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유학을 갔다오면 어째서 식민사학자가 되어 돌아오는가...

김명옥 전문기자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 8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황순종 한국고대사 연구가

 

국내 식민사학자들, 앞에서는 식민주의사학 청산했다고 하나,

본론에 들어가서는 그대로 식민사관주장...

역사조차도 일본 것 베껴오는 한국의 참담한 국사학계...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학자들은 ‘임나=가야설’을 주장하면서 임나의 위치를 한반도 남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모두 임나의 위치를 일본 열도로 보고 있다.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북한 학계는 오카야마 현 키비라고 보고 있지만 남한 학계의 최재석, 이병선, 문정창 등은 대마도라고 보고 있는데 황순종 선생도 이에 동조한다. 김문배 등은 큐슈라고 보고 있는데, 그 정확한 위치 비정은 다르지만 모두 일본 열도 내로 본다는 점에서는 같다.

임나와 가야가 다른 것은 소속국의 이름과 숫자로도 알 수 있다고 황순종 선생은 설명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임나는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인데 반해 『삼국유사』의 가야는 금관, 대가야, 아라, 성산, 고령, 소가야 등 6국으로 숫자도 이름도 모두 다르다. 즉 가야는 임나가 아니며 따라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의 신라와 임나의 상황은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 아니라는 게 황순종 선생의 설명이다.

▲ 하야시다이스케(林泰輔)는 조선사를 처음 쓴 인물이다. 일제는 벌써 19세기에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 국사학과를 설치하고 식민주의 사관(황국사관)을 완성해나갔다. 이 책에서 다이스케는 '임나일본부설'를 최초로 체계화하였다. 전 고려대 교수, 김현구씨가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의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상 주장하였지만, 야사카즈가 주장하기 전에 이미 19세기에 임나일본부설이 등장한 것이다.

황순종 선생은 임나와 3국간의 거리만 봐도 임나가 가야일 수 없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와 신라·고구려·백제 3국은 개와 닭의 소리로 주인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고 하였는데, “개와 닭의 소리로 그 주인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삼국사기』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일 수는 없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 자체가 연대부터 맞지 않는 역사서인데 『일본서기』만을 근거로 임나일본부를 사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라는 말 그 자체도 허구라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369년에 임나를 정벌했다고 나오는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거의 백년 후인 464년에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도 “고구려가 신라를 치니, 신라왕이 임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일본부 행군원수에게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일본서기』 웅략 8년)”라는 것이다. 369년에 임나를 세웠는데, 백여 년 후에나 ‘일본부’란느 용어가 나오는 것도 문제이고, 일본이란 국명은 7세기 후반부터 사용했는데 5세기 후반에 ‘일본’이라는 용어가 이미 나오는 것도 조작의 증거라는 것이다.

임나 7국의 지명을 한반도 내로 비정하는 것도 글자의 유사성만 가지고 마구잡이로 비정했다고 비판한다.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탁순에 대해 스에마쓰는 대구라고 주장했고, 김현구도 이를 추종했으면 현재 한국의 여러 고대사학자들이 대부분 추종하고 있다. 그 근거에 대해 스에마쓰는 “일본군의 집결지가 되고 백제 사절의 도래지이므로 달구화(대구)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달구화의 ‘달’이 ‘탁’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탁국에 대해서 달구화의 남쪽 3리 압독(경산)이라고 주장했다. 경산을 탁국이라고 보는 증거는 경산의 옛 이름이 압독인데, ‘압은 앞’과 유사하기 때문에 대구의 앞에 있는 경산이 『일본서기』의 탁국이라는 것이다. 김현구는 스에마쓰의 이런 코미디 대본 같은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서 ‘지명비정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스에마쓰설을 따랐다’고 자신의 저서에 썼다는 것이다.

국내 일부 고대사학자들은 탁순을 창원으로도 보고 있는데, 황순종 선생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지명을 일본 열도에서 찾아야지 왜 한반도에서 찾느냐고 비판했다.

임나의 지배주체는 핵심쟁점이 된다. 『일본서기』 신공왕후 섭정 49년 (369)에 “아라타와케와 가가와케를 장군으로 삼고…목라근자와 사사노궤(두 사람은 성씨를 알 수 없다. 목라근자는 백제 장수다)에게 정병을 주어…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치고… 7국을 평정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근거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나 김현구 씨나 모두 ‘임나=가야설’을 주장하고 있다. 김현구 씨는 위 기사의 목라근자 이외에는 모두 가공인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제의 장수라는 목라근자가 가야를 정벌했다면서 백제의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대목이 김현구 씨가 독자들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황순종 선생은 비판했다.

『일본서기』는 목라근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체는 모두 일왕으로 되어 있다. 일왕이 명령을 내렸는데 어떻게 백제의 작전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사료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현구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목협만치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목만치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는데 『삼국사기』에 문주태자의 호위대장으로 목협만치가 등장하는 개로왕 21년(475)이 『일본서기』의 목만치와 같은 인물이라면 이때 나이 106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둘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현구 씨는 목만치가 왜인으로 귀화했다면서 왜인으로 귀화한 목만치 일가가 임나를 지배했다고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 주장했다. 왜인이 임나를 지배했다는 식민사학을 그대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구 씨의 말대로 임나가 가야이고 이것이 200년 동안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지배했다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가야에 관한 기사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기사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황순종 선생은 “임나가 경상도와 전라도까지 지배했다면 삼국의 역사인데 어떻게 이러한 기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반문하면서 “그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김현구 씨는 『고대 한일교섭사의 제 문제』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직지왕이 누이 신제도원을 파견한 이래 461년에 곤지를 파견할 때까지는 백제의 왕녀들을 파견하는 관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제도원·적계여랑·지진원 등이 그 왕녀에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김현구는 “백제의 왕녀들이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 야마토왜에 파견되는 관행이 있었다.”고도 주장했다. 황순종 선생은 김현구가 왜에 파견되었다고 주장하는 세 왕녀 중에서 신제도원은 전지대왕의 누이지만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업무를 위해 파견되었고 적계여랑과 지진원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적계여랑=지진원’은 『일본서기』에 왕녀가 아니라 채녀(궁녀)라고 나오는데 김현구가 사료조작을 했다는 게 황순종 선생의 설명이다. 백제는 왕녀를 왜에 보내서 천황을 섬기게 하는 관행이 있는 속국, 식민지로 그려야 하는데 『일본서기』에 따라도 왕녀는 신제도원 한 명밖에 나오지 않자 한 사람인 ‘적계여랑=지진원’을 두 명으로 나누고 채녀를 왕녀로 조작해서 결론에 꿰어 맞췄다는 것이다.

김현구 씨는 백제 왕녀 지진원이 음란하자 일왕이 불태워죽였는데, 백제는 이에 항의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는커녕 왕자들을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고 썼다면서 이 또한 모두 『일본서기』마저 조작하고 왜곡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왕녀를 화형에 처해도 백제는 항의하기는커녕 도리어 격을 높여 왕자를 보내 사죄해야 하는 속국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황순종 선생은 김현구 씨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도 차마 하지 못했던 주장들까지 서슴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강의를 마치고 황순종 역사연구가가 이동진 대한광복회 서울지회장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국 고대사학자들이 임나일본부까지 재연하고 있다는 설명에 충격을 받은 청중들이 많았다. 설마 했는데 한사군 한반도설에 이어 임나일본부까지 끌어들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 국민적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다시 망할 수도 있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청중은 “『일본서기』를 보면 신공황후가 신라를 칠 때 고구려와 백제왕이 한 식경에 달려왔다는 말이 있다. 고구려왕과 백제왕이 어떻게 한 식경에 달려올 수 있겠느냐”면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설명을 할 때 이러한 상황인식과 같이 설명한다면 그들의 논리가 깨지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11월 23일(수)은 서양사를 전공한 임종권 박사가 한국 강단사학계에서 주창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라는 것이 서양사의 실증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비실증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강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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