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장성 동쪽 끝이 북한 평안도까지 왔다는 동북공정과 일제식민사관...

 

중국의 동북공정은 진장성이 북한까지 들어온 것으로 그리고 있다.

일제식민사학은 황해도까지 들어왔다고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강단주류사학은?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일곱 번째)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제2회)


4.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다.

진나라 만리장성은 BC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기존의 진장성․조장성․연장성 등을 연결보수하여 완성한 장성이다. 고조선과 진나라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경계로 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단을 통하여 고조선의 강역을 알 수 있다. 현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 위치에 대하여 대략 4가지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첫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설이다. 필자를 비롯한 심백강 등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다. 아래의 <그림 1>에서 ‘갈석산 1’이 위치한 지역이다.

둘째,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昌黎설이다. 윤내현을 비롯한 다수의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다. <그림 1>에서 ‘갈석산 2’가 위치한 지역이다.

셋째, 현 중국 요령성 요하설이다.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요령성 요하일대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으로 현 대한민국 강단사학계의 통설이다.

넷째, 한반도 평양설이다. 중국과 일본의 대다수 학자들 및 대한민국 강단사학계 일부가 주장하는 설로 <그림 1>에서 ‘갈석산 3’가 위치한 지역이다.


그런데 중국의 각종 사서에 나타난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진나라 만리장성은 <그림 1>의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이다.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자.

▲ <그림 1>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 위치

 

(1) 『회남자』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A-1

진시황이 『녹도서』를 보니 거기에 전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50만 명의 병졸을 일으켜, 몽염과 양옹자 장군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 서쪽으로는 유사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수와 만나며, 동쪽은 조선과 연결되었다.” 秦皇挾録圖, 見其傳曰, 「亡秦者胡也」. 因發卒五十萬, 使蒙公楊翁子將, 築脩城, 西屬流沙, 北擊遼水, 東結朝鮮.  『淮南子』人間訓

A-2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지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榑木의 땅에 이른다. 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淮南子』時則訓
『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으로 위만조선(BC 194 ~ BC 108)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다.『회남자』에 나오는 사료 A-1은 현재 전해지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만리장성이 ‘북쪽으로 요수와 만나고, 동쪽은 조선과 연결되었다’고 하였으며, 사료 A-2에 따르면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이 시작되었다. 사료 A-1, A-2를 종합하면 만리장성은 북쪽으로 요수와 만나고 동쪽으로 갈석산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2) 연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대의 요수는 현 중국 하북성 북경유역을 흐르는 조백하이다. 그리고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으로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요수(조백하)에서 갈석산(백석산)까지 이르는 장성은 지금도 그 유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회남자』의 기록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사기』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B-1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장군으로 하여금 3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융적을 쫓아내고 하남 땅을 거두었다.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을 따라 험한 새를 활용하고 마름질하면서,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만 여리에 이어졌다. 秦已並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収河南,築長城,因地形,用制険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史記』卷八十八, 蒙恬列傳第二十八

B-2

『사기정의』: 요동군은 요수의 동쪽에 있다.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닿고,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正義遼東郡在遼水東,始皇築長城東至遼水,西南至海(之上). 『史記』卷八十八, 蒙恬列傳第二十八


사마천은 『사기』「몽염열전」(사료 B-1)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일어나 요동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만 여리에 이어졌다.”고 하였다. 만리장성의 서단인 임조는 지금의 감숙성 정서시 민현岷縣 일대로 학계의 이견이 없다. 그런데 만리장성의 동단은 ‘요동’이라고 막연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기정의』는 사료 B-1에서 나오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요동’에 대하여 사료 B-2와 같이 주석하였다. 만리장성의 동단은 ‘동쪽으로 요수에 닿고,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진나라 만리장성이 요동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축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림 1>에서 보는바와 같이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르는 장성이 요수(현 조백하)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갈석산 1’까지 이어졌다.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석산 1’은 고대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으로 고대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여러 사서에서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요동’, ‘갈석산’, ‘수성현’, ‘바다’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요동에 갈석산이 있고, 갈석산이 수성현에 있으며, 고대에는 수성현이 바다와 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곳이다. 『사기정의』(사료 B-2)에서 ‘진시황이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이 <그림 1>에서 보듯이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어진 장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설에서 주장하는 만리장성의 동단들은 모두 ‘요수에서 서남쪽으로 바다까지 이어지는 장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3) 『후한서』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C-1

3년 봄 2월 무진일에 중산으로 행차했다. 사자를 보내어 북악에 제사를 지내고, 장성(『사기』에 ‘몽염장군이 진나라 장성을 쌓았는데, 서쪽의 임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을 나갔다가 계유일에 돌아왔다. 三年春二月戊辰進幸中山遣使者祠北嶽出長城(史記蒙恬為秦築長城西自臨洮東至海)癸酉還  『後漢書』卷三, 章帝紀第三

사료 C-1은 후한의 효장제 원화(元和, AD 84~87) 3년에 천자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북쪽을 순행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2월 무진일에 중산으로 행차하여 장성을 나갔다가 계유일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장성에 대하여 당나라의 장회태자 이현은 주석하기를 “『사기』에 몽염장군이 진나라 장성을 쌓았는데, 서쪽의 임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무진일에서 계유일까지는 5일간으로 하루에 평균 50여리를 간다고 하더라도 중산으로부터 왕복 250여리 이내에 진나라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산은 <그림 1>에서 ‘갈석산 1’의 남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중산에서 5일 이내에 나갔다가 올 수 있는 장성은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어진 장성뿐이다. 다른 장성들은 모두 중산으로부터 왕복 1,000리가 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후한서』(사료 C-1)의 기록을 충족할 수 없다.

 

(4) 『태강지리지』‧『수경주』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D-1

『사기색은』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索隱太康地理志云「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史記』卷二, 夏本紀第二

 

D-2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다. 임조에서 일어나 갈석까지 이르렀다.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 至于碣石.  『水經注』卷三, 河水


『태강지리지』(사료 D-1)와 『수경주』(사료 D-2) 등에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갈석산으로 기록하였다.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태강지리지』(사료 D-1)의 갈석산은 고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한 ‘우공갈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으로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수경주』에서는 갈석산을 2개로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상서우공』에 말하기를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산해경』은 말하기를 ‘갈석산은 승수가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尚書禹貢』曰:夾右碣石入于河. 『山海經』曰:碣石之山, 繩水出焉. 東流注于河.).”라고 하는 구절에 나오는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우공갈석’으로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다른 하나는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라고 하는 구절에 나오는 갈석산이다. 이 갈석산은 발해의 바다속에 빠져서 사라져 버렸다는 갈석산이다. 『수경주』에서 만리장성의 동단을 갈석산이라고 하였는데, 요서 임유현의 갈석산은 바다속에 있으므로 만리장성의 동단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수경주』(사료 D-2)에 기록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도 <그림 1>의 ‘갈석산 1’이다.

 

(5) 『진서』‧『통전』‧『무경총요』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E-1

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며, 3,700호이다. 조선현: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 樂浪郡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晉書』卷十四, 志第四, 地理上, 平州, 樂浪郡

 

E-2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武遂현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遂城古武遂也. 秦築長城之所起. 『通典』 卷一百七十八, 州郡八, 古冀州

E-3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으로 전국시기 무수현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으로 20리에 안숙군이 있고, 서쪽으로 10리에 장성이 있다. 남쪽으로 15리에 안숙군이 있고, 서남쪽으로 약 90리에 북평군이 있으며, 서쪽으로 70리에 북역주가 있다. 廣信軍, 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 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二十里, 西至長城一十里, 南至安肅軍一十五里, 西南至北平軍約九十里, 西至北易州七十里. 『武經總要』卷十六 上, 邊防, 定州路


『진서』‧『통전』‧『무경총요』등에서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수성현遂城縣으로 기록하였다. 『통전』(사료 E-2)과 『무경총요』(사료 E-3)에서 만리장성의 동단인 수성현을 전국시기 무수현武遂縣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은 학계의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진나라 만리장성은 <그림 1>의 ‘임조’에서 ‘갈석산 1’까지 이어진 장성이다.

 

(6) 『통전』에 기록된 만리장성의 동단

F-1

노룡은 한나라 비여현으로 갈석산이 있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어 그 이름을 얻었다. 진晉 『태강지지』에 말하기를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갈석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지금 고구려의 옛 지경에 있으며 이 (노룡현의) 갈석이 아니다.盧龍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故名之. 晉太康地志云 :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通典』卷一百七十八, 州郡八, 古冀州 上

 

F-2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으로 지금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通典』卷一百八十六, 邊防二, 東夷下, 高句麗


지금까지 여러 사서들을 통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AD 801년 편찬된 『통전』으로부터 만리장성의 동단에 대하여 혼란이 발생하였다. 사료 F-1의 당나라 북평군(또는 평주) 노룡현에 위치한 갈석산이나, 사료 F-2의 북평군 남쪽 20여리에 있다는 갈석산은 모두 ‘우공갈석’으로 <그림 1>에서 표시한 ‘갈석산 1’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사서들은 이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통전』의 사료 F-1과 사료 F-2는 만리장성의 동단을 이곳이 아니라 고구려의 옛 강역에 위치한 좌갈석까지라고 하였다.

『통전』이 말하는 좌갈석은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그림 1>의 ‘갈석산 2’를 가리킨다. 하지만 창려현의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 시기의 대대적인 지명 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九河淪海說’ 등 3단계의 왜곡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갈석산 1)이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며 이곳을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본 것은 『통전』의 착오이다.(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 참조)

『통전』은 앞에서 사료 E-2에서 보았듯이 “수성현은 옛날의 무수武遂현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여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료 F-1, F-2에서는 진황도시 창려현 일대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통전』의 사료 E-2와 사료 F-1, F-2는 서로 모순되는 기록이며,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의 갈석산으로 본 사료 F-1, F-2는 잘못된 기록이다. 창려현의 갈석산에는 장성의 유적도 없으며, 단지 갈석산의 100여리 북쪽으로 지나가는 장성이 있으나 그 장성은 진나라 만리장성과는 무관한 명장성이다.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다.

지금까지『회남자』‧『사기』‧『후한서』‧『태강지리지』『수경주』‧『진서』‧『통전』‧『무경총요』등의 만리장성 관련 기록들을 검토한 결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AD 801년 편찬된 『통전』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의 ‘우갈석’과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昌黎의 ‘좌갈석’ 등 2곳으로 기록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후 『통전』의 잘못된 기록을 인용하는 사서들이 생겨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통전』의 잘못된 기록을 또 다시 왜곡하여 ‘우갈석’을 진황도시 창려현의 갈석산으로, ‘좌갈석’을 한반도 평양의 갈석산으로 주장하면서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까지 끌고 왔다. 현재 중국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적극 활용하여 『중국역사지도집』에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 평양일대까지 그리면서 동북공정의 핵심근거로 삼고 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에 위치하였던 본래의 진나라 만리장성 동단을 무려 3,000여리나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평양일대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글쓴이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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