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이 제시한 틀에서 고고유물을 해석하는 한국고고학...

 

신라금관, 세계최고의 초정밀 금가공기술을

‘타율성론’에 따라 모두 외부에서 찾는 이한상 교수...

이한상 교수, “서기전에 신라가 개국했다는 <삼국사기>기록 믿지 않는다.”

이는 조선총독부, 쓰다소키치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으로 보여...

 

한국고대사학회가 주관하는 고대사 시민강좌가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런데 이 학회가 동북아역사지도집 제작을 하면서 경기도 까지 중국의 <삼국지> 조조의 위나라가 차지한 것으로 그리고, 독도를 제거해 버렸다. 이에 국회청문회까지 열려 큰 문제가 된 바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서기2016.11.16.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가 하반기 고대사시민강좌 제10강을 맡았다. ‘돌무지덧널무덤에 나타난 정치와 문화’를 주제로 강의에 나선 이 교수는 무덤과 그 무덤들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서 신라의 개국시기와 변화를 파악하고자 했다. 먼저 이교수는 <삼국사기>에 신라가 서기전 57년 개국한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이 때 나라를 세웠다면 지금 경주 지방에 왕궁 터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식민사학이라고 비판을 받는 강단주류사학계의 견해에 따라, 신라개국을 4세기 이후로 보았다. 이는 중국 <삼국지>에 따른 것이다.

▲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는 경주지역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신라 금관의 무게를 달아봤다고 했다. 또한 금관이 너무나 얇아 평상시 왕들이 관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했다. 발굴당시 왕관의 위치 등을 고려해 볼 때 금관은 죽은자의 무덤에 부장하는 물건으로 보았다.

더구나 이교수는 <삼국지>에 나오는 3세기경의 사로국도 신라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고고학계의 견해를 소개하여 자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와 같이 보는 근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분)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연대는 5세기 중반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무덤양식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의 쿠르간이 있다. 그런데 이 쿠르간은 서기전 8~4세기 것이라고 한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심하다.

이교수는 무덤양식과 출토유물이 신라와 거의 같음에도 불구하고 관련성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만약에 북방 기만민족인 스키타이의 무덤과 연결시키면 신라의 개국시점도 서기전을 올라 갈 수밖에 없다. 이는 이교수가 신라의 개국시기를 서기전으로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믿지 않는 것과 모순된다. 이러한 이유로 이교수가 스키타이의 쿠르간과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과의 연관성을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는 신라의 무덤 발전단계를 널무덤-> 덧널무덤->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았다. 그러나 널무덤과 덧널무덤 단계는 신라의 역사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마립간시대의 유물로 보았다. 돌무지덧널무덤인 황남대총과 천마총의 축조 년대가 각각 5세기, 6세기경인데 내물마립간과 눌지마립간사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교수에 의하면 신라는 내물왕 때 나라를 세운 것이 된다. 이 시기에 신라의 무덤은 가장 크게 나타난다. 부장품도 황금 관을 비롯하여 다양하게 출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무덤이 가장 크다고 해서 이 시대에 왕권이 가장 강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시대 신라왕의 이름은 마립간이었는데 마립간은 ‘간’ 중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립간은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라 왕족 가운데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던 존재라고 했다. 수백 명의 인력을 동원해서 최소한 6개월이상 걸려서 축조한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강조하는 단계에 머무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경주시내에 다량으로 포진하고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은 율령이나 유교적 제도가 들어오기 전의 것이라고 했다. 단지 신라왕족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만든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이교수가 율령과 유교적 제도를 언급한 것은 그 이전의 돌무지덧널무덤시대의 신라는 아직도 국가다운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편 이 교수는 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유물과 기타 다양한 물건들이 모두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황남대총이나 천마총에서 나온 금관과 모관을 통해 신라가 황금의 나라라고 하면서도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를 ‘신라에 황금문화가 도입된 지’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부장품들을 각각 소개하면서 모두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이교수의 관점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일본,중국, 중동에서 들어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신라의 변화는 내부적인 원인이 주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를 이 교수는 ‘6세기 무렵 신라사회는 불교공인 등 마치 큰 소용돌이와도 같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며’로 표현했다.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으로 이제 까지의 큰 무덤과 황금유물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한상 교수는 이 날 강의에서 신라가 서기전에 개국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을 안 믿는다고 했다. 경주지역에서 궁궐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자 견해를 바꾸는 듯한 태도를 보여,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교수는 무덤에서 출토되는 장식무기와 마구문화는 중국의 전연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했다. 황남대총에서 나온 동경과 울두 그리고 흑유반구소호는 중국의 동진시대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호우총의 청동합, 서봉총의 은합, 금관총의 동제사이호는 고구려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계림로14호분에서 발견된 이른바 ‘황금보검’은 중앙아시아산으로 보았다. 또한 이른바 ‘로만글라스’로 알려진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리잔 등 유리제품은 시리아-팔레스티니안의 중동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이와 같은 이교수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무덤도 신라 것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으며 무덤에서 나온 물건들은 신라 것이 하나도 없다. 신라 것으로 보이는 금관도 외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다만 신라가 독특하게 신라만의 모양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의 왕궁 터가 없다는 이유로 신라가 서기전에 개국했다는 <삼국사기>기록을 안 믿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질문시간에 ‘그렇다면 중국의 진시황의 궁궐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진나라 역사를 믿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이 교수는 ‘경주지역에 서기2-3세기로 추정되는 제철단지가 나타나는데, 이는 강력한 세력의 존재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왕릉에 준하는 어떤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또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 많다며 왕궁발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서기전에 개국한 신라를 인정할 수 도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날도 비평문을 방청객에게 배포했다. 한 방청객은 마지막 날의 강좌 비평문은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비평문은 앞주의 강의 내용을 비평하여 그 다음 주에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최측에서 이미 강좌 전 내용을 책자로 미리 공개해 주었기 때문에 마지막 강의에 대하여 미리 비평문을 써서 마지막 강의 날에 배포하겠다고 했다. 강좌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어서 그런지 이날도 방청객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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