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초원4년목간은 위조된 것이다...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 7

‘사료로 보는 강단의 고대사 왜곡 실태’ 문성재 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식민사관, 하나도 청산되지 않은채,

국사교과서를 통해서 전 국민에게 주입되고 있다...

 

오늘 11월 9일(수) 바른역사아카데미 시민강좌 제2주제인 ‘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의 두 번째 강좌가 열렸다. 이번 강좌는 각론에서 식민사관이 어떻게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는지에 대해 강연했다. 강연자 문성재 박사(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는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최근에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를 펴냈다.

문성재 박사는 ‘사료로 보는 강단의 고대사 왜곡 실태’라는 주제로 식민사학자들이 고고학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실태를 낱낱이 밝혔다. 이른바 점제현 신사비의 경우 세키노 타다시 등 조선총독부는 돌이 최초 발견된 지점을 점제현 관할지로 선포하면서 “평양은 낙랑군으로 대동강은 열수로 확정 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 선생은 “통상적인 비석보다 낮고 작고 얇은 점, 테두리 바깥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는 점, 비석 뒷면이 울퉁불퉁하여 암벽에서 떼어 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 모서리 글자들이 비스듬하게 떨어져 나갔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점제현 신사비가 날조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북한 학계에서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점제현 신사비 기초에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이 있고, 돌의 성분이 인근지역의 화강석과 큰 차이가 나며, 그것은 요하지방의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방사성 동의원소 측정 결과 인근 지역과는 2~3천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을 들어 일제가 발굴했다고 주장한 점제현 신사비는 조작 또는 위조해서 용강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문성재 박사는 일제가 “평안도 용강을 점제현으로 단정한 근거는 위·진대의 투박한 서체로 새겨진 돌 하나뿐”이며 “문제의 돌과 낙랑군의 문헌적, 고고학적,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상관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 바른시만강좌에 수많은 시민들이 줄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강좌에 앞서 참여한 시민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1993년 정백동 고분에서 출토된 ‘낙랑군 호구부’는 평양이 낙랑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의 유력한 증거물이다. 그런데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복잡하다고 문성재 박사는 말한다. 출토된 유물을 보면 ‘낙랑군 호구부’ 뿐 아니라 필기구로 추정되는 환두 도자와 관복에 사용될 띠걸이 그리고 무기류와 수레에 설치된 부속물, 여성용 장신구와 도끼, 낫, 굴착도구 등의 농기구 등이다. 고분에서 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위세품과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동시에 출토될 수 없다는 게 문성재 박사의 설명이다. 지배층이었다면 농기구를, 농군이라면 지배층인 관리가 사용하는 필기구나 관복에 사용하는 띠걸이를 같이 넣어 묻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또 ‘호구부’는 “보안 문서이기 때문에 개인의 무덤에 부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문성재 박사는 호구부의 조작의 근거로 몇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한나라의 목각에 써 놓은 문서 규격들과 비교할 때, 목각 규격의 크기가 일정하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서체가 한나라 때 유행했던 예서체와는 상당히 다름 점도 위조의 가능성으로 제시했다.

호구부가 날조된 것이라고 보는 결정적인 근거는 ‘별’이라는 접두사 사용이라고 한다. 호구부의 첫 줄에 “낙랑군|초원사년|현별호구|다소□□(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多少□□)”이라고 하였는데 ‘-별’은 ‘-군(君)’처럼, 19-20세기에 일본에서만 쓰던 ‘일본식’ 한자어라는 것이다. 문성재 박사는 묵독 “별 존재 자체가 유물이 위조품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라고 말한다.

국내 역사학계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 고분의 수가 1990년대 중반까지 무려 2,600여 기(<젊은 역사학자가 본 오늘의 한국고대사>, 경희대 한국고대사 – 고고학 연구소 홈페이지)”에 달함으로 평양이 낙랑이라는 주장은 통설이 아니라 정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문성재 박사는 평양에서 발견되었다는 고분의 2,600여기는 허구라며, 2,600기는 귀틀무덤, 독무덤, 나무관무덤, 벽돌무덤 등을 포함한 숫자라는 것이다. 북한 역사학자 안병찬은 “북한에서 귀틀무덤은 서기전 1세기 말부터 서기 1세기까지 약 100년간 존재했고, 벽돌무덤은 2세기 초에서 3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으며 독무덤은 나무곽무덤 시기부터 벽돌무덤 시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주로 어린이들의 무덤”이라고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고조선고고연구』 제 4호 , 1995)에서 밝혔다는 것이다.

중국계 무덤으로 보이는 양식에서조차 고조선 표지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대량 발굴 되고 있고, 무덤에서 한대 문화의 흔적이 도드라지지 않아 평양이 낙랑이라고 하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인과 조선총독부가 중국에서 수시로 낙랑출토류 유물들을 대량 구입한 징후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낙랑계 유물들이 유독 평양 안에서만 발견 되었다는 점도 의심스럽지만, 중국계로 단정할 만한 세기적인 대발견은 모두 일본인이 했다는 점도 유물 조작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고대사의 유물들을 조작하고 있다. 갈석궁과 강녀석의 경우 역사 지리적으로 문제 가 많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계는 요녕성 서쪽 발해와 접한 수중현을 갈석궁이라고 비정하는데 역대 역사서, 지리서 어디에도 ‘갈석궁 = 수중현’으로 특지한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전시된 유물들은 진시황의 행궁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초라하고, 출토된 유물들과 진시황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도 없으며, 진시황이 갈석산에 올랐다고 했는데 갈석궁으로 비정한 곳은 평지라는 점 등을 들어 ‘조작의 냄새’가 난다고 문성재 박사는 말한다.

▲문성재 박사는 이 날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에 대하여 날조된 것임을 증명하였다.

중국은 요령성 호로도 태집둔에서 임둔태수장 봉니가 발견된 것을 두고 이곳을 도하라고 비정하였는데 도화는 태집둔과 상관이 없다는 게 문성재 박사의 설명이다. 이곳에서 평양, 부여 출토품과 유사한 춘추대 말기 비파형 단검이 출토되고 와당, 도기 등 전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 되었으며 북방문화적 특징이 강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태집둔은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학계에서는 중국계 유물들만 가지고 태둔집을 도하, 요서군 영역으로 비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하에 대해서는 《관자》〈소광편〉에 “중원에서는 … 도하를 격파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여기에 당대 윤지장은 주석을 달아 “‘도하’는 동호의 조상이다.”라고 하였다. 《묵자》〈비공편〉에서 “예전의 도하가 연, 대, 호맥 사이에서 멸망 …” 했다며 이러한 사료적 근거를 종합해 보면 “실제의 ‘도하’는 하북지방에 존재했다는 의미가 된다”고 문성재 박사는 말한다. 즉 “도하는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질의응답시간에 질문자는 “다산 정약용이 북한강을 열수라고 했는데 중국에서도 열수라는 지명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문성재 박사는 “강단학자들이 자기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실학자들을 이용하고 있다. 특히 정약용의 경유가 그렇다”고 답했다. 고대 지명에 대한 것은 중국 사료를 통해서 확인해야 한다했다. 또 다른 질문자는 “한사군의 위치는 학자들마다 다르게 보는데 문성재 박사의 견해는 어디냐”고 물었다. 문성재 박사는 지도의 하북성 근처를 가리키며 “정확하게 비정할 수 없지만 여기쯤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1월 16일(수)에는 ‘임나일본부는 없다’라는 주제로 황순종 선생이 강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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