 구상만 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했고 실재 자신이 만주로 가서 실천으로 옮겼다. 경학사(耕學社)가 말해준다.

석주는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은 자율적이어야 하고 이러한 자율적인 인간이 중심이 된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작은 단체를 중심으로 나라가 조직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지방자체와 비슷하다. 지금처럼 국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당 주민이 스스로 그 지역사정에 맞게 자치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를 짜는데 서도 석주의 생각은 현재의 의회제도와는 달랐다. 지금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한꺼번에 국회의원을 뽑는 구조다. 그리고 이후에는 모든 정사를 국회의원에 맡기고 있다.

자율적인 개인의 집합체, 민주공화국제 주창한 석주 이상룡...

석주가 주장하는 국회는 지방 자치권과 참정권의 확장이었다. 지방자치에서 훈련을 받아 주민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들이 중앙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는 구조로 풀이된다. 지금처럼 정당이 추천하거나 정치경험이 없는 개인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방자치를 통해서 사익이 아닌 공익을 우선하는 검증된 인물로 국회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석주가 꿈꾼 주권재민의 이상적인 민주공화제 국가의 모습은 만주에서 직접 실천한 민단 자치공동체, 경학사에서 나타난다. 경학사의 ‘耕(경)’이 논밭을 간다는 뜻으로 풀이되듯이 기본적으로 노동을 중시하는 자치공동체였다. 석주 자신이 솔선수범했다. 그리고 밤에는 교육에 힘썼다. 이 자치공동체의 다른 모습이 신흥무관학교였다. 광복무장투쟁조직인 이 신흥무관학교는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한인들의 자치공동체가 역동적으로 커나가자 당시 청나라 백성들도 와서 공명정대한 다스림 안으로 들어오고자 했다고 한다. 이것을 ‘문서를 가지고 와서 호소했다’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자치공동체에서도 자치규약이 시행되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방자치 조례라고 할 수 있으나 주민 개개인의 의견이 철저히 반영된 규약이라는 점에서 지방의원들이 만드는 조례와는 성격이 다르다. 주권재민이 철저히 관철된 그야말로 살아있는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이상인 직접민주제가 가장 잘 반영된 자치공동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치조직을 기초로 해서 연합체로 나가면 이것이 곧 국가라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의 국가가 나온다. 자유와 평등이 보장받은 자율적인 개인에서 출발한 이 같은 국가는 아나키즘에서 주장하는 개인과 공동체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고 이덕일 소장은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석주 이상룡과 같은 광복세력이 해방 후 대한민국의 주도세력이 되었어야 했다고 역설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이게 나라냐!” 라는 절망적인 국가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지금은 석주 이상룡이라는 인물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광복세력이 대한민국을 세웠다면 국사교육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로 알려 졌을 것이라면서 그렇게 되지 못한 현실을 아쉬워했다.

▲ 서기2016.12.3. 서울 종로 국민문화연구소에서 열린 '국가와 아나키즘' 학술대회에서 종합토론을 맡은 전 숭실대학교 부총장, 박정신 교수는 해박한 성경 지식을 통해서 예수와 아나키즘과의 관계도 다루어 관심을 끌었다. 사진 왼쪽 부터 허성관 미사협 회장, 박정신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아나키즘은 우리 고유의 국시, 홍익인간, 이화세계...

이날 학술대회에서 주장된 아나키즘의 핵심은 전체주의적 폭력국가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에 기초한 독립된 자주적인 개인의 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자유로운 독립된 자주적인 개인은 우리의 고유 국시인 홍익인간과 닮아있다. 홍익된 인간이라고 풀이할 때 둘은 닮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익된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는 이화세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체구성원의 뜻이 철저히 관철된 섭리로 교화되는 세계를 말한다.

이날 개인주제발표가 끝나고 종합토론이 이어졌다. 박정신 전 숭실대교수가 이끌었다. 개인토론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토론 중에 예수도 아나키스트였다는 해석도 나와 흥미를 끌었다. 이종찬 우당기념사업회 회장과 허성관 미사협(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회장, 손윤 미사협 공동대표도 참석했다. 이 날 사회는 건국대학교 김명옥 교수가 맡았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광화문 촛불집회를 아나키즘의 한국적 발현으로 인식하여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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