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없는 역사를 만들어 일본인의 자존심과 구심점을 고취시켜 국가발전이룩...

 

일본의 만들어진 역사, 황국사관...

지금도 일본인의 가슴속에는 일왕은 살아있는 신이다...

한국고대사학회, 결과적으로 이 황국사관에 동조하고 있어...

 

일본의 皇國사관이라는 것이 있다.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이 일본의 ‘천황’이라는 세계관이다. 일왕(천황)은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후손으로 신의 자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일본서기>다. 신공황후라는 여왕이 고대에 백제, 신라, 가야를 정벌(삼한정벌)하고 가야에 일본부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나라와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여 천황중심의 세상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일반상식으로 볼 때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 불과 70여 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것이 철저하게 먹혔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인들의 마음속에는 일왕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일본의 구심점이 되어 있다. 더구나 현재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이 사실로 교육되고 있다. 고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일본이 식민 지배했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일본은 한국침략을 하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의 한국사(조선사)를 만들어 낸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나서 이 식민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만들어 주입시켰다.

그리고 지금 한성 백제 박물관에서는 이 일본인이 만들어 준 역사를 가지고 한국고대사시민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3월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고대사시민강좌를 보면 한결같이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이 흐르고 있다. 식민사관의 핵심은 우리 스스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 밖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 스스로 창조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우리나라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 골자다. 따라서 국가성립도 빨라서는 안 된다. 중국보다 늦어야 하고 일본보다 미약해야 한다.

하반기 고대사시민강좌10강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어김없이 저변에 흐르고 있었다. ‘돌무지덧널무덤에 나타난 정치와 문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대전대학교 교수 이한상씨가 맡았다. 이 씨는 이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이 모두 밖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 것은 하나도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원조는 외국이다.

 

일관되게 반복하는 한국고대사학회의 일제식민사관, 타율성론...

무덤에서 나온 장식무기와 마구문화는 중국의 전연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했다. 황남대총에서 나온 동경과 울두 그리고 흑유반구소호는 중국의 동진시대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호우총의 청동합, 서봉총의 은합, 금관총의 동제사이호는 고구려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계림로14호분에서 발견된 이른바 ‘황금보검’은 중앙아시아산으로 보았다. 또한 이른바 ‘로만글라스’로 알려진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리잔 등 유리제품은 시리아-팔레스티니안의 중동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씨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기원이 어디인지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 무덤 양식에 대한 여러 학설을 소개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씨가 소개한 학설 중에서 신라기원설이 가장 객관적이고 증거도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억지수준으로 부정하고 있다. 울산에 있는 중산리 고분군이 신라기원설의 결정적인 증거다. 그런데 이 씨는 이 무덤이 신라의 중심인 경주에 없다는 점과 크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결국 재래식의 덧널무덤에 고구려의 적석식 무덤양식이 결합되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한다. 신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신라 스스로 완성을 못하고 고구려라는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아서 완성했다는 식이다. 완벽한 신라기원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데도 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인 타율성론, 정체성론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 신라의 금귀걸리. 세계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금귀걸이다. 이른바 누금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초정밀 가공기술을 요구한다. 이 같은 귀걸이는 제주도 고산리에서 발굴 옥귀걸이나 강원도 문암리에서 출토된 옥귀걸이 문화를 이어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 씨는 노골적으로 식민사관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문가가 아니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기회주의 적이고 애매모호하게 식민사관을 집어넣고 있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의 규모와 그 속에서 나온 부장품 그리고 무덤을 축조하는데 동원된 인력과 기간 등을 계산해 보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씨는 이것을 각종 이유를 들어 해체하고 별 볼일 없는 국가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식민사관의 전형인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불신론에 따라 이른바 ‘분해론’ 이니 ‘단계론’이 하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삼국은 개국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라는 것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가짜로 몰기위해서 중국의 <삼국지>를 끌어다가 ‘분해론’, ‘단계론’을 만들어 신라가 5세기가 넘어서야 사실상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조선총독부소속의 쓰다소키치가 발명한 식민사관이다. 이것을 지금 이 씨가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쓰다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학회...

이 씨는 돌무지덧널무덤의 웅장함과 크기를 인정하면서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깎아 내리고 있다. ‘무덤의 크기가 크다고, 또 무덤 속에서 금관을 비롯한 각종 보화가 쏟아져 나온다고 이 시대가 왕권이 가장 강했던 것이 아니라, 신라왕족의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기념물’ 이라는 것이다. 이 씨는 이러한 것은 율령이나 유교적 이념이 들어오기 이전의 단계라고 했다. 율령은 법흥왕 때 반포되었다고 한다. 식민사학계는 율령의 반포를 사실상 국가성립으로 본다. 그 이전에는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씨는 고고학을 전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씨는 중국<삼국지>에 나오는 ‘사로국’을 언급하면서 이는 신라가 아니라고 한다. 고고학계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식민사학계가 <삼국지>에 나오는 ‘사로국’에서 신라가 나왔다고 하며 3세기까지 신라는 건국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고고학이 식민사학계에 종속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고고유물은 말이 없다.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식민사관에 맞춰 고고유물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분명히 서기전 57년에 개국하였다. 다만 국호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삼국사기>신라본기/지증마립간 4년 서기503년).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시조가 창업한 이래 국가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 ‘사로’, ‘신라’로 불렀다. 결국 신라라는 말이 알맞아 신라로 부르자고 한다. 또한 예부터 국가에는 제와 왕의 칭호가 있는 법인데 우리는 개국이후 임금의 이름을 방언으로 써 왔다고 하며 이제부터 존호로 ‘신라국왕’이라고 상주하니 왕이 따랐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고유의 임금 칭호인 마립간을 버리고 중국식의 왕으로 임금 이름을 바꾼 것을 뜻한다. 따라서 중앙집권적 국가였는데 임금의 이름만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이름도 마찬가지다. 개국하면서 사라, 사로, 신라 등 여러 가지로 불렀던 것이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는 개국 초기부터 천문관을 두었고 주,군,현이 존재했고 백제와의 전투에서는 기마병만 8천이 동원되는 강력한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고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 씨는 식민사관에 따라 고고유물을 해석하여 신라를 정체불명의 나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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