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주류식민사학계의 주장은 역사범죄행위, 사료적 근거 하나도 없이 역사날조...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일곱 번째)

7.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제1회)

 

고조선의 진번․조선은 하북성 지역에 위치했다.

진번․조선과 연5군은 동일한 지역이다.

연나라 최대 강역은 만번한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였다.

 

1. 고조선의 국경을 알려주는 연장성과 진나라 만리장성

장성은 고조선의 강역을 알 수 있는 유력한 지표 중의 하나이다. 『사기』「조선열전」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나라는 고조선을 침략하여 진번‧조선지역을 차지한 후 그곳을 지키기 위해 연장성을 쌓았다. 또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기존의 진장성과 조장성 및 연장성 등을 연결 보수하여 진나라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러므로 연장성과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단을 통하여 고조선과 연나라 및 진나라의 국경선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연장성의 동단은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이다.

전국시대 연나라는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으나, 연 소왕(BC 311∼BC 279) 때에 이르러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 시기에 고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다. 고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의 영토 상당부분을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때 연나라 군사를 이끈 장수가 진개이다. 연나라는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땅을 지키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다.

이때 쌓은 연장성의 위치를 통하여 진개가 침략하기 전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 및 진개의 침략 후 변화된 국경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연장성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사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 사건은 『사기』「흉노열전」(사료 A-1)과 『사기』「조선열전」(사료 A-2) 및 『삼국지』「위지동이전」(사료 A-3) 등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조선의 강역이 수천 리의 커다란 편차를 보인다. 고조선이 현 중국 하북성 일대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는지 아니면 한반도 북부일대의 소국에 불과하였는지 진개의 고조선 침략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과연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 사건의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쟁점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A-1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1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史記』卷一百十, 匈奴列傳第五十

A-2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A-3 위략 :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예를 서쪽에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연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 第三十, 韓

위의 사료들은 모두 연나라 장수 진개의 동방 침략사건을 기록한 것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료 A-1 : 진개가 동호를 1천여 리 격파한 후 연장성을 쌓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 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했다.

사료 A-2 : (진개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고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사료 A-3 :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사료 A-2와 사료 A-3는 진개의 고조선 침략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같은 사건이라는 데 학계의 이견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사료 A-1이 사료 A-2, A-3와 같은 사건의 기록이냐? 아니면 다른 사건을 기록한 것이냐? 하는데 있다.

만약 사료 A-1이 사료 A-2, A-3와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진개가 공격한 동호는 바로 고조선이다. 연나라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한 것이 된다.

연5군의 제일 서쪽에 위치한 상곡군은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로 학계의 이론이 없다. 진개가 상곡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므로 연나라의 최대 강역은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다. 칠로도산 일대가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인 만번한이 되는 것이다.(아래의 <그림 1>의 참조)

반면 사료 A-1과 사료 A-2, A-3가 다른 사건이라면 진개가 1차로 동호를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 이어서 2차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차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진개가 상곡으로부터 동쪽으로 3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였으므로 연나라의 최대강역은 한반도의 청천강 일대에까지 확장되며, 고조선의 강역은 청천강 이남으로 줄어든다.

▲ <그림 1> 연장성과 만번한의 위치.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호와 조선을 구분하여 쓰고 있다. 이들은 과연 다른 족속인가, 아니면 같은 족속인가, 지나인들은 고구려도 동호라고 하고 있다.

사료 A-1과 사료 A-2, A-3가 같은 사건이냐? 아니면 다른 사건이냐? 에 따라 고조선의 서쪽 강역이 2천여 리나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진개의 동방 침략 사건은 고조선의 국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이들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료 A-1, A-2, A-3는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 이유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만약 사료 A-1과 사료 A-2, A-3가 다른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BC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공격하기 전에는 고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1천여 리의 동호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개가 동호로부터 1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또 동쪽으로 고조선을 공격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사료 A-3)에서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격하여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대부 예가 간하므로 중지하였다’는 구절을 보자. 『전국책』에 의하면 연나라가 왕호를 칭한 것은 BC 323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BC 300년경 진개가 동쪽으로 동호를 공격하기 20여 년 전부터 연나라는 동쪽으로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를 통하여 진개가 동쪽으로 공격한 동호는 바로 고조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사료 A-1의『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진개의 동호 침략 후 연나라는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였다. 요동군이 제일 동쪽에 설치된 군이므로 이때 연나라의 동쪽 국경선은 요동군에 있었다. 그리고 사료 A-3의 『위략』에 따르면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한 후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 그런데 만번한은 요동군에 속한 문현과 번한현이라는 데는 학계의 이견이 없다. 즉 연나라의 고조선 침략 후에도 연나라의 동쪽 국경선은 여전히 요동군에 있었다.

사료 A-1과 사료 A-3의 사건이 있은 후 연나라의 동쪽 국경선이 요동군 일대로 동일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사료 A-1과 사료 A-3가 동일한 사건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사마천은『사기』「흉노열전」에서 연‧진시기에 설치된 진장성․조장성․연장성․진나라 만리장성 등 중국 동북지역의 모든 장성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만약 연나라가 동호를 1천여 리 물리친 후 장성을 쌓고, 또 다시 고조선을 2천여 리 물리치고 쌓은 별도의 장성이 있었다면 당연히 거기에 같이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나라가 쌓은 장성은 진개가 동호를 1천여 리 물리친 후 쌓은 장성에 대한 기록뿐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진개의 동방 침략을 기록한 사료 A-1, A-2, A-3는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사건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개가 공격한 동호는 바로 고조선을 가리킨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사료 A-1의 『사기』「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동호(고조선)를 1천여 리 물리쳤다’고 한데 반하여 사료 A-3의 『위략』에서는 ‘진개가 조선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고 하여 진개가 빼앗은 강역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문은 진개가 빼앗은 진번․조선지역의 위치를 알고 나면 풀린다. 사료 A-1의 『사기』「흉노열전」은 진개가 동호(고조선)를 물리친 동서간의 거리, 즉 상곡에서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 1천여 리를 기술한 것이다. 반면 사료 A-3의 『위략』은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빼앗은 땅의 면적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진개가 빼앗은 진번․조선지역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진번지역에 해당하는 조백하 동쪽의 하북성 지역 600여리와 조선지역에 해당하는 조백하 서남쪽의 하북성 지역 1400여리를 합하여 2천여 리가 된다. 두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런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사료 A-1, A-2, A-3는 모두 같은 사건의 기록이며,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료 A-3의 『위략』에 나오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인 만번한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이다.

그런데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사료 A-1의『사기』「흉노열전」에서 ‘진개가 동호를 1천여 리 물리쳤다’는 기록과 사료 A-3의 『위략』에서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진개가 공격하여 빼앗은 땅의 크기에 대해서도 다음 두 가지로 견해가 나누어진다.

첫째, 진개가 1차로 동호를 공격하여 1천여 리 물리친 후 2차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서 결국 『위략』(사료 A-3)의 기록처럼 진개가 동쪽으로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인 만번한은 상곡(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으로부터 동쪽으로 2천여 리 되는 곳이다. 그래서 이러한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만번한을 현 중국 요령성에 위치한 천산산맥 일대에서 찾고 있다.(<그림 1> 참조)

둘째, 진개가 1차로 동호를 공격하여 1천여 리 물리친 후 2차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서 결국 진개가 상곡으로부터 동쪽으로 3천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인 만번한은 한반도의 청천강 일대까지 이르게 된다. 현재 중국 동북공정은 이 설에 의거하여 『중국역사지도집』에 연장성을 한반도의 청천강까지 그리고 있으며 중국의 각급 학교에서도 이 지도를 토대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기』「흉노열전」과 『사기』「조선열전」및 『위략』의 진개 관련 기록들은 표현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사건을 가리킨다. 따라서 연나라의 최대 강역은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으며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인 만번한은 칠로도산七老圖山이다. 이를 다른 사건으로 보는 것은 진개의 침략 관련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통설의 주장처럼 『사기』「흉노열전」(사료 A-1)과 『위략』(사료 A-3)의 기록이 다른 사건이라고 보더라도 통설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기』「흉노열전」(사료 A-1)에 의하면 진개가 동호를 1천여 리 물리치고 그곳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요동군은 상곡(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 이내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통설에서는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을 현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로 보고 있다. 이곳은 상곡으로부터 2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사기』「흉노열전」의 1천여 리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둘째, 『위략』(사료 A-3)에 의하면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을 경계로 하였다. 통설처럼 진개가 동호를 1천여 리 물리치고 현 중국 요령성 요양일대까지 차지한 상태에서 다시 고조선으로부터 2천여 리를 빼앗으면 어떻게 되는가? 청천강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연나라 땅이 되고 만다. 통설의 문제점을 잘 알 수 있다.

만약 통설의 주장처럼 『사기』「흉노열전」과 『위략』의 기록을 다른 사건으로 보려면, 1차로 진개가 동호를 1천여 리 물리치고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차지한 후 2차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서방 2천여 리(혹은 1천여 리)를 차지하여 연나라 국경이 한반도 청천강 일대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해야 옳다. 그래야만 그나마 관련기록들과 모순이 적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경우 연‧진시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러면 한사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이려는 식민사학자들이나 중국 동북공정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진개의 침략 기록을 왜곡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하여 진번‧조선지역을 차지한 후 만번한을 경계로 하였는데, 만번한이 요동군의 문현과 번한현이라는 데는 학계의 이론이 없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진번‧조선지역은 당연히 연나라 요동군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사기』「조선열전」에 의하면 진번‧조선지역은 훗날 한사군의 진번군과 낙랑군이 되는 지역이므로 한사군은 연나라 요동군의 서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통설에서는 낙랑군 등의 한사군을 요동군의 동쪽으로 잘못 비정하고 있다(다음회에 계속).

글쓴이 : 김 봉 렬 『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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