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돈 교수, “우리역사, 단군기원으로 보는 것 옳지 않아...”

 

주보돈 교수, “중국 사마천의 <사기>는 불후의 명작,

우리나라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사기>를 흉내 낸 것...“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버린 찌꺼기 주워 모아 놓은 것...”

 

서기2016년 들어 민족사학계와 강단주류사학계 사이에 역사전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 고려대학교 교수, 김현구씨가 자신을 식민사학자로 비판한 민족사학자를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하면서 역사전쟁은 더욱 격렬해 지고 있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족사학계는 강단주류사학계 특히, 고대사분야의 강단주류사학계를 식민사학, 심지어 매국사학이라고 까지 비판하고 있다.

이에 뒤질 세라 강단주류사학계는 민족사학을 사이비역사학, 유사역사 주창단체라고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양 진영은 각종 역사 강연회와 학술대회개최를 통하여 세력을 키우고 자신들의 역사가 바른 역사라고 일반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강단주류사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고대사학회가 개최하는 고대사시민강좌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지난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 강좌를 이어 가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강사진들을 보면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주한 동북아역사지도집 제작과 고대사책 발간사업에 참여한 학자들로 드러나고 있다.

동북아역사지도집은 지난 국회에서 청문회를 개최하여 동북공정지도를 그대로 베꼈다는 지적을 받고 지금은 제작 중단상태다. 더구나 고의로 독도를 지도에서 제거된 사실이 드러나자 동북아역사재단은 매국집단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측에서는 이러한 비난을 극복하고자 지도집을 제작한 단체에 수정을 해서 제출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그대로 독도를 제거한 것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 역사지도집 제작을 주도한 단체가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고대사시민강좌를 개최하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로 알려져 있다. 상반기 첫 강좌를 맡은 전 서울대 노태돈 교수도 동북역사지도집제작의 고대사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반기 첫 강좌를 맡은 성균관대 김영하 교수도 노태돈 전교수와 같이 고대사분야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서기2016.11.9. 하반기 9강을 맡은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주보돈 교수 고대사전문위원으로 참여했다.

▲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는 서기2016.11.9. 고대사시민강좌9회 강의를 맡았다. 주 교수는 역사를 볼 때, 어느 한 관점에 치우쳐서 보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우리역사를 단군을 기준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또한 우리가 단일민족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가운데 서기2016.11.9. 하반기 고대사 시민강좌9강에서는 ‘인물로 보는 신라의 성장과정’이라는 제목으로 주보돈 교수가 강의를 했다. 주교수는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오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 당시의 신라사를 조명하고자 했다. 주교수는 본격적으로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삼국사기>라는 사료의 성격을 파악했다. <삼국사기>를 중국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와 비교했다. <사기>는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전기형태로 쓴 기전체의 효시라고 하며 사마천의 역사서술 기법을 높게 평가했다. ‘위대한’ 역사가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주 교수는 사마천이 <사기>를 쓸 당시 궁형을 당한 상태로써 남자의 구실을 못하는 치욕적인 상태였다고 했다. 나이도 40대였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사마천이 역사기록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했다. 이러한 결과 위대한 <사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주교수는 <사기>가 총 13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 사람을 열거해 놓은 ‘열전’이 70권이라고 하면서 사마천은 지배층의 역사보다는 피지배층의 역사에 더 집중했다고 했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지배층이 아니라 피지배층임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삼국사기>는 <사기>를 흉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고려의 사마천이 되고자 해서 <삼국사기>를 썼다는 것이다. 기전체를 수용했고, 이름도 사마천의 <사기>를 따서 삼국<사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한서>체제를 모방했다고 했다고 했다. <사기>에는 ‘세가’가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세가’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삼국사기>에 본기만 있고 세가가 없는 것은 삼국시대에는 제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식으로 말하면 제후국을 거느린 황제체제의 삼국이 아니라는 것으로 풀이된다.

주교수가 <삼국사기>가 사마천의 <사기>를 모방했다고 본 것은 <삼국사기>에도 <사기>에 나오는 ‘열전’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열전에는 <사기> ‘열전’과는 달리 지배층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반면에 <사기> ‘열전’은 피지배층 중심의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고 했다. 특히 ‘자객열전’을 높이 샀다. 이렇게 볼 때 <삼국사기>는 지배세력을 위한 사료라는 것이다. 또한 김부식이 유학자여서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다.

주교수는 <삼국사기>와 대조를 이룬다고 하면서 <삼국유사>도 언급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버린 것을 실은 것으로 평가했다. 내용이 현재로써는 이해불가의 것들이 많은데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도 이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일연은 그러한 신이한 사건들을 자신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사료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주교수는 역사를 볼 때 어느 한쪽사관에 치우쳐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왕조사관과 민중사관을 언급하며 역사는 왕조라는 지배층이나 민중이라는 피지배층, 어느 한쪽만으로 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단일민족’으로 역사를 보거나 우리역사가 단군으로부터 왔다고 여기는 역사관이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고 했다.

▲ 주보돈 교수는 신라 진흥왕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연호를 開國이라고 했다는 점을 주목하여 사실상 이 때 신라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니냐는 논리를 전개했다.

한편 주교수는 신라의 역사가 가치가 있다면, 진흥왕 때문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진흥왕이 ‘개국’이라는 연호를 써서 사실상 신라를 개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거칠부와 사다함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화랑도 창설했는데 여기에 거칠부의 기여가 컸다고 하며 불교의 개입을 강조했다. 세속오계 같은 것도 불교의 가르침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진흥왕이 고구려 광개토대왕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이날 주교수의 강의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우리의 역사를 단군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는데, 단군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냐는 항의다. 이에 대하여 주 교수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알아듣기 힘든 답변으로 대신했다. 또한 동북아역사지도집제작에 참여하여, 독도를 고의로 뺀 지도를 제작한 경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침묵했다. ‘왕조사관도 아니고 민중사관 아닌 모든 사관을 균형 있게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럼 주보돈 교수는 어째서 ‘한사군(낙랑군) 재평양설’을 요지부동의 정설로 수십 년 동안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도 회피했다. 또한 앞선 강사들과 마찬가지로 삼국의 실질적 개국시점을 4세기 이후로 전제하고 강의를 진행했다. 특히 사로국이 발전하여 신라가 되었다고 하여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날 강좌에도 비평문을 배포했다. 여전히 반응이 좋았다. 비평문을 줄을 쳐 가면서 보는 방청객도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방청객도 지난번 보다 더 줄어있었다. 가져간 수십 장의 비평문을 도로 가져왔다. 이 날 강의에는 지난번에 이어 한성백제박물관 김기섭 기획전시과장도 방청했다. 김 과장은 고대사시민강좌 제4강을 맡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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